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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88화 (88/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88화

88화. 내일모레

안내인이 데려간 곳은 루카스와 신경전을 벌이던 갈대밭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그가 정식으로 유릭에게 인사를 하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 이름은 바리입니다. 미숙한 몸입니다만 본가의 수석제자로 수행 중이죠.”

티르옌에선 성인이 되어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한 이를 구도자라고 부른다.

그 구도자가 되기 이전의 아이들을 제자라 부르고.

수석제자란 것은 그 제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뛰어난 이란 뜻으로, 동시에 후계자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 늙은 당주가 죽고 나면 이 남자가 다음 당주에 오르겠지.

또한 그는.

‘내 대련 상대란 말이지.’

교류전에서의 유릭의 대련 상대이기도 했다.

바리를 향해 유릭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방금 전은 감사했습니다. 자칫 큰일 날 뻔했습니다.”

“하아. 그걸 아신다면 그렇게 싸우지 말아주십시오. 신성한 땅에서 소란을 피운다고 어르신들이 경을 치신단 말입니다.”

먼저 시비를 건 것은 루카스 쪽이지만 유릭은 굳이 얘기하진 않았다.

사실 놈이 시비를 걸었더라도 자신이 무시하면 그만인 일이었기에, 마냥 억울하다고 보기도 애매했다.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

그가 꾸벅 인사하곤 장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바리가 턱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유릭 공자. 어딜 가시는 겁니까?”

“예? 장원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만…….”

“와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그 자리에서 절 구해주려고 한 말이 아니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티르옌의 구도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역시 이렇게 되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올 줄은.

-쯧.

품속에서 메르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에게만 들릴 그 작은 소리는 메르의 불만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과거에 그렇게 스토킹을 당했다고 하더니, 바리의 태도에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자, 자. 이쪽으로. 아이들이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답니다.”

“대체 무슨 자리길래…….”

“유릭 공자도 예상하고 있을 것이 아닙니까? 수정드래곤의 레어 말입니다. 어린 제자들이 꼭 좀 얘기를 듣고 싶다고 어찌나 보채던지.”

바리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반짝이는 눈빛으로 얘기했다.

꼭 듣고 싶은 건 애들이 아니라 당신 같은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어차피 티르옌이란 이름이 나온 시점에서 언젠간 올 거라 생각했던 일이니.

“가보죠. 그렇게 재밌고 다이나믹한 일은 없었습니다만.”

“하하하! 괜찮습니다. 어떤 얘기라도 잘 들어줄 아이들이니까요. 유릭 공자처럼 말입니다.”

설마 아까 얘기를 잘 들어준다느니 뭐니 칭찬했던 건 이걸 위해서였나?

쩝. 살짝 입맛을 다시며 유릭이 바리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오오오오!”

“이게 그 비늘인가요!?”

“정말 영롱합니다…….”

티르옌의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받으며 얘기를 시작한 유릭은, 그 시선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가지고 있던 메르의 비늘까지 꺼내놓아야 했다.

진짜 드래곤의 비늘이라며 내놔라, 나도 보자, 너만 보냐 시끌시끌한 아이들의 사이에서 유릭이 한숨을 쉬었다.

-으으.

품속에 숨어 있는 메르도 옛 기억이 나는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혹시 옛날에 마구 비늘을 뜯긴 그런 기억이라도 있는 것일까?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실은 황금가가 보물 지도를 공개한 순간부터 저희 쪽 사람도 계속 수색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레어는커녕 아무 단서도 발견되지 않아서 가짜 지도로 결론을 내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비늘을 가지고 꺄꺄거릴 때 바리가 다가와 유릭의 옆에 앉았다.

“동생들도 기뻐하고 있고 아마 어르신들도 이 얘기를 전해드리면 무척 흥미로워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유릭 공자.”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닙니다. 저도 제 이익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니.”

“그래도 공자 덕분에 어둠 속에 묻힐 뻔한 레어를 발견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 저희에겐 감사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곳에서 뭘 발견하셨습니까?”

분명 자신이 떠난 후에도 티르옌은 레어를 구석구석 수색했을 텐데.

“보물 같은 것은 뭐 당연하지만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레어 자체만으로도 좋은 연구 자료가 되었죠.”

바리가 웃으며 얘기했다.

