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86화
86화. 상관없는 일
여러 대의 마차가 푸른 갈대밭을 가로지른다.
티르옌의 영역은 무척이나 한적한 느낌의 너른 평야 지대였다.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지평선.
지금은 푸르른 곳이지만 가을이 되면 황금빛 갈대로 물결치는 아름다운 정경이 있는 곳.
탁 트인 경치는 보는 이의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어주었다.
목적지인 티르옌의 마을은 저 앞쪽, 완만한 경사를 따라 지어져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마을에 도착하니 미리 마중 나온 이들이 있었다.
말을 탄 열댓 명의 인원이 로스카의 마차를 맞았다.
유릭과 발렌티나는 마차에서 내려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발렌티나 로스카입니다. 이쪽은 아들인 유릭.”
“유릭 로스카입니다.”
유릭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둘의 인사에 티르옌 쪽도 황송하다는 듯 허리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당주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티르옌 쪽의 대표가 말머리를 돌렸고 발렌티나는 다시 마차에 탔다.
반면 유릭은 마차에 타지 않고 빈 말 위에 올랐다.
이대로 경치를 보며 움직이고 싶었던 탓이다.
티르옌의 인원의 뒤를 따라 로스카의 일행이 천천히 마을을 가로질렀고, 유릭은 근방의 정경을 상세히 살폈다.
‘한적한 시골 같은 느낌이군.’
여러 영지를 보유하고 있는 로스카나 아칸과 다르게 티르옌의 땅은 이 마을 하나뿐이다.
널찍이 지어진 마을은 넓이만 보면 로스카의 도시보다도 훨씬 넓었으나, 건물의 밀도는 큰 차이가 있었다.
오밀조밀 지어진 로스카의 도시나 마을에 비해 티르옌의 마을은 옆집까지의 거리가 말을 타야 할 정도로 넓었다.
“티르옌에서는 개인의 공간을 가장 중요시하거든요.”
어느새 유릭의 옆에 다가온 안내인 대표가 그런 얘기를 하였다.
티르옌 일족 특유의 갈색 피부와 잿빛 머리.
전통복인 하얀 천으로 된 원피스를 입은 남자였다.
이마에는 작은 보석이 매달려 있는 머리띠 같은 악세사리를 하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유릭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면 집들도 다 일률적이지 않고 독특하게 생겼다.
하나의 마을이라기보단 여러 별장들이 모인 공간 같은 느낌이었다.
“저마다의 수행을 위해선 저마다의 공간이 필요하니까요.”
“집 사이의 간격이 넓은 것도 그것 때문인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대표가 무슨 관광지라도 안내해 주는 것처럼 티르옌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다.
회귀 전 용병 신분으로 대륙 여러 곳을 돌아다녔던 유릭이었지만 티르옌의 땅은 처음이다.
말로만 듣던 장소에 실제로 와보니 나름 신기한 구석이 많았다.
“공자는 사람의 얘기를 참 잘 들어주는군요.”
“제가요?”
“타인의 얘기를 허투루 흘려듣지 않고 적절히 추임새를 넣어주니 뭐라도 더 얘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렇습니까?”
유릭이 눈을 깜빡였다.
그런 소리는 회귀 전에도 후에도 들은 적이 없다.
뭐 나쁜 말은 아니니 좋게 받아들이긴 하겠다만…….
어안이 벙벙한 유릭을 보고 싱긋 웃고는 대표가 말을 몰았다.
“곧 당주님의 거처입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티르옌의 당주.
이 커다란 혈족의 마을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고 현명한 노인.
곧 발렌티나와 유릭이 그의 거처로 안내되었다.
* * *
당주와의 만남은 짧게 끝났다.
듣기로 티르옌의 현 당주는 그 나이가 100살이 넘었다고 한다.
마나의 축복으로 평균 수명보다도 오래 산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이가 나이다 보니 오랫동안 손님을 받을 기력은 없다고 하였다.
발렌티나와 유릭을 맞을 때도 이불 속에서 상체만 일으킨 채 맞이하였다.
당주의 거처를 나온 일행은 한동안 머물 장원으로 안내되었다.
마을 내에서도 유달리 커다란 곳으로, 몇 채나 되는 건물로 이루어진 격식 있는 장원이었다.
이런 장원이 마을 내에 몇 곳이 있었는데, 이미 다른 곳엔 아칸이 머물고 있단 얘기도 들었다.
‘먼저 와 있었군.’
사실 티르옌은 지리적으로 북쪽보다 남쪽에 더 가깝다.
