#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82화
82화. 올 게 왔군
초승달을 연상시키는 모양과 은은한 은빛의 자태.
그리고 빛나는 푸른 보석.
무척이나 섬세하고 아름답게 생긴 브로치였다.
다만.
“왜 저렇게 걸려 있어?”
그 아름다움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무슨 굴비나 홍시라도 매달려 있는 것처럼.
-술을 빚을 때 썼나 본데요?
실제로 브로치가 매달려 있는 곳은 술동이들이 잔뜩 저장된 바로 위쪽 천장이었다.
무슨 효과가 있는 아티팩트인지는 몰라도 술들을 위해서 매달아 놓은 것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툭.
유릭이 가볍게 뛰어 브로치를 낚아챘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브로치는 생긴 것과 같이 서늘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수확은 이거 하난가?”
-다른 보물은 없어 보여요.
휙휙 둘러보았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
이걸로 적당히 만족하곤 유릭이 지상으로 올라왔다.
이곳 지하의 안식처도 해골 거인의 뼈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다.
혹시 나중에 또 무언가가 발견될지도 모르니까.
‘그럼 일단은.’
브로치의 기능부터 살펴볼까.
올라온 유릭이 학수고대하며 브로치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가운데 푸른 보석을 중심으로 브로치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어떤 능력을 가진 아티팩트일까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있는데.
“?”
-?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람이 불거나 얼음이 쏟아지거나 하는 일도 없고, 심지어 인근 대기의 마나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이건 정말로 아무런 현상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저 빛을 발하고 있을 뿐.
“이것뿐이야?”
-그런 거 같은데요?
빛을 내는 능력이 전부라고?
그럼 술동이들 위에 그렇게 매달아 놓은 이유가 뭐야?
‘형광등이냐고.’
밀려오는 실망감에 유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천 년 전의 거인이란 놈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고작 빛을 내는 브로치가 전부라니.
이런 건 아무 마법 상점에나 들어가 <라이트(light)> 마법을 주문하면 나오는 물건이 아닌가?
물론 간단한 마법이라 해도 아티팩트라면 나름 값이 나가긴 하지만, 지금 그런 얘길 하는 것이 아니다.
천 년 전의 거인을 -비록 언데드 상태였지만- 물리치고 얻은 보상이라기엔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그때, 기웃기웃 브로치를 살피던 메르가 별것 아닌 것처럼 얘기했다.
-음, 그래도 마나로 만들어진 빛은 아니네요.
“응? 만들어진 빛이 아니라고?”
-네. 빛을 만들어 흩뿌리는 마법이 아니라 빛을 저장하는 마법이 새겨져 있어요. 저장한 빛을 방출하는 마법이에요.
“빛을 저장하는…….”
뭔가 더 쓸모없어 보인다.
필요할 때 재깍재깍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굳이 충전을 해야 한단 얘기 아닌가?
-생김새나 술식의 구성을 보건대 달빛을 저장하는 물건이네요. 낮에도 달빛을 쐬기 위해 제작된 물건 같아요.
“…….”
메르의 말에 유릭이 침묵했다.
달빛이라니…….
‘그냥 평범한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 아티팩트는 아닌 모양이군.’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특별한 의미가 담긴 브로치인 것 같다.
물론 유릭은 달빛이라는 것이 사실 태양빛을 반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달빛이란 광량이 약한 햇빛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이 세계에선 다른 의미로 달빛과 햇빛을 구별하고 있었다.
‘마법적인 의미가 완전히 다르지.’
달은 차가운 계통의 마법을 상징하며 동시에 고요, 정적, 안락함 등을 나타낸다.
단순히 이미지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마법 술식에 통용되는 상징들이다.
해는 그 반대로 뜨거운 계통의 마법을 뜻하고 열정, 환호 등을 의미한다.
이 외에도 더 깊이 들어가면 훨씬 많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고.
여하튼 마법과 주술에서 그만큼 다양한 의미를 가진 둘이었기에, 달빛과 햇빛 역시 구분되었다.
이 브로치는 그중에서도 달빛만을 쬐어 저장하는 물건.
그러니 그에 따른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던 아티팩트란 뜻이다.
“……술동이 위에 매달아 놨던 건 이거 때문인 건가.”
설마 그 특별한 목적이라는 게 술을 빚기 위함은 아니겠지?
-달빛을 쬐어야 더 맛있어지는 술인가 봐요.
그게 뭔 괴상한 일인가 싶지만, 뭐 천 년을 살아온 거인의 취향을 자신이 어찌 알겠는가.
어쨌든 중요한 건 달빛을 흡수하는 브로치가 자신에게 들어왔다는 것.
