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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85화 (85/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85화

85화. 내가 해야

탁.

모처럼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씨.

차가운 로스카의 땅에도 한 번씩은 이런 날이 있다.

그 좋은 날에 유릭이 마도서를 덮고 앉아 있던 풀밭에서 일어났다.

‘이론은 완벽해.’

마도서는 완전히 숙지했다.

남은 것은 직접 사용해 보며 손에 익히는 것뿐.

스릉.

그가 녹시아를 뽑아 들었다.

내기를 끌어올리니 검신을 따라 불꽃이 피어오른다.

주홍빛의 영롱한 빛을 발하는 그 불꽃은, 딱히 특별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불의 기운이었다.

그렇게 불길에 휩싸인 검면에.

유릭이 룬어를 새겼다.

‘<프로미넌스>.’

6성의 불의 마법 중 하나, <프로미넌스>.

홍염의 이름을 가진 그 마법은 이름대로 붉은 불꽃을 피워 올리는 마법이다.

본래도 불꽃은 붉지 않냐고 할 수 있지만.

화륵!

녹시아의 검신을 감싸던 주홍빛 불꽃이 점차 붉게 물들어간다.

그것은 전혀 자연적이지 않은, 핏빛처럼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확실히.’

타오르는 적염(赤炎)의 열기를 가까이서 느끼며 유릭이 끄덕였다.

이 마법은 <파이어 볼트>처럼 범용성 좋은 성능을 가지지도 않았고 <익스플로전>처럼 폭발에 모든 것을 건 것도 아니었다.

단적으로 말해 별다른 추가 술식이 없다.

그저 뜨겁게 타오를 뿐.

‘장난 아닌데?’

그런데 그 열기가 범상치가 않았다.

지금 자신은 화룡검화도 쓰고 있지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 끌어올린 기운을 사용해 프로미넌스를 새겼을 뿐.

그런데 느껴지는 열기는 몇 번이나 중첩한 화룡검화와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애초에 프로미넌스는 보조 마법이니까.’

단일로 사용하는 마법이 아니라 다른 술식에 덧대어 화력 증강용으로 사용되는 마법이다.

오히려 유릭에겐 더욱 좋았다.

어지간한 완성된 마법보단 오히려 보조 마법 쪽이 자신에겐 더 활용도가 높다.

‘확실히 색이 달라.’

화룡검화는 중첩할 때마다 점점 태양과 같은 광휘를 띤다.

반면 프로미넌스는 지옥의 불꽃처럼 불길한 핏빛이었다.

눈으로만 보아도 확연한 차이.

그 외에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뭐 불이 뜨거우면 다 된 거지.’

그거면 충분히 만족이다.

마법만으로 화룡검화 만큼의 화력을 낼 수 있다니 잘된 일이 아닌가.

5중첩의 검화와 프로미넌스를 같이 쓴다면 지금까지보다 월등한 불길을 뿜어낼 수 있게 되었단 뜻이니까.

다만.

‘녹시아가 버텨주려나?’

아직은 녹시아가 거기까지 버텨줄 것 같지는 않다.

과거 3중첩의 검화 때문에 녹시아가 망가진 이후로 꾸준히 녹시아에 내기를 먹이고 있다.

그 덕에 현재 녹시아는 처음 데릭에게 받았을 때에 비해 월등히 단단하고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5중첩 검화에 프로미넌스까지 건 화력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당분간은 좀 조심해서 써야겠어.’

전투 중에 검이 망가지면 큰일이니까.

그때 화륵, 하고 한번 플레어를 토해낸 프로미넌스가 맥없이 피식 꺼졌다.

‘끝났나?’

유릭이 입맛을 다시며 검을 보았다.

녹시아를 두르고 있던 지옥의 불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 꺼져 있었다.

유릭이 다시 한번 내기를 끌어올려 보지만, 기운만 살짝 움직일 뿐 불길은 다시 피어오르지 않았다.

프로미넌스의 약점.

이 적염의 불길은 꺼지기 직전의 촛불과 같아서, 한번 거대한 화력을 피워올린 후 맥없이 꺼져 버린다.

