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91화
91화. 그게 빗나가네
“잘했어, 마르쉘!”
“제대로 들어갔다! 이길 수 있어!”
기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마르쉘을 응원했다.
하지만 유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졌군.’
마르쉘의 첫 일격.
과거 자신이 필립을 단숨에 기절시켰던 그때의 동작을 일러주었다.
마르쉘은 그걸 기대보다 더욱 완성도 있게 수행했다.
그러나.
‘하필 바람의 정령이라니.’
상대가 상정했던 것보다 좀 더 빨랐다.
마르쉘의 검이 무사히 들어가긴 했으나, 상대가 상체를 틀어 아쉽게 급소를 살짝 빗겨 간 것이다.
기습은 그야말로 뒤를 보지 않는 완전한 공세.
일격필살이 실패한다면 뒤는 반격당할 뿐이다.
파앙!
“읏!”
바람이 터지며 마르쉘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그사이 상대는 다시 자세를 회복했다.
가격당한 어깨가 고통스러운지 살짝 절고 있긴 했지만 아이의 얼굴에는 이미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그 뒤로 결과는 그대로였다.
마르쉘의 패배.
상대가 오른쪽 어깨를 절고 있다는 것을 살려 그쪽으로 맹렬히 공격을 해보았지만 아슬아슬하게 패배했다.
정말로 한 수 차이였는데.
“아하하, 져버렸어요.”
마르쉘이 무안한 듯 긁적이며 내려왔다.
기사들이 괜찮다며, 잘 싸웠다며, 뒤는 맡기라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들의 마음이 고마운지 미소 짓는 그녀였으나, 그래도 눈 한쪽에 스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잘했어. 정말로 한 끗 차이였다.”
유릭이 얘기하니 그녀의 눈의 아쉬움이 짙어졌다.
“한 끗이라기엔 그 뒤로 계속 밀렸지 않았나요?”
“상대가 바람의 정령이 아니라 다른 정령을 부리는 상대였다면 첫 일격에 네가 이겼을 거야.”
혹시 바리가 이것을 상정해서 일부러 바람의 정령의 계약자를 첫 타로 내보낸 것일까?
이쪽이 상대의 방심을 노려 기습할 것이란 걸 알고?
그런 생각에 티르옌 쪽을 바라보았으나.
-생각 외로…….
-역시 로스카…….
상대도 상정 외였던 모양인지 눈을 크게 뜨곤 속닥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평범하게 압승할 것이라고 여겼던 모양.
바람의 정령의 계약자가 나온 것은 그냥 우연인 것 같았다.
‘다음부턴 방심하지 않겠지.’
지금부턴 정공법이다.
작전이나 지시사항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기사들 개개의 스타일에 맞춘 조언일 뿐 필승을 위한 작전은 아니었다.
완전한 실력 승부.
“하필 바람의 정령인 게 아쉬웠어요. 그것만 아니라면 이겼을 텐데!”
“그래.”
“평소엔 그렇게 운이 안 좋은 편도 아닌 거 같은데, 꼭 중요할 때만 운이 안 따라주는 것 같아요.”
“…….”
“그러니까 그게…….”
유릭은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였고, 어느샌가 마르쉘의 말이 멎었다.
이내 그녀가 자책하듯 얘기했다.
“제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이겼을 텐데…….”
“됐어. 잘했어.”
패배의 요인을 남에게 돌리지 않는 것.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에게서 고칠 점을 찾는 것.
그것은 사람이 성장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게 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제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
그녀는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가장 어리고 불리한 그녀가 분투한 것으로 기사들의 사기는 충분히 끓어올랐다.
복수를 해주겠다며 투지를 불태우는 이들도 있고.
“뒤는 맡겨라.”
다음 차례는 유릭의 차례였다.
* * *
본래라면 다른 기사들의 경기가 모두 끝난 후 마지막이 유릭의 차례였을 것이다.
신분을 중요시하는 대륙의 국가나 가문들이라면 당연하다.
