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87화 (87/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87화

87화. 피멍처럼

아칸이 외교적으로 어떻게 되든 유릭이 알 바 아니다.

반대로 크라우 공작 역시 -아칸 정도의 숙적은 아니지만- 친하게 지낼 수 없는 남자.

그 둘이 사이가 나빠지든 말든, 아니 나빠질수록 유릭에겐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날 아칸이라 착각했단 말이지.’

조금 이상한 점은 있다.

단순히 불의 기운을 쓴다는 것만으로 아칸에게 항의할 근거는 되지 않을 텐데.

아무리 아칸이 불의 종주라곤 하지만 불의 기운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아칸 소속인 것은 아니니까.

‘혹시 엘가이아가?’

굳이 착각을 할 만한 장면이라면 그때뿐이다.

엘가이아의 마지막 참격을 온 힘을 다해 받아쳤던 일.

그 정도의 불의 기운이라면 반드시 아칸일 게 틀림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날 찾고 있단 말이군.’

엘가이아는 자신을 찾고 있다.

그날의 왕자 암살 계획을 방해한 것을 갚아주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던 것을 방해했다고 보복한다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원래 그런 놈들은 사고방식부터가 다른 법이다.

“…….”

샤니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유릭을 보았다.

“정말 너무한 일이지요. 저희는 스카디 쪽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는데 그런 오해가 생기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오해는 잘 풀렸나요?”

“제가 직접 나서서 해명한 덕에 풀리긴 했죠. 그들도 겉으로는 납득하고 물러갔구요.”

“겉으로는?”

“속으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아직 모른다는 얘기지요.”

“애석하게 됐군요.”

유릭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유릭을 보며 샤니스가 미소 지었다.

“정말로 모르시나요?”

“예.”

“본인은 어디까지나 모르는 입장이다 그거죠?”

유릭이 피식 웃었다.

“공녀는 혼자만 아는 얘기를 잘하시는군요. 대화의 기본은 상대와 공통적으로 아는 지식을 화두로 삼는 것이랍니다.”

“…….”

“서로 아는 화제를 가지고 대화를 하도록 하죠.”

유릭의 너스레에 샤니스의 입매가 살짝 꿈틀거렸다.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마저 울컥 올라온 모양이었다.

“하아…… 정말 듣던 대로의 사람이네요, 공자는.”

클레어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젓는 샤니스를 보니 무슨 얘기를 들어왔을지 짐작이 되었다.

클레어가 했을 얘기야 뻔하지.

대충 사람 속을 벅벅 긁어대는 남자라든가 그런 불평이나 해댔을 것이다.

‘억울한데.’

유릭이 억울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긁는 건 그들이 적이니까 그런 거고, 같은 편한테는 이보다 상냥할 수가 없는데.

하아, 샤니스가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 얘기는 알겠어요. 어찌 됐든 이번 일은 잘 부탁드려요. 그간 싸워온 관계지만 모처럼 화해를 위해 만났으니-”

그때.

“이거 놀랍군. 역시 내 말이 맞았잖아?”

어두운 밤, 잠결에 눈을 뜬 것 같은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곳에서 밀회라니, 조금 대담한 것 아닌가? 으응?”

삐쩍 마른 해골 같은 인상의 사내.

루카스 아칸이 유릭과 샤니스, 그리고 클레어 세 사람을 보며 씨익 웃었다.

샤니스가 짓고 있던 미소를 싹 지우고 클레어는 흠칫 떨었다.

그리고.

‘아니, 얘넨 몇 명이 온 거야?’

유릭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 * *

사안이 사안인 만큼 직계만 몇 명이 왔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긴 했다.

애초에 아칸의 직계는 로스카와 달리 13명이나 되지 않던가.

그중 셋이 왔다고 하면 오히려 적게 온 것일 수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루카스 아칸.”

찌릿한 공기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유릭이었다.

웃음기 섞인 그의 목소리에 루카스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말이 짧군.”

“피차 길게 말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

유릭과 루카스 사이에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유릭 공자?”

“뭡니까?”

그때 자신을 부르는 샤니스의 목소리에 유릭이 무심코 대답했다.

그러자 샤니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루카스를 힐긋 보았다.

“저희는 길게 말을 할 정도의 관계로군요.”

“…….”