그 후 한동안은 적염은 물론 평범한 불꽃도 피워올릴 수 없다.

6성 수준에 이만한 위력의 보조 마법이 없는데도, 대부분의 화염 술사가 프로미넌스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번 커다란 마법을 토해내면 그 이후론 완전히 무력해지니까.

믿음직한 아군의 서포트가 없이는 좀처럼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었다.

‘그래도 난 다르지.’

불의 기운이 꽉 막힌 듯 솟아나지 않는 것을 살펴보곤 유릭이 스륵, 엑셀레아를 뽑았다.

거친 서릿바람이 선선히 휘몰아친다.

프로미넌스와는 아무 상관 없이 그 검은 차가운 바람을 흩뿌리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확인한 뒤 그가 다시 엑셀레아를 넣었다.

그에겐 이제 빙하설월의 기운을 뽑아 쓰는 엑셀레아가 있다.

이거면 불의 기운이 회복할 때까지 버티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리라.

‘회복은 얼마나 걸리려나.’

회복할 때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도 관건이다.

마도서에 적힌 바론 불의 마나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더욱 빨리 복구가 된다고는 하던데.

스릉.

녹시아를 집어넣고 유릭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불꽃이 막힌 스스로의 신체를 관조하며 기운의 흐름을 살펴볼 때다.

-티르옌이라……. 으음…….

한편, 아까부터 메르가 한쪽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차피 별일 아니라 생각해서 무시하고 마법을 익히고 있었는데, 다 읽을 때까지 저러고 있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왜 그래?”

-아뇨, 그게…….

메르가 꾸물꾸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 큰일은 아닌데요.

“그래서 뭔데?”

-티르옌 놈들은 조금 불편해서요…….

“불편해?”

유릭이 갸웃거렸다.

티르옌은 용을 신성시하는 곳이니 편하면 편했지 불편할 이유가 없을 텐데.

-예전에 어릴 때 아직 잘 모르고 정체를 들킨 적이 있는데요. 워낙 귀찮게 달라붙어서요.

“달라붙어?”

-잘 때도 밥 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한시도 안 떨어지고 붙어오는 거 있죠? 어지간히 해야지, 어휴. 덕분에 그때 고행은 완전히 실패했어요. 시간만 날렸죠.

티르옌이 용에 집착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만, 예전에도 다를 건 없었나 보다.

메르의 어린 시절이라면 못해도 수백 년은 전일 텐데.

“들키면 안 된다 이거군.”

-네. 어르신도 조심하세요.

메르가 비밀 얘기라도 해준다는 듯 속삭였다.

‘내가 들킬 일은 없는데.’

왜냐면 자신은 용이 아니니까.

그래도 그걸 모르는 메르 입장에선 충분히 할 법한 충고긴 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이 녀석, 아직도 내가 용이 아니란 걸 몰라?’

유릭이 눈을 가늘게 뜨고 메르를 바라보았다.

메르와 함께 지낸 지도 꽤나 시간이 지났다.

예전에는 정체를 들키면 용의 분노를 사리라, 그런 식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녀석의 평소 행실을 보면 들켜도 딱히 큰일은 없을 것 같다.

물론 화는 내겠지만 육포라도 한가득 안겨주면 금세 풀리겠지.

그런 생각을 한 뒤로 유릭은 더 이상 정체를 숨기려고 전전긍긍하지 않게 되었다만.

‘아직도 모를 줄이야…….’

설마 아직까지도 자신의 정체를 모를 줄은 몰랐다.

말은 안 해도 은연중엔 눈치채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르신?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갸우뚱거리는 메르에게서 유릭이 홱 고개를 돌렸다.

고백할까 생각도 드는 한편, 대체 언제쯤 돼야 이 녀석이 눈치챌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래서 유릭은 그냥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아무튼 티르옌이 불편하다고? 그럼 넌 여기서 기다릴래?”

화제도 돌릴 겸 유릭이 그리 물으니, 메르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얼마간 끙끙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대답했다.

-……갈게요.

유릭이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귀찮음보단 호기심 쪽이 더 큰 녀석이니까.

* * *

두 달 후.

유릭을 태운 마차가 티르옌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임무처럼 마차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것이 아니다.