예를 들어 한 왕국의 왕자와 기사들이 출전하는 경기라면 왕자가 마지막 대미를 장식해야 한다는 것이 극히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다르다.
티르옌의 영역에서 티르옌의 젊은 구도자들과 치르는 교류전.
티르옌 일족은 신분의 고하를 중요히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 당주란 일족을 이끄는 자를 뜻하는 직함에 불과하지, 다른 이들을 발아래 두고 지배하는 이가 아니었다.
그러니 당주 후계인 바리라고 해서 일부러 차례를 맨 뒤로 뺄 이유가 없었다.
경기 순서는 순전히 나이순.
로스카에선 그런 티르옌을 존중하여 그들과 같이 나이순으로 기사들을 배치한 것이다.
-앞으로!
그렇기에 둘째 경기는 유릭과 바리의 경기가 되었다.
시작 신호를 듣고 유릭이 바위로 올랐다.
둥-
시합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다.
하지만 시작은 아직이었다.
둥- 둥-
고조되는 북소리가 자리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경기자가 상대에게 집중하고 보는 이가 경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유릭 공자.’
바리가 침착하게 유릭을 주시하며 권격의 자세를 취했다.
한쪽 팔을 상대에게 쭉 뻗고 몸을 비스듬히 틀어선, 티르옌의 전통 무예.
우웅-
어느새 대지에서 피어오른 잿빛의 기운이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전엔 실례를 하였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이니.’
그가 긴장된 빛으로 유릭을 바라보았다.
엊그제 저질렀던 무례와 별개로, 그 역시 교류전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젊을 때 강한 정령술의 특색을 생각하면, 최소한 첫 3경기 정도는 가뿐히 가져갈 수 있을 거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었다.
첫 경기, 어린 로스카가 어린 티르옌을 거의 이길 뻔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완전히 압승했어야 정상인데 자칫하면 질 뻔했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방심.
상대는 그저 그런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대륙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아니 가장 강한 두 세력 중 하나라 칭해지는 서리명가 로스카.
“잘 부탁하지, 바리.”
“……잘 부탁합니다.”
가늘게 뜬 바리의 눈에 유릭이 검을 뽑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정령술의 특색 덕에 우위를 점했다는 생각은 없어져 있었다.
있는 것은 한 사내와 사내의 진검승부뿐.
둥-
북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고, 이윽고 마침내.
-시작!
시작 신호가 울렸다.
그 순간 바리가 뒷발로 땅을 박차며 걸음을 내디디려 하였다.
그런데.
쌔애애애애액!
갑작스레 눈앞에 쇄도하는 기운에 그가 눈을 부릅떴다.
거대한 불꽃의 오러.
마치 불의 새처럼 피어오른 그것이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첫 경기처럼 선수(先手)로 나섰나!
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불새는 그의 귀를 스치며 옆으로 지나갔다.
-콰아아아아앙!
그 오러는 바리와 경기장을 지나쳐, 저 멀리 있던 폭포에 부딪혀 큰 폭음을 내며 폭발했다.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로 바리가 한차례 몸을 떨었다.
흑색의 검을 들고 있는 유릭 로스카.
그 검을 타고 불꽃의 오러가 잔불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일부러 빗맞히다니, 자신감이 대단하시군요.”
바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얘기했다.
방금 공격이 정면으로 들어왔다면 상당히 위험했을 것이다.
한 방에 리타이어까지는 아니더라도, 받아내거나 피하기 위해 적잖은 손해를 감수해야 했겠지.
그러나 쏘아진 오러는 그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 끝이었다.
“첫 경기에선 방심 탓에 저희 쪽이 질 뻔했었죠. 그런데 이번엔 그쪽이 그러는 겁니까?”
“…….”
유릭이 살짝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얘기했다.
“더는 방심하지 말라는 뜻이었지. 지고 나서 얕보고 있었다는 둥 본 실력을 내지 못했다는 둥 변명하면 추하잖아?”
“걱정 마시죠. 이미 그런 생각 같은 건 털끝만큼도 없으니.”