뜬금없는 말에 유릭이 말문을 잃었다.

루카스가 가늘게 눈을 뜨며 샤니스를 째려본다.

그의 눈에 담긴 살기는 어느새 유릭이 아닌 샤니스를 향해 있었다.

샤니스는 정면으로 살의를 받으면서도 대범하게 웃어넘기고 있었다.

‘거참 의좋은 남매로군.’

굳이 루카스를 더 긁기 위해 자신과 친한 척을 하다니.

덕분에 분위기는 완전히 삼파전을 이루게 되었다.

유릭이야 당연히 그들의 적이었고, 샤니스와 루카스 역시 남매라곤 볼 수 없는 흉흉한 눈으로 서로를 보고 있다.

“흥, 아닌 척하지만 역시 내통하고 있었구나.”

“내통이라니 누가요? 저랑 유릭 공자가요?”

“그래. 이 자리에서 너희끼리 몰래 밀회하고 있단 게 그 증거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아무래도 아칸 내부에서 그런 얘기가 돌았던 것 같다.

이유라면 짐작이 가는 것이 있다.

사막에서 루카스가 꾸미던 음모를 유릭과 클레어가 함께 박살 냈던 일.

물론 실제론 아무것도 모르는 클레어를 적당히 미끼로 던져두고 유릭이 놈들의 핵을 치러 갔던 것이지만.

밖에서 보기엔 충분히 한패로 보일법했다.

“아직도 그런 허튼소리나 하고 다니시다니…… 오라버니도 감을 많이 잃으셨네요.”

“진실은 아버님께서 판단하실 일이지.”

“그 나이씩이나 돼서 아직도 아버님 등에 숨어다니는 건가요? 남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애라더니…….”

“이년이…….”

샤니스의 이죽거림에 루카스가 빠득 이를 갈았다.

예전부터 말재주는 샤니스 쪽이 한 수 위였다.

어릴 때부터 어찌나 얄미웠던지.

더 이상 그녀와 말을 섞으면 손해만 본다고 생각했는지, 루카스가 홱 표적을 돌렸다.

“유릭 로스카, 이 발칙한 녀석. 내게 물을 먹인 주제에 잘도 어슬렁어슬렁 나타났구나. 네놈을 몸 성히 돌려보낼 것 같으냐?”

이번에는 말로만 하지 않는다.

기세를 올려 쏘아붙이며 루카스의 손이 허벅지에 매어놓은 단창을 잡았다.

심장에서 끌어 올려진 불의 마나가 순식간에 사위를 덮었다.

“오라버니!”

비명을 지르듯 소리친 것은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클레어였다.

그녀가 질책하는 눈빛으로 루카스를 쏘아보았으나 그에 굴할 그가 아니었다.

“닥치고 있어라. 네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다.”

“……!”

정면으로 쬔 살기에 클레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샤니스가 살짝 앞에 나와 그녀를 등 뒤에 숨겼다.

그것으로 한결 편해진 클레어였으나, 정작 상황 자체는 하나도 나아진 게 없었다.

클레어를 단숨에 닥치게 한 기세를 그대로 받아내며, 유릭이 눈을 찡그렸다.

그의 발밑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며 일렁거렸다.

글렌이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은 나오지 말라며 글렌에게 신호를 보낸 유릭이 루카스에게 물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말이 필요한가? 너도 사내라면 배짱을 보여봐라.”

루카스가 비웃음을 띤 어조로 얘기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는 창을 뽑을 생각까지는 없었다.

이런 곳에서 허투루 무기를 뽑으면 어떻게 될지 모를 그가 아니었다.

하물며 이번 회담 자체가 그와 아이작의 합작품이 아니던가?

둘이서 각자의 가문의 1인자를 꿰차자며 맺은 비밀 동맹.

그 동맹의 첫걸음이 바로 이번 회담이다.

아이작 쪽은 유릭의 방해로 일이 많이 꼬인 듯하나, 루카스 쪽은 아직 괜찮다.

그러니 그로선 이번 회담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단지.

‘건방진 놈.’

사막에서 자신을 실컷 방해하고 떠나간 건방진 꼬마를 굴복시키고 싶었을 뿐.

“왜 그러지? 이제 와서 겁이라도 먹은 것이냐?”

