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89화 (89/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89화

89화. 당연한 것 따윈

교류전은 젊은 기사들끼리만 치르기로 하였다.

아직은 실전 경험이 부족하지만, 미래에 각 가문을 짊어질 대들보가 될 이들.

그러나 로스카의 대들보들은, 유릭의 앞에서 무척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령술이 그렇게 상대하기 까다롭다던데…….”

걱정스레 얘기하는 젊은 기사.

그는 유릭 또래의 기사로 과거 전투1반에서 데릭과 함께 수학했던 남자였다.

“특히 젊을수록 더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

유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티르옌은 본래부터가 개개인의 무력이 매우 강한 곳으로, 그 근간에는 어릴 때부터의 수행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보통의 아이들이 기껏해야 목검을 휘두르며 병정놀이나 하고 다닐 때, 티르옌의 아이들은 이미 고행에 가까운 수행을 시작한다.

그들에게 수행이란 시간을 내어 따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그 자체.

그 금욕적인 문화는 그들을 10대 가문에 올려놓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기사가 걱정하는 것은 수련량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수련이라고 하면 그들 역시 티르옌 못지않게 가혹하게 해왔으니까.

“마법이든 검기든 어리고 젊을 땐 미숙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정령술사는 달라. 정령에게 빌리는 힘은 이미 정령이라는 하나의 존재를 이룬 완성된 힘이다.”

마법이든 검기든 그 완성도는 사용자의 숙련도에 크게 좌우한다.

하지만 정령은 다르다.

사용자의 숙련도와 무관하게 처음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다.

‘힐라사도 프로스트팽도 비슷했지.’

브랜든과 맞붙었을 때 대령은 힐라사의 힘을 능숙히 사용했다.

대령이 그럴 수 있던 것은 힐라사의 힘 자체가 이미 완성된 하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아니스의 프로스트팽도 마찬가지.

프로스트팽은 팰트릭 가의 수호정령이긴 하지만, 아니스 본인은 정령술보다는 검술만을 파고 있는 타고난 기사다.

그럼에도 수호정령이 팰트릭 가의 다른 이가 아닌 그녀에게 붙어 있는 것은 의문이긴 하지만…… 어찌 됐든 아니스는 정령술의 수련을 따로 열정적으로 하진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그녀는 서리늑대의 힘을 사용하는 데 있어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조화롭게 부린다.

“사실 경지가 높아질수록 정령술은 한계가 보이는 힘이야. 계약한 정령이 가진 힘 이상은 낼 수 없거든. 하지만 그 대신…….”

“아직 미숙할 시기에는 굉장히 강력하단 말이군요.”

“그런 셈이지.”

정령술사는 계약한 직후부터 상당히 완성도 있는 힘을 낼 수 있다.

하지만 대신 그 힘을 극적으로 성장시키긴 힘들다.

이미 완성된 것을 한층 더 발전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티르옌은 좀 다르긴 하지만.’

사실 티르옌은 모종의 비술 덕에 보통의 정령술사가 가지는 한계도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기에 10대 가문의 말석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고.

그러나 그건 나이 많은 구도자들의 얘기고 아직 젊은 구도자들과는 크게 관계없다.

지금 유릭과 기사들이 주의해야 할 점은 ‘정령술은 어릴 때부터 강력하다’라는 사실뿐.

“으음…… 꼭 이겨야 되는데…….”

“가주님께서 보시는데 꼴사납게 지면…….”

“끄응.”

유릭이 전한 말에 기사들이 대번에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안 그래도 이 먼 땅에 와서 대련을 한다는 것에 긴장하고 있을 텐데, 대놓고 너흰 이기기 힘들다고 얘기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저는 최선을 다할게요.”

그들 가운데 있는 마르쉘이 작게 주먹을 쥐며 얘기했다.

그 말에 기사들의 소란이 차차 가라앉았다.

이곳에서 가장 어린 그녀는, 반대로 정령술사와의 대련에서 가장 불리한 입장이다.

그런 아이가 의지를 다지는 데 찬물을 끼얹을 눈치 없는 기사는 없었다.

“그래. 어떤 상대가 오더라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하지만-”

유릭이 잠시 말을 끊고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발렌티나가 했던 당부가 떠오른다.

교류전에 나가는 기사들은 나이가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유릭의 또래다.

그러니 유릭 네가 책임지고 그들을 잘 이끌어서 승리하도록.

그런 말을 하셨었지.