그곳에 있던 메르의 비늘은 자신이 모두 회수했으니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터였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한때나마 용이 기거했던 레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에겐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고, 바리는 그렇게 얘기했다.

‘이 정도면 뭐 무난히 끝났네.’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는 바리의 모습에 유릭이 속으로 가슴을 쓸었다.

소문으로는 하도 티르옌이 용의 흔적에 집착한다 뭐다 해서 살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직접 만나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학구열이 높은 고고학자 같은 느낌?

“그런데 공자.”

“예.”

“정말로 비늘 말곤 발견한 게 없으십니까?”

“…….”

그때 아주 약간, 바리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입매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바리의 눈은 꿰뚫듯 유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에 있는 보석은 마치 세 번째 눈이라도 되는 양 유릭을 빤히 비추었다.

“정말입니다만.”

거짓말이 아니다.

‘발견’한 것은 비늘뿐.

호수 아래에 있던 메르베키아는 발견한 것이 아니라 만난 것이니까.

“그렇군요.”

바리의 눈이 거둬졌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려 하였으나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진 않았다.

그가 유릭의 앞섶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유릭이 살짝 긴장했다.

“그나저나 무척 귀여운 고양이로군요. 공자의 애완동물입니까?”

“…….”

쯧.

유릭이 속으로만 혀를 찼다.

‘어쩐지 너무 쉽게 가더라니.’

순수하게만 보였던 바리의 눈에 집착의 빛이 보인다.

이제 보니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인 모양.

“무슨 말씀이신지-”

그래도 일단은 잡아떼 보려던 찰나.

-히끅.

앞섶에서 메르가 딸꾹질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정말 귀여운 아이군요. 이제 보니 고양이가 아니라 새끼 호랑이네요?”

“예, 뭐…….”

반강제로 앞섶에서 끌려 나온 메르는 유릭의 허리께에 고개를 묻은 채 바리를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바리가 쓰다듬으려 손을 뻗으니 귀신같이 눈치채고 털을 쫑긋 세운다.

“샤아!”

“이런…… 아무래도 저는 미움 받는 모양입니다.”

“애가 낯을 많이 가려서요.”

섭섭한 듯 손을 거둔 바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요. 우리 티르옌의 제자들은 친화력이 높아서 동물들도 잘 따르곤 하는데. 평범하지 않은 동물이군요?”

“!”

순간 메르의 눈이 허공을 유영했다.

설마 위협하며 거절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나?

이제 와서라도 친한 척을 해야 하는 건?

‘메르…… 그냥 하는 소리니까 이상한 짓 말고 하던 대로 해.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면 그게 더 수상해.’

-아, 넵!

유릭이 다독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연기를 시작한 메르였다.

그 일련의 과정을 바리가 웃는 낯으로 지켜봤다.

당최 속을 읽을 수 없는 완벽한 미소였다.

“하긴. 로스카의 자제분이 이렇게 아끼며 기르는 동물인데 평범할 리가 없겠군요. 필시 영물이라 불릴 만한 동물이 틀림없겠습니다.”

“영물까지는 아니지만 똘……똘하긴 하죠.”

-어르신! 왜 잘 말하다 똘똘하단 부분에서만 더듬는 거예요!

메르의 항의는 가뿐히 무시했다.

이런 힘겨운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도 몰라주고 말야.

“언제부터 키우기 시작하셨나요?”

“글쎄요. 꽤 오래전에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제가 맞춰볼까요?”

“맞춰요?”

“2년 전 아닌가요?”

-히이익!

바리가 정확한 시기를 맞추자 메르가 오싹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스토커다! 스토커예요! 스토킹이다!

유릭이 메르를 쓰다듬으며 호들갑 떠는 것을 최대한 숨겼다.

대체 옛날에 뭘 어떻게 시달렸길래 이러는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야 아직 새끼니까요. 10년, 아니 5년만 길렀어도 지금보단 훨씬 컸을 것 아닙니까. 거기에 기억이 안 나신다고 하니 요근래는 아닐 것 같고…… 대충 2~3년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어떤가요, 맞췄나요?”

“뭐 대충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추리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다른 확신이 있으면서 떠보는 것인지.

“이렇게 먼 티르옌의 땅까지 데리고 올 정도면 어지간히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스카디에 가실 때도 데리고 갔었나요?”

……후자 쪽인 거 같기도 하고.

자꾸 스카디 쪽으로 얘기를 돌리는 것이 영 수상하다.