똑같이 출발해도 아칸이 먼저 도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발렌티나와 따라온 행정관들은 쉴 틈도 없이 본채에서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당장 오늘 저녁에 아칸 쪽과 회담을 하게 생겼으니 조금도 쉴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한가한 사람이 있었으니.
교류전만을 위해 따라온 기사들.
그중에서도 특히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하는 유릭과 마르쉘은 정말로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교류전, 긴장돼?”
“아, 아뇻, 괜찮아요!”
말을 거니 마르쉘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어찌나 세차게 젓는지 필사적인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교류전은 선발된 몇 명의 기사들이 치르게 되는데, 유릭과 마르쉘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유릭은 기사는 아니지만 티르옌 쪽의 수석 제자와 붙게 되었고, 마르쉘은 성인이 아닌 아이들 대표로 나가게 되었다.
전투1반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올리고 있어 뽑혔다나.
“열심히 할게욧!”
마르쉘이 혀라도 씹을 듯한 기세로 얘기했다.
이렇게 떨고 있는데 괜찮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뭐 상관없겠지.
실력이 있으니 뽑힌 것일 테고, 무엇보다 이런 것도 다 경험이다.
자고로 어릴 때는 결과보다 경험이 중요한 법.
유릭은 아이들의 대표로 나온 마르쉘에게까지 승리를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당분간 자유시간이니까 가서 쉬고 있어. 난 산책 좀 하러 가볼게.”
“아, 넵!”
유릭도 눈치가 없지는 않다.
자신이 있으면 더 긴장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그녀를 혼자 쉬게 하고는, 장원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곤 한쪽에 보이는 푸르른 갈대밭으로 느긋이 걷기 시작했다.
‘회담이 어떻게 될지 신경 쓰이긴 하는데.’
사실 유릭의 관심은 친목을 위한 교류전보단 아칸과의 회담 쪽에 쏠려 있었다.
볼모 얘기는 없어졌다곤 하나 다른 조건이 안 걸릴 수는 없을 것이다.
대체 어떤 얘기가 오고 갈지, 그리고 어떻게 결정이 날지 신경이 쓰여 참을 수 없었다.
다만 그런 얘기를 꺼냈더니.
-이쪽은 어미에게 맡기고 너는 너의 일을 하거라.
-제 일이요?
-교류전 말이다. 명목을 위한 것이라곤 하나 당연히 이기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
발렌티나에게 입구부터 차단되었다.
교류전을 이길 생각이나 하고 복잡한 협정 얘기는 어른들에게 맡기란 말이었다.
결국 유릭은 본채에서 열리는 회의에 들어갈 수 없었다.
‘말씀대로 일단 이기고 볼까.’
회담은 당장 오늘부터 시작되지만 하루아침에 끝날 일이 아니다.
며칠은커녕 2~3주씩 걸려도 이상하지 않은 사안.
서로 준비해 온 것들은 있지만 의견 조율이 힘든 데다, 워낙 논의할 바가 광범위하여 일조일석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반면 교류전은 며칠 후에 시작해 하루면 끝나는 소소한 이벤트다.
교류전이 끝나더라도 회담은 한참이나 이어진단 얘기.
그렇다면 어머니의 말을 따라 교류전 쪽에 먼저 집중해도 좋을 테지.
“그나저나 너는 안 나가냐?”
한창 무성한 갈대밭을 걷던 유릭이 바닥의 그림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림자가 살짝 일렁였다.
<잠영(潛影)>을 사용한 글렌이 그곳에 모습을 감춘 채 유릭을 호위하고 있었다.
“13기사단인 제가 그런 공적인 자리에 나갈 리가 없지 않습니까.”
“왜 나갈 수도 있지. 대외적인 다른 신분도 있잖아.”
“괜히 눈에 띄기 싫습니다.”
말투만 공손하지, 내용은 퉁명스럽기 그지없다.
1년 만에 만나도 여전히 녀석은 녀석이란 생각에 유릭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괜찮으십니까? 티르옌에서 도련님을 주목하고 있을 텐데요. 스카디에서의 일 때문에 교류전이니 뭐니 해서 도련님을 꾀어낸 게 아닙니까.”
“알아. 그러니까 밖으로 나왔지.”
스카디 왕국의 그웬델에서 발견된 <수정드래곤의 레어>.
티르옌은 그 근방을 집요하게 조사하였을 것이고, 첫 발견자가 자신이란 걸 알아냈을 것이다.
어쩌면 드래곤의 비늘로 악세사리를 주문 제작했다는 것까지 알아냈을지도 모르지.
