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90화
90화. 깊은 울림
‘아는 사이야?’
-칼 아저씨라고 제 아버지의 친구분이세요. 본명이, 보자…… 칼리오리였던가?
-칼리오르페다, 이놈아.
거리가 한참은 떨어져 있었음에도 바로 옆에서 대화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 대화는 주변의 누구도 듣지 못했다.
이미 유화와 메르의 사례가 있기에 놀랍지는 않았지만.
-그나저나 메르베키아 네가 인간 아이와 고행을 치르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구나. 심지어 그쪽은 네 정체를 아는 모양이고. 무슨 사이지?
-어허! 말조심하세요! 이분은 아저씨 같은 한량은 쳐다도 못 볼 정도로 높으신 어르신이라구요!
-?
-그러니까 그게…….
갸웃거리는 칼리오르페에게 메르가 유릭과의 첫 만남을 나불나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얘길 듣는 칼리오르페는 시종일관 의뭉스럽게 갸웃거리다가, 유릭을 다시 한번 살피곤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이거 참.
칼리오르페가 짙은 미소를 짓는다.
유릭이 긴장했다.
설마 이런 데서 메르에게 정체가 까발려질 줄이야.
언젠가 찾아올 날이라 생각은 했지만 하필 아칸까지 있는 이런 민감한 자리에서 밝혀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메르가 마구 화내면서 깽판이라도 놓으면 어떡하지?
라며 걱정하던 찰나.
-제가 아직 미숙하여 고인(高人)을 몰라뵈었군요.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칼리오르페의 입에서 나온 것은 폭로가 아닌 사죄였다.
주변에 보는 눈이 있어 고개를 숙이진 않았지만 그 말투는 사죄라 하기에 충분히 걸맞은 것이었다.
-잘 아셨죠? 하여튼 아저씨도 어르신을 본받아서 놀러만 다니지 말고 고행이라도 시작하면 어때요? 먼저 저한테 말 건 거 보니까 지금도 고행이 아니라 그냥 놀고 계시는 것 같은데.
-하하, 미안하구나. 아직은 노는 게 즐거울 나이라.
-그걸 핑계라고 대세요? 세상에 일하는 게 즐거울 나이가 어디 있어요, 다 감수하면서 사는 거지.
-이런…… 네 말이 다 맞다. 네게 잔소리를 들으니 옛 생각이 나는구나, 하하하!
칼리오르페가 크게 웃으며 힐긋 유릭을 보았다.
활처럼 휜 눈 안에 비치는 빛은 유릭을 관통하듯 남김없이 꿰뚫고 있었다.
유릭은 확신했다.
저 용은 모든 진실을 이미 알고 있다고.
자신이 인간이란 것도 메르를 속이고 있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다.
알면서도 메르를 놀리기 위해 사죄하는 척을 했던 것이다.
그때.
칼리오르페의 기색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라그룬이 찌푸리며 눈을 떴다.
그가 칼리오르페에게 무슨 일인지 묻자 칼리오르페가 몇 마디 대답한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내용은 충분히 짐작되었다.
라그룬의 눈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
작게 긴장하고 있으려니 이내 라그룬이 흥미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푹신한 의자에 푹 기댄 그가 다시 잠을 청한다.
그런 라그룬을 보며 칼리오르페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이런. 내 벗이라지만 여전히 독선적인 남자구나. 본인이 가진 흥미 외에는 철저히 관심이 없어.
‘……아칸의 가주가 당신의 벗입니까?’
유릭이 말을 거니 칼리오르페가 피식 웃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연이 있어 만나게 되었고 오랜 시간 함께 있었지요. 벌써 수십 년은 되었겠군요.
생각보다도 오랜 인연에 유릭이 놀랐다.
수십 년이라면 가주가 되기 이전부터 이미 만났던 사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아칸과 싸운다면 저 칼리오르페도 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혹여 전면전이라도 일어난다면 전장에 용이 나타나게 될 일도 있을 터.