묵묵부답인 유릭을 보며 루카스가 피식 웃었다.

당연히 예상했던 반응이다.

사막에서는 어떻게 도망칠 수 있었지만 이 자리에선 도망칠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마주하는 마스터의 기세.

고작 스물 남짓한 애송이가 감당할만한 것이 아니리라.

“혹시라도 용서를 바란다면-”

어떤 식으로 굴욕을 줄까.

그런 상상을 하며 즐거운 얘기를 하려던 그때.

쌔애애액!

시야를 가득 메워오는 검은 무언가를 보았다.

“……!”

그것의 정체를 알아챈 루카스가 급히 단창을 뽑았다.

카앙!

검은 검신을 가진 검이, 단창에 막혀 루카스의 코앞에서 간신히 멈추었다.

끼긱!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와 함께 유릭의 얼굴이 루카스에게 접근했다.

“루카스 아칸. 너는 말이 너무 많아.”

“……뭐라?”

“나랑 싸우고 싶거든 무기부터 뽑았어야지. 허튼소리나 하면서 땍땍댈 게 아니라.”

유릭이 읊조린 말에 루카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새끼가 뭘 믿고…….”

빠득!

이가 부서질 것처럼 갈렸다.

이 애송이가 대체 뭘 믿고 마스터인 자신 앞에서 이리도 건방지단 말인가?

그는 태어나서 이렇게 거슬리는 녀석은 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그의 신분이든 힘이든 어느 무언가에 굴복하여 고개 숙이곤 한다.

심지어 가주 자리를 두고 다투는 형제들조차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 있거늘!

이렇게 뻣뻣이 고개를 쳐들곤 이죽거리는 녀석은 그의 평생 처음 보는 인간형이었다.

화륵!

또다시 사막에서처럼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얼굴에 피가 쏠리며 머리의 이성이 풀려왔다.

계획이고 뭐고 눈앞의 애송이를 밟아 터뜨리란 소리가 머릿속에 계속 울려 퍼졌다.

그 분노가 불로 형상화되어 주변 일대에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만하십시오!”

콰르르르릉!

저 멀리서부터 바위의 벽이 솟아올라 유릭과 루카스의 사이를 갈랐다.

두 사람이 무기를 거두곤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아까 당주의 거처로 안내를 해준 예의 안내인이었다.

“뭐 하는 짓입니까!”

성난 어조로 힐난하는 그의 목소리에 유릭과 루카스가 서로 눈을 피했다.

“두 가문이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못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깥에서의 관계가 어떻든 이 안에선 사적인 다툼은 금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유릭이 내기를 가라앉히며 녹시아를 허리춤에 꽂았다.

대표가 이번엔 루카스 쪽으로 도끼눈을 떴다.

“흥.”

루카스는 콧방귀를 뀌며 단창을 집어넣었다.

사과의 말은 없었지만 그 역시 더 다툴 생각은 없었다.

불붙던 분노도 어느새 씻은 듯이 가라앉은 그였다.

대표가 가늘게 뜬 눈으로 루카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샤니스, 클레어를 둘러보았다. 더불어 유릭도.

아칸의 직계가 무려 셋이나 있다.

그에 반해 유릭은 혼자.

“이리 오시지요, 유릭 공자. 와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그대로 두고 떠날 순 없었는지 그가 유릭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그 뜻을 모를 유릭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곤 뒤를 따랐다.

“하아.”

두 사람이 떠나가고 클레어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하면 한바탕 큰일이 벌어질 뻔했다.

이런 자리에서 칼부림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그 순간 평화는 물 건너가는 것이 아닌가?

“여전히 화를 다스리는 것이 어수룩하군요, 오라버니.”

샤니스는 질리지도 않고 루카스를 긁어댔다.

평소 같았으면 대번에 발끈했을 루카스지만.

“나도 가보지.”

이번에는 별 대꾸 없이 자리를 떴다.

샤니스가 웬일이냐는 듯 쳐다보았지만 이미 그의 관심은 그녀에게 있지 않았다.

자리를 뜨며 그가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단창을 쥐었던 손바닥.

그 손바닥에 길고 새빨간 자국이 마치 피멍처럼 남아 있었다.

‘……쯧.’

꽈악, 주먹을 틀어쥐며 그가 떠나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