‘괜히 앞장서고 눈에 띄는 건 취향이 아닌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가주의 명령이라면 따를 수밖에.

“사실 지는 게 당연해. 우리 나이대에서 정령술사를 이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기사들 사이에서 조금 맥이 풀리는 분위기가 퍼졌다.

가슴을 웅장하게 해줄 일장 연설이라도 해줄 거라 기대했는데 지는 게 당연하단 소리라니.

물론 지더라도 자책하지 말라는 격려의 뜻임은 알지만, 그래도 곧 싸우러 가는 기사에게 할 말은 아니리라.

하지만 유릭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래도 명심해라.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일 때 사람은 발전하는 법이니까.”

억지로 그럴듯한 말을 쥐어짜는 것이 아니다.

회귀 후 새로운 삶을 살며 자연스럽게 생긴 생각이었다.

“내가 아직까지 ‘로스카는 서리 마나가 당연’하다고 하면서 고집이나 피우고 있었다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회귀 전의 유릭은 그랬었다.

그 말로가 어땠는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칸에 팔려가는 엔딩.

그러나 유릭은 염화신무의 비급을 찾아냈고, 운명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미 그의 인생에서 ‘당연한 것’, ‘당연히 안 되는 것’ 따윈 없어져 있었다.

기사들의 눈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들 똑똑한 이들인지라 유릭이 하고자 하는 말은 모두 알아들었다.

그래도 굳이 유릭은 알기 쉽게 정리해 주었다.

“다들 질 거라고 생각할 때 이겨주는 것만큼 짜릿한 게 어디 있겠어?”

유릭이 피식 웃으며 기사들을 보았고, 기사들 역시 눈을 빛내며 격하게 동의했다.

불이 붙었다.

아직은 심지에 불을 붙였을 뿐인 자그마한 불꽃.

그것이 커다랗게 폭발할지 아니면 중간에 허무하게 꺼져 불발로 끝이 날지.

이 뒤는 각자의 몫이다.

-공자님! 이제 곧 시작한다고 합니다!

시종 하나가 달려오며 말을 전했다.

유릭이 기사들과 함께 일어났다.

“가자.”

* * *

무슨 거창한 건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큰 도시처럼 웅장한 원형 검투장이 있다거나, 그런 것은 이 티르옌의 땅에는 없었다.

경기장으로 선택된 곳은 순수한 자연의 땅.

시원스레 쏟아지는 폭포를 끼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바위 위였다.

아무런 시설도 설비도 없었으나 그 누구도 초라하다 얘기하지 못했다.

대폭포 예르바넨.

대륙에서 세 손가락에 든다는 거대한 폭포는 그것만으로 자연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잘하고 오거라.”

로스카 쪽에는 발렌티나와 어른들이 응원을 와 있었다.

아직 한창 회담의 한중간이지만 온종일 그것에만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법.

때론 머리를 식히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고, 마침 치르는 교류전은 휴식을 위한 딱 좋은 이벤트였다.

“옛!”

“꼭 이기고 오겠습니다!”

젊은 기사들이 갓 들어온 신병처럼 빠릿하게 직립했다.

가주가 직접 말을 걸어준 것이 이보다 영광일 수 없다는 것같이.

‘내 말보단 어머니의 한마디가 확실하구만.’

-그래서 섭섭해요?

‘뭐 그런 건 아니고.’

자신은 기사들의 사기를 돋운다고 그렇게 나불댔는데, 어머니의 힘내라는 한마디만 못하다니.

살짝 섭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게 가주란 직함이 가지는 힘이니까.

‘어디.’

유릭이 티르옌의 쪽, 그리고 한쪽에 모여 있는 아칸 쪽을 바라보았다.

티르옌에선 당주는 오지 않았다.

너무 노쇠해 집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힘겹다는 얘기를 들었다.

반면 아칸 쪽에는.

‘……저 노인이 아칸의 가주인가.’

놀랍게도 가주를 비롯해 꽤나 많은 인원이 와 있었다.

참가는 안 하고 구경이나 온다고 하길래 한가한 이들만 몇몇 올 줄 알았는데, 설마 가주가 직접 왔을 줄이야.

아칸의 가주, 라그룬 아칸.

발렌티나와 같은 초월의 경지를 이룬 남자로, 기억하기론 60을 넘은 노인이다.

그럼에도 건장한 신체는 노쇠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고, 손질되지 않은 머리와 수염은 흡사 사자와 같았다.