지금부터라도 당장 대처법을 생각해야…….
그런 생각을 이어가던 유릭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지. 앞으로 당분간은 휴전인데.’
대책을 세워놓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휴전을 위한 회담 자리에서 하기엔 적절치 않다.
지금은 지금 할 일에 집중하고, 전장에 용이 나타났을 때의 대책은 다음에 생각하는 것이 좋겠지.
‘당신이 보기엔 제 어머니보다 라그룬이 더 강하다는 건가요?’
유릭은 아까까지 하던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당신이 아니라 칼이라 불러주시죠.
‘……그러죠. 칼이 보기엔 어떤가요?’
-흠, 뭐, 사실 객관적인 경지만 따지자면 어르신의 어머님이 조금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본디 싸움이란 것이 힘의 높낮이만 갖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실전이라면 글쎄요…… 수십 년을 전쟁터에서 굴러온 라그룬을 어르신의 어머님께서 상대하실 수 있을까요?
확실히.
그런 식의 논리라면 라그룬이 더 강하다고 했던 것도 이해는 간다.
단순히 힘의 높낮이만으로 서열을 나눈다면 싸움이 왜 있겠는가.
탁자 하나 갖다 놓고 팔씨름이라도 하면 되는 것을.
하지만 비슷한 논리로, 오로지 오래 살았다는 것만으로 모두 이긴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라그룬이 가주가 되기 전부터 수많은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운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승패를 결정하는 건 성급해 보입니다만.’
-그런가요?
‘세월의 차가 있으니 출전의 숫자만 따지면 라그룬의 압승이겠지만 경험의 축적이란 것이 단순 숫자로 비교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단순히 힘의 높낮이로만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요.’
이런 데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의미 없는 논쟁이란 걸 알아도 유릭은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이자 우리 가문의 수장이 적보다 약하다고 하는데 ‘아 그렇군요’ 하고 넘길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자 칼이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투정을 타이르는 듯한 훈훈한 웃음이었다.
-제가 말한 라그룬의 전쟁터는 비단 눈에 보이는 알기 쉬운 전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
유릭이 갸웃거리니 칼이 답했다.
-라그룬의 인생은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전쟁이었단다, 어린 인간의 아이야.
그 말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하지 않았다면 깃들지 못했을 그런 울림이.
두 사람에게는 자신이 어림짐작하지 못할 수많은 역사가 있었다는 뜻일 터.
‘…….’
유릭은 라그룬이 더 강하다는 말에는 아직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울림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건 말싸움의 승패 따위가 아닌 훨씬 더 소중한 것이 담겨 있는 말이었으니.
그런 유릭을 보며 칼이 웃었다.
-심지가 곧은 아이로구나. 메르베키아가 어째서 널 따르고 있는지 잘 알겠어.
‘그건…….’
-메르베키아를 잘 부탁한다. 너라면 그 아이에게 더 넓은 하늘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구나.
자식을 맡기는 아버지가 떠오르는 그런 말투였다.
분명 메르의 아버지의 친구라고 했었지.
친우의 자식은 자신의 자식과 같다는 것일까.
-아저씨! 어르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예요!
정작 그 장본인은 전혀 핀트를 못 잡고 있었지만 말이다.
* * *
이제는 진짜 교류전이 시작될 시간이 되어 칼과의 비밀 대화는 끝이 났다.
아칸의 가주 옆에는 용이 있다.
그 사실을 뇌리에 박아 넣은 채 유릭이 교류전을 맞았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까?”
티르옌의 대표인 바리가 찾아와 상태를 물었고, 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습니다. 바로 시작하시죠.”
유릭의 말과 함께 서로가 악수를 나누었다.
바리와 유릭뿐만 아니라 기사들끼리도 각자 악수를 한다.
그 짧은 사이에 그들 사이에서 째릿 하는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상대를 짓밟겠다는 그런 음험한 불꽃이 아닌 순수한 투쟁심.