술 빚기 말고 분명 다른 만들어진 목적이 있을 테지.
……제발 있어야만 한다.
“뭐 수련할 때 켜놓으면 되겠어.”
달빛은 예로부터 서리 마나를 활성화시킨다고 하였다.
때문에 로스카에서는 일부러 낮이 아닌 밤에 훈련하는 이들도 많았다.
염화신무를 익힌 유릭과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상관이 있게 됐다.
‘엑셀레아가 있으니.’
엑셀레아가 자신의 빙하설월의 기운을 빨아들여 사용한다.
간접적으로나마 유릭도 서리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러니 엑셀레아를 들고 수련할 때는 이 브로치도 제법 도움이 되리라.
특히 빙하설월은 달빛을 쬐고 자라는 꽃이란 말도 있으니, 자신의 기운도 달빛에 더 활성화될 테지.
그래 봤자 체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변화긴 하겠지만.
‘원래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천천히 알아보는 걸로 하고.’
지금 당장은 수련이 먼저다.
유릭이 가슴께에 은빛 브로치를 매달았다.
* * *
이제는 정말로 이 안식처에서 유릭을 방해할 존재는 없었다.
해골 거인은 쓰러졌고 그 뼈에 남은 기운이 여전히 드레이크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다.
그렇게 방해꾼은 아무도 없어진 수련터에서.
유릭은 두 가지를 목표로 수련을 이어갔다.
하나는 염화신무를 7성의 경지에 올려놓는 것.
처음 적색 지대로 들어올 때부터 유릭이 정해놓았던 목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번에 새로 생긴 목표.
엑셀레아의 바람과 몸속의 빙하설월의 기운을 온전히 조화시켜 하나의 기운처럼 활용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목표로 유릭이 수련을 이어갔고.
어느덧 그가 적색 지대에 발을 들인지, 1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 * *
남색 지대.
군청색의 오로라가 펼쳐진 그곳에서 일단의 무리가 끙끙거리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의 아이스 골렘과 그를 상대하는 전투1반의 아이들이 다섯.
“마르쉘! 옆에 조심해!”
“응!”
친구의 경고에 마르쉘이 재빠르게 앞으로 굴렀다.
부웅!
아이스 골렘의 주먹이 그녀가 있던 장소를 쓸고 지나갔다.
조금이라도 피하는 게 늦었다간 갈비뼈 서너 대쯤은 쉬이 박살 났을 위력이었다.
“뒤쪽으로 돌게!”
앞으로 피한 김에 마르쉘이 아이스 골렘의 가랑이 사이를 돌파했다.
골렘이 그런 마르쉘을 잡으려 수그렸으나, 정면에서 짓쳐오는 아이들 탓에 여의치가 않았다.
그사이, 뒤로 돈 마르쉘이 골렘의 무릎 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베르겐 장로와 전투1반의 교관 중 하나가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 잘하는군요.”
“흠.”
압도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게 당연하다.
아이스 골렘은 4성 정도는 되어야 수월히 잡을 수 있는 마물.
반면 저 아이들은 이제 2~3성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이니까.
“이번 기수도 제법 재능이 있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로님?”
“뭐, 그렇군. 똘똘한 아이들이야.”
이 정도만 해줘도 재능 있단 소리를 듣기엔 충분했다.
때문에 교관은 흡족하게 보고 있었지만.
묘하게 베르겐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다름이 아니다.
아이들이 상대하는 것이 바로 그 아이스 골렘이었기 때문이다.
‘끄응.’
다른 마물이었다면 베르겐도 솔직하게 아이들의 재능을 칭찬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하필 아이스 골렘이다 보니 그럴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몇 년 전에 보았던, 뇌리에 각인될 정도의 그 광경을 보고 난 후론.
그때.
콰과과과과!
순간 베르겐 장로가 멍해졌다.
과거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불꽃의 용이 아이스 골렘을 양단하며 치솟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도 그때 생각을 하다 보니 환각을 보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에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려보니.
“도, 도련님!?”
“유릭 도련님이야!”
“진짜? 진짜로!?”
환각 따위가 아니었다.
아이들 역시 그와 같은 것을 보고 놀라고 있었으니까.
상대하던 아이스 골렘은 양단되어 쓰러졌고, 그 앞에는 웬 청년 하나 서 있었다.
불타는 검을 들고선.
“아, 미안. 수업 중이었구나. 위험한 줄 알고.”
유릭이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녹시아를 집어넣었다.
애들이 싸우는 것을 보곤 한달음에 달려와 검을 휘둘렀는데 딱히 위험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괜히 끼어들었단 생각에 무안해졌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위험한 일이 아닌 것이 어딘가.