아칸과의 회담은 큰일이긴 하지만 티르옌이 신경 쓸 일은 아니고, 교류전은 결국 자신을 만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티르옌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자신에게 있을 드래곤 레어의 정보뿐이다.
‘메르, 잘 숨어 있어.’
-네, 어르신.
유릭의 당부에 메르가 소곤소곤 대답하며 양발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하였다.
유릭의 품속에 들어간 상태로 뻣뻣이 몸을 굳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들키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유릭이 피식 웃으며 산책을 이어갔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지났을까?
저벅.
억센 갈대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올 게 왔다는 생각에 유릭이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적절히 꾸며둔 시나리오를 떠올리며 그쪽을 보니.
“……너?”
“유릭 공자…….”
찌푸린 눈으로 침음성을 흘리는, 클레어 아칸의 모습이 있었다.
“무슨 일이니, 클레어?”
거기다 혼자도 아니었다.
* * *
“클레어, 그렇게 노려보면 실례잖니. 오늘 우리가 화해를 위해 이곳에 왔다는 걸 잊진 않았지?”
“……잊지 않았어요, 언니.”
“자, 눈에 힘 풀고.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줄 알아야 일류인 법이야.”
“네…….”
유릭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클레어가 맥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말 몇 마디로 클레어를 꼬리 내린 강아지로 만든 이는 태양 속에서 더욱 붉게 보이는 적발의 여성이었다.
눈빛은 에메랄드를 닮은 벽안.
밝게 빛나는 보석 같은 외모를 보니 옛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뵙습니다, 샤니스 아칸.”
아칸의 장녀이자 세 번째 자식인 샤니스 아칸.
루카스 아칸, 필리페 아칸과 함께 차기 가주로 유력시되는 후보 중 하나.
회귀 전 유릭이 아칸에 볼모로 팔려갔을 때, 마주친 적이 있던 여인이었다.
그냥 얼굴만 한 번 본 정도지만.
“당신이 유릭 로스카인가요?”
“맞습니다.”
“후후,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듣던 대로 훤칠한 청년이군요.”
“…….”
대체 누구한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굳이 묻지는 않았다.
보나 마나 별 시답잖은 얘기나 오갔겠지.
“스카디에선 큰 활약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샤니스가 눈웃음을 지으며 물어왔다.
유릭이 눈을 찡그렸다.
‘사막의 일이 아니라 스카디의 일을 물어?’
이 여자도 티르옌처럼 용에 대해 떠보려는 건가?
“활약이라 할 만한 건 없었는데요.”
“그럴 리가요. 여왕이 직접 훈장을 보낼 정도가 아니었나요.”
“…….”
눈이 가늘어지는 유릭.
여왕에게 훈장을 받은 일은 대외적으론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완전히 비밀인 것은 아니기에 따로 정보원을 부리면 알아내기 어렵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인즉슨, 일부러 따로 정보원을 부렸다는 얘기다.
‘어째서 아칸이?’
스카디에서의 일이 아칸과 연관이 있었나?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 많던 보물 사냥꾼 중에 아칸의 사람도 섞여 있었을지 모르지.
한편 클레어는 처음 듣는 얘기인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으나, 샤니스가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며 그녀를 다독였다.
‘루카스 아칸이랑 있을 때랑은 완전히 다르군.’
긴장을 풀고 있는 클레어를 보니 사막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사막에서 루카스와 있던 클레어는 잔뜩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같았는데.
“그나저나 제게 빚을 진 것으로 봐도 될까요, 공자?”
그때 샤니스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해왔다.
유릭이 의문스럽게 눈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샤니스가 코웃음을 쳤다.
“공자가 우리 아칸을 사칭해 크라우 공작의 기사들을 죽인 일 말이에요.”
“…….”
그제야 유릭은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이해했다.
그때 자신이 사용한 불의 기운을 보고 크라우 공작 측에서 오해를 한 것이다.
그 일을 빌미로 아칸 쪽에 압박을 넣었고, 샤니스가 그 대응을 하였단 얘기이리라.
“공자 때문에 꽤나 고생했었는데…… 이 일의 보상을 어떻게 해주실 건가요?”
샤니스가 차갑게 웃으며 재촉한다.
과연, 듣고 보니 그녀 입장에선 충분히 억울할 만한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오해라고는 하나 자신 때문에 괜히 불똥이 튄 것이 아닌가.
물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칸 쪽에서 뭘 억울해하더라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유릭의 모습에 샤니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