“유릭 공자는 달의 향기 여관에 머무르셨죠? 그곳 주인에게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바리의 눈이 심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별처럼 빛나는 그것은 얼핏 보면 광증이 도진 환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돌변한 바리의 모습에 유릭이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뺐다.

“아니, 저…….”

“여관 주인의 말로는 공자가 체크인할 땐 애완동물 같은 것은 없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레어를 발견한 후에 갑자기 못 보던 짐승이 나타났다고. 공자,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시겠죠?”

“아니, 그러니까…….”

“이 고양이! 아니, 이 호랑이가 혹시 폴리모프한 수정드래곤이 아닙니까? 레어에서 용과 마주한 당신은 모종의 이유로 그를 데려온 겁니다! 그러니 없던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난 것 아닙니까!”

-삐야아아아아!

바리가 핏발 선 눈으로 메르를 낚아챈다.

바리의 눈이 메르의 정체를 탐색하려는 듯 샅샅이 메르를 살폈다.

메르가 버둥거려 보지만 바리의 손은 사냥감에 걸린 올가미처럼 단단히 얽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새하얀 털을 가진 호랑이가 흔합니까? 스카디에서 하얀 호랑이가 서식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털끝은 은은한 자줏빛을 띠고 있군요. 그 수정동굴의 수정들처럼요!”

-히이이이익!

“바리!”

유릭이 참지 못하고 바리의 손목을 잡아 꺾었다.

바리가 눈을 찌푸리며 손의 힘을 풀었다.

그 틈에 탈출한 메르가 한달음에 유릭에게 달려와 안겼다.

유릭이 차가운 눈으로 바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서릿발 같은 눈빛에 거칠었던 바리의 숨소리가 어느새 잦아들었다.

“공자?”

“바리. 지금 당신이 얼마나 큰 무례를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나?”

“하지만 그 호랑이는 분명-”

“설령 네 말대로 이 아이의 정체가 용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나와 함께 사는 내 가족이다. 너는 내 가족을 겁박했어.”

거칠어진 유릭의 말투와 기세에 바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유릭의 품에 안긴 새끼 호랑이를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귀여웠던 그 동물은 지금 유릭의 품에 머리를 박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바리가 완전히 제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합니다!”

쿵!

그가 대번에 땅에 머리를 박고 사죄를 하였다.

유릭에게뿐만 아니라 메르에게도.

“미안합니다, 메르. 제가 허튼 추측에 눈이 멀어 당신을 무섭게 했군요.”

메르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사실 무서워한 것이 아니라 들켰다는 생각에 펄쩍 뛰었던 것이지만, 바리는 그런 사실까진 알지 못한다.

그의 눈에는 괴롭힘당해 떨고 있는 작은 동물이 보일 뿐.

-어? 어라? 들킨 거 아니었어요?

‘그냥 그런 공상을 해봤단 거지. 설마 진짜로 네가 드래곤이라 생각했겠어?’

그 귀신같은 직감에는 유릭마저도 식겁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별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하얀 호랑이가 흔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내 고향에는 그렇게 드문 것도 아니다.”

“그렇군요……. 확실히 북쪽에는 새하얀 털의 짐승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바리가 끄덕이며 납득한다.

벌겋게 흥분했던 얼굴도 거칠었던 숨소리도 모두 잦아들었다.

이렇게 보면 이보다 침착하고 차분할 수 없는 인상의 사내였다.

방금까지의 번질거리던 눈동자가 거짓말 같았다.

“죄송합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공자.”

“괜찮다. 메르도 용서한다 그러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바리 앞에서, 유릭도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가 왜 그렇게 들키기 싫어하는지 잘 알겠다.’

-그쵸! 그쵸!?

만약 메르의 정체가 티르옌에게 들킨다면?

그리고 메르의 입에서 자신도 같은 용족의 어르신이란 소리가 실수로라도 흘러나온다면?

‘평생 티르옌의 집착을 받으면서 살게 될지도.’

부르르.

절로 몸에 오한이 흐르는 상상이었다.

뭐 메르만 안 들키게 잘한다면 결코 오지 않을 미래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공자.”

“뭐지?”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은 바리는 원 상태로 돌아왔다.

본래의 차분한 어조로 그가 유릭에게 얘기했다.

“교류전은 내일모레 치르기로 한다던데, 들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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