“도, 도련…… 도련…….”
“응? 마르쿠트의 동생이구나. 이름이 마르쉘이던가?”
“네, 네! 맞아요! 기,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기억하지, 그럼. 잘 단련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유릭이 툭 머리에 손을 올리자 마르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남녀의 의미가 아니라 동경하던 존재를 눈앞에 두고 떨고 있는 것이었다.
“도, 도련님, 저기 저, 그게…….”
어쩌면 지금이 그때의 감사를 전할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마르쉘이 더듬더듬 입을 열 때.
“유릭 공자!”
유릭을 발견한 베르겐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유릭이 그를 돌아보았고, 마르쉘은 아쉬운 얼굴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폐관에 들었다고 했는데 벌써 돌아온 것이냐?”
“어. 처음부터 1년 예정이었고, 이제 곧 20살이 되니까.”
예정했던 1년보다 살짝 더 오래 있긴 했으나 큰 차이는 없다.
20살 생일이 되기 전에 돌아오기만 하면 되니까.
“그렇군…….”
베르겐이 옆을 보았다.
단칼에 베여 두 동강 난 아이스 골렘이 보인다.
몇 년 전에 보았던 광경이 눈앞에 다시 떠오를 정도로 닮은 광경이었다.
단지.
“성장했구나.”
그때는 잔뜩 힘을 끌어 올려 한번 휘둘렀을 뿐인 유릭이, 지금은 너무나 가볍게 휘둘렀다는 차이 정도.
그 차이가 새삼 다가와 베르겐이 격세지감을 느꼈다.
고작 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그새 이렇게 성장했단 말인가.
“그야 한창 자랄 나이잖아?”
“그건 이 늙은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하하하.”
너스레를 떠는 유릭을 보며 베르겐이 하아, 한숨을 쉬었다.
이 능글맞은 성격은 꼬마 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질 않는군.
“……가문까지 수행해 주마.”
“응? 딱히 그럴 필욘 없는데.”
“가문의 직계가 수행원 하나 없이 돌아다니면 본이 서지 않아.”
“여전히 그런 거에 까탈스럽구만.”
투덜거리면서도 유릭은 베르겐의 수행을 받아들였다.
아이들은 어쩌냐고 물었지만 다른 교관이 있어 괜찮다고 답하니 유릭도 더 거절하진 않았다.
“그렇게 됐으니 난 먼저 갈게, 마르쉘. 다음에 보자고.”
“네, 넷!”
마르쉘,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손을 흔들어준 후 유릭이 베르겐과 함께 마경 바깥으로 향했다.
“언제쯤 너도 진중해질 테냐. 데릭 공자를 보고 좀 배워라.”
“뭐 어때. 안 그래도 똑같이 생겼는데 성격이라도 달라야 구분이 되지.”
“에잉, 쯧쯔.”
수행이라곤 해도 사실 그냥 말동무나 다름없었다.
유릭은 적색 지대에서의 수련 얘기.
그리고 베르겐은 유릭이 없던 1년이 좀 넘는 사이에 있었던 가문의 얘기.
대화거리는 전혀 모자라지 않아 둘 사이에 말이 끊기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중.
“그러고 보니 최근 아칸과의 묘한 기류가 있다.”
“……묘한 기류?”
유릭의 눈동자 깊은 곳이 어두운 빛으로 번뜩였다.
“근래 아칸 놈들과의 분쟁이 하나둘 정리되고 있어. 정확히는 그쪽에서 몸을 빼는 모양새라 로스카도 같이 빠지는 중이다.”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아칸이 먼저 빠지면 로스카도 별다른 수가 없다.
그렇다고 놈의 영역까지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 다른 얘기는 없고?”
“이건 아직 비밀이긴 하다만, 너는 가문의 직계이니 들어도 괜찮겠지.”
“뭔데.”
“아칸 쪽에서 휴전을 제안해 온 모양이다.”
그리 대답한 베르겐이 옆을 힐긋 보고는 순간 멈칫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중하지 못하게 까불거렸던 유릭.
그러나 지금 유릭의 표정에선 그런 악동스러운 모습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올 게 왔군.”
있는 것은 보다 성숙하고 정련된, 깊은 눈빛.
예전만 해도 앳된 티가 엿보였던 것은 어디 가고, 이 1년 사이에 완전히 어른이 된 모습이었다.
그 변화에 베르겐이 말문을 잃고 있으려니.
“왜 그래, 장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온 유릭이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휴전이라니 뭔데? 좀 자세히 얘기해 봐.”
“어어, 그래.”
아직도 얼떨떨한 모습으로 베르겐이 지난 1년의 얘기를 하였고.
유릭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조용히 그것을 경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