아칸의 가주 라그룬.

회귀 전 직접 자신을 처형하란 명령을 내렸던 노인.

‘그걸로 원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때 대륙을 떠돌며 수집했던 정보에 따르면, 처형당한 것은 로스카 쪽에 있던 클레어가 먼저였다.

도주를 꾀한 그녀를 아이작이 직접 붙잡아 그 목을 잘랐다.

그게 당시 대륙에 돌던 소문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라그룬 역시 자신을 처형하란 명령을 내렸고, 다시금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게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두 가문의 화해를 위해 스스로 볼모를 자처했던 클레어가 갑자기 탈출을 시도한다?

당시에도 조금 미심쩍게 들었던 소문이었다.

그리고 회귀를 한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아이작, 그리고 아이작과 연결된 루카스의 음모의 연장선이 아니었을까.

‘지금에 와선 확인할 방법도 없지만.’

이미 미래는 바뀌었고 역사는 다르게 흐르고 있다.

그때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은 지금 와선 불가능한 일.

어찌 됐건 자신이 할 일은 그런 비극을 막기 위해 움직이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 전혀 다를 게 없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순수한 호기심이 들었다.

‘메르.’

-네? 왜요?

‘지난번에 어머니의 경지가 최소 삼천(三天) 이상의 초월자라 했었지?’

-그런데요?

정말 순수한 의문이었다.

‘아칸의 가주는 어떻지? 어머니보다 더 강한가?’

라그룬 역시 10성의 경지에 이른 초월자.

그 두 사람 중 누가 더 강한지는 대륙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다.

물론 로스카에선 당연히 발렌티나가 더 강하다고 생각하고 또 자부하고 있지만, 기왕 모이게 된 거 좀 더 객관적인 판단이 궁금했다.

-흐음…….

메르가 신음을 뱉으며 라그룬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르신의 어머님과 크게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않은데?’

-제가 보기엔 어머님이 더 강해 보여요. 주변을 흐르는 기운이 좀 더 정갈하다고 해야 하나? 더 완성된 느낌이에요.

‘그래?’

-물론 둘 다 저보다 강한지라 정확하진 않지만요.

그렇게 말은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면 아예 모른다고 대답했겠지.

적어도 메르가 보기엔 라그룬보다 발렌티나 쪽이 확실히 강하단 말이다.

괜스레 유릭의 어깨가 올라갔다.

자식이 뛰어나면 부모가 자랑스러워하듯이, 반대로 부모가 뛰어나면 자식도 콧대가 서는 법이니.

그런데 그때.

-그거 듣고 지나칠 수 없는 소리구나, 메르베키아.

메르가 머릿속으로 말을 걸 때와 완전히 같은 감각의.

그러나 메르와는 전혀 다른 중후한 목소리가 둘에게 들려왔다.

유릭이 눈을 크게 떴고 메르 역시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던 메르의 시선이 멈춘 곳은, 지금 화제가 되었던 아칸의 가주가 있는 곳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바로 옆.

라그룬의 시중을 들고 있는 고풍스러운 느낌의 노집사.

-나의 벗이 저런 어린 계집애보다 약하다니 말이 심하지 않으냐?

지루한 듯 턱을 괴고 졸고 있는 라그룬의 옆에서, 한 노집사가 유릭과 메르에게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활처럼 휜 그 눈매를 보니 정체 모를 섬뜩함이 등골을 내달린다.

아니, 이 감각의 정체라면 알고 있다.

그웬델에서 처음 메르를 보았을 때의 그 느낌.

‘설마…….’

설마, 아칸의 가주의 옆에도 용이 있었을 줄이야.

아니, 그럼 이 티르옌의 땅에 당장 두 마리의 용이 자리해 있다는 얘긴가?

그중 한 마리도 티르옌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티르옌은 그렇게도 용의 존재를 바라고 있는데.

아니, 그보다도 아칸의 가주를 벗이라 부르는 용이라니…….

일순간 떠오른 갖가지 생각이 유릭의 머리를 복잡하게 헝클었다.

한편 그런 상태의 유릭을 두고는.

-칼 아저씨?

-오랜만이구나 메르베키아. 천 년 만이던가?

-천 년 전은 제가 태어났던 땐데요.

-오, 그럼 몇백 년 정도겠군. 미안하구나. 이 나이가 되니 해를 세는 것도 귀찮아져서 말이다.

메르는 오랜 지인이라도 만난 듯 편안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