달리는 마차만 십여 대가 있었고 그 주위를 말을 탄 기사들이 빼곡히 감싸고 있다.

마차 안에는 로스카의 뛰어난 행정관들과 그리고 정예에 속하는 서리술사들.

그 외에 교류전에 참가하기 위한 어린 술사들도 있었다.

이 대인원을 이끌고 있는 이는.

“긴장은 안 되는 모양이구나.”

로스카의 가주 발렌티나 로스카.

가장 선두의 마차 안에 유릭과 함께 둘이 타고 있는 그녀였다.

아칸과의 휴전이라는 커다란 협정을 위해 가주가 몸소 움직인 것이다.

참고로 엘린은 가문의 일을 보기 위해 남았고, 데릭은 오고 싶다고 했으나 발렌티나가 막았다.

그녀가 동행을 허락한 것은 유릭뿐이었다.

“적당히 긴장하고 있습니다. 뭐라 해도 아칸 쪽 가주도 온다는 모양이니까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있는 이상 우리 가문의 사람이 다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얘기하곤 그녀가 눈을 감았다.

초월의 경지에 오른 이가 보호해 준다니, 이보다 든든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아칸의 가주 역시 초월의 경지에 이른 이 중 하나.

대륙에 셋 있는 10성 중 한 명이다.

그런 이를, 그것도 적대 관계로 보게 되는데 긴장하지 말라는 것이 무리이리라.

단지.

“어머니. 출발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유릭의 진짜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알고 있다. 아이작 말이지?”

“예. 항상 주의하십시오. 또 어떤 수작을 부렸을지 모르니까요.”

그의 형인 아이작이 어떻게 나올지.

이미 미래는 많이 달라졌다.

유릭의 볼모 얘기가 사라진 것도 그렇고, 아이작의 처지 역시 마찬가지.

회귀 전이었다면 아이작은 이미 뻔뻔스럽게 가문에 돌아와 엘린과 대립 구도를 만들 시기였다.

‘그리고 가문 내에서 아칸의 협정 얘기를 꺼내서 세력을 늘려갔었지.’

결코 이번처럼 아칸 쪽에서 먼저 요청을 해오는 등의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아이작이 주도하여 협정을 계획해 체결하는 식의 그림.

그게 본래 아이작이 원하던 이상적인 그림이었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아이작은 가문에 돌아오기는커녕 북쪽 땅에 발조차 들이지 못하고 있다.

가문의 지시로 북쪽 땅은 물론, 대륙 곳곳에 수배령이 내려진 것이다.

대륙 공적까지는 아니라지만 필시 가시 돋친 방석에라도 앉아 있는 기분이리라.

유릭이 놈의 술수를 모조리 쳐부수고, 그 민낯을 드러내게 했기에 가능했던 일.

만약 판정을 내리는 심판이 있다면 지금까지는 자신의 판정승이겠지.

다만 놈도 아직 죽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는 만큼 더욱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 주의하도록 하마.”

발렌티나의 입꼬리가 침울한 듯 내려갔다.

평소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녀를 생각해 보면, 그건 무척이나 괴로운 표정이리라.

10성의 경지를 초월(超越)이라 부르는 이유는 말 그대로 그들이 인간을 초월해 반신의 영역에 도달했다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여성은 그런 초월과는 거리가 먼, 그저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유릭이 단단히 말을 이었다.

“아이작은 마왕의 힘을 쓰고 있습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바에요. 이 이상 내버려 뒀다간 가문에 큰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발렌티나가 눈을 감았다.

유릭의 당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물론 머리로는 모두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그녀의 심장은 어떻게 뛰고 있을까?

“넌 걱정하지 말고. 이 어미에게 모두 맡기렴.”

그리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아무도 없는 겨울산처럼 쓸쓸하게 들렸다.

‘어머니.’

유릭이 조용히 다짐했다.

역시, 자신밖에 없다.

내가 해야 한다.

남에게 떠넘기거나 어머니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마차 안에는 고작 둘뿐이었지만, 그 안에 얽힌 감정과 결의는 더없이 복잡하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덜컹!

로스카의 마차가 신룡가 티르옌의 땅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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