-그럼 두 가문의 교류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거창한 의식 같은 것은 없었으나 괜찮았다.
저 옆쪽에 쏟아지는 예르바넨의 폭포, 그리고 티르옌의 구도자들이 울리기 시작한 북소리.
둥- 두둥- 두둥-
그것만으로 모든 대련 준비는 끝이 났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작전 잊지 말고.”
“넵!”
로스카 쪽에서 처음 출진하는 기사는 다름 아닌 마르쉘이었다.
아직 정식 서임된 것이 아닌 견습에 불과하지만 전투1반에서 가장 실력이 좋아 아이들의 대표로 나오게 된 것이다.
‘작전, 작전.’
마르쉘이 작전이란 말을 되새기며 자리에 섰다.
작전이라고 해봐야 유릭이 해준 간단한 조언 같은 것이었지만, 떨고 있는 마르쉘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엔 충분했다.
‘후우.’
그녀가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큰 티르옌의 아이.
그녀가 차분히 상황을 보았다.
툭툭.
신발 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니 단단한 바위의 감촉이 발을 타고 올라왔다.
‘잘못 엎어졌다간 최소 골절이겠는데…….’
평소의 훈련 장소인 모래로 가득한 연병장과는 다르다.
순수한 바위 그 자체.
엎어치기만 당해도 뼈가 부러질 수 있는 그런 자리였다.
그것만으로 몸이 위축되고 불안에 떨 만했지만, 마르쉘은 그러지 않았다.
‘티르옌 애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곳에서 대련을 해왔단 말이지?’
오히려 더욱 불이 붙었다.
여기서 졌다간 온실 속의 화초에 불과했다며 놀림을 받을 것 같아서.
그러나 자신들이 훈련해온 로스카의 땅은, 온실 같은 말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무른 환경이 절대 아니었다.
그걸 증명하기 위한 대련.
“조심해. 등부터 떨어졌다가 등뼈가 나갈 수도 있으니까.”
한창 투지를 불태우고 있으려니 상대가 그런 말을 해왔다.
“쌩 바위에서 하는 대련은 처음이지?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 너도 낙법에 주의해.”
“……고마워.”
친절하기도 해라.
이미 자신을 이기는 것이 기정사실인 듯 상대의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정령술의 특색을 생각하면 이번 교류전에서 가장 어린 자신은, 가장 불리한 입장이다.
그걸 잘 알지만 그래도 그녀는 투지를 잃지 않았다.
“…….”
티르옌의 아이가 양 주먹을 한번 부딪치곤 자세를 잡았다.
검을 뽑은 마르쉘에 비해 그는 맨손이었다.
티르옌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전투를 치른다 하였다.
무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순수히 정령의 기운으로 된 무구를 사용한다고.
아니나 다를까 상대 아이의 양손에도 보이지 않는 바람이 휘감겨 주먹을 감싸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인가?’
대기의 기묘한 흐름으로 마르쉘은 그것을 눈치챘다.
바람의 정령의 강점은 뭐라 해도 그 민첩함.
작전을 생각하면 대진운이 조금 나쁘다.
‘……상관없어.’
그래도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마르쉘이 검을 겨누며 몸속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한파가 퍼져 주위의 대기를 얼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긴장감이 올라가며, 이윽고 정점에 달한 순간.
-시작!
채챙!
시작 신호와 함께 마르쉘의 몸이 사라졌다.
보인 건 발밑에서 튄 몇몇 얼음 결정뿐.
“!”
상대가 눈을 크게 떴고, 그 순간 마르쉘은 이미 검을 찌르고 있었다.
작전이란 건 아주 간단했다.
‘선빵 필승!’
첫 대련에서 상대는 분명 방심하고 있을 터.
그 틈을 찔러 첫 일격에 모든 걸 건다.
그렇기에 미리 긴장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심장이 떨리면 검 끝도 떨려오게 마련이니까.
빠악!
“아악!”
그렇게 교류전은, 티르옌의 아이가 지르는 비명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