“그거 잘됐군.”
“……노르둔.”
바리가 더욱 긴장을 끌어 올리며 그의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을 신호로 바리의 몸을 감싸던 잿빛의 기운이 모종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유릭이 침착하게 검을 겨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달리 꽤나 입맛이 썼다.
‘씁, 그게 빗나가네.’
사실 그는 빗맞힐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뭐가 됐든 이기기만 하면 그만인데 뭐하러 일부러 빗나가게 쏘겠는가?
‘처음 방심하고 있을 때가 제일 이기기 쉬운데.’
정령을 소환하기도 전이었으니 이보다 좋은 기습 타이밍이 없었다.
그저 유릭의 조준 능력이 형편없어 쏘아낸 검기가 대차게 빗나갔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바리는 전혀 알지 못했고.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건가? 과연, 역시 10대 가문의 직계일 만해.’
혼자 식은땀을 흘리며 유릭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방심할 수 없는 상대.
바리가 신중히 거리를 재며, 이번에야말로 먼저 달려든다.
쌔애애애액!
그의 등 뒤에서 거인의 칼날이 유릭을 덮쳤다.
* * *
유릭과 바리의 경기가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경기장 바깥, 구경꾼 중 하나인 루카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유릭이 피워 올리는 불꽃을 보고 있었다.
‘애송이 놈.’
일전의 풀밭에서의 대치 이후로 그는 유릭의 실력에 지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짧은 대치였지만, 그 짧은 순간에 루카스는 유릭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자신과 대등까지는 아니다.
아직 마스터에게 범접할 만큼의 경지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바로 아래, 턱밑까지는 올라온 것 같았다.
분명 사막에서 마주쳤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때부터 1년이 좀 지났을 뿐인데…….’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까지 성장했단 말인가?
마스터의 턱밑이라 하면 그건 곧 7성의 경지를 의미한다.
이제 20살인 애송이 놈이 벌써 7성이라고?
적대 가문에 나타난 젊은 강자.
비단 루카스가 아니라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로 클레어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고, 손아래 누이인 샤니스도 놀란 듯 유릭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왼쪽 누이동생들의 낌새를 곁눈질한 루카스는, 그러던 중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자신의 오른쪽 자리에서 열기가 피어오른다.
루카스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장남인 자신의 오른쪽에 앉아 있을 이라곤, 단 한 명밖에 없다.
‘아버님?’
아칸의 가주이자 종의 한계를 넘어 초월에 이른 사내, 라그룬 아칸.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지루한 듯 턱을 괴고 있었다.
아니, 심지어 눈을 감고 졸고 있는 것까지 목격했다.
그런데 지금은.
“호오…….”
눈을 부릅뜨곤, 심지어 핏발까지 선 눈으로 유릭을 응시하고 있었다.
의자의 팔걸이를 잡은 손은 그것을 부숴 버릴 것처럼 움켜쥐고 있었고, 상체는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다는 듯 앞으로 기울어 있었다.
핏발 선 눈은 안광만으로 경기장의 바위를 꿰뚫을 듯한 기세였다.
그 모든 것이, 유릭이 불꽃을 피워올린 직후의 일이었다.
‘아, 아버님…….’
제아무리 루카스라도 라그룬 앞에선 조그마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차마 아버님을 부를 수도 없었다.
그 순간에도 경기장 위에선 유릭의 불꽃과 바리의 정령의 기운이 부딪치며 장렬한 경기를 연출하고 있었고
“크크크, 크카카카!”
그것을 보며 라그룬이 마구 손뼉을 치며 폭소하였다.
루카스는 물론, 이제야 그의 상태를 눈치챈 샤니스와 클레어마저도 멈칫한다.
아칸의 가주이며 독재자, 폭군인 라그룬 아칸의 갑작스러운 행동.
열정적인 관객이라도 되는 양 폭소하는 라그룬과 반대로, 그를 둘러싼 아칸의 일원은 모조리 얼어붙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