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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92화 (92/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92화

92화. 원시 정령

바리의 등 뒤에서 형체를 이룬 것은 정령이 아닌 여섯 자루의 검이었다.

굉장히 오래된, 선사 시대의 물건이라 해도 좋을 만한 그런 형태의 검.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칼이 있는가 하면 두껍고 날카로운 그런 투박한 검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사람이 아닌 거인이 쓰던 검이라 할 정도로 거대했다.

콰앙-!

그중 한 자루가 사선으로 내리꽂혔다.

평범한 검이었다면 상체를 조금 트는 정도로 피할 수 있을 테지만 노르둔의 검은 그럴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유릭은 사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껏 옆으로 뛰어야 했다.

쌔액!

그런 유릭을 추격하듯 두 번째 검이 날아온다.

카앙!

녹시아로 그것을 흘려낸 후 유릭이 날아오는 세 번째 검을 쳐낼 준비를 하였다.

그때.

‘녹시아?’

조금 이상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 손처럼 가볍던 녹시아가 조금 무거워진 것이다.

그것은 아주 미약한 차이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커다란 위화감으로 다가왔다.

마치 손끝의 신경이 무뎌진 것처럼.

“검은 내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카앙!

바리의 말과 함께 세 번째 검이 정면에서 짓쳐 들어왔다.

마치 송곳같이 생긴 기묘한 형태.

찔러오는 검을 막아내자 세 번째 검이 끼릭 소리를 내며 더욱 유릭과 녹시아를 밀어붙였다.

“검이, 뭐 어쨌다고?”

세 번째 검을 막고 있는 녹시아에 힘을 주며 유릭이 입을 열었다.

바리는 느긋하게 네 번째 검을 준비했다.

“검을 쓰지 않는 게 공자가 이길 확률이 더 높을 테니까요.”

“?”

유릭이 의아한 듯 찡그렸다.

그런 와중에도 세 번째 검은 녹시아를 꿰뚫고 유릭을 관통하겠다는 듯 밀려들고 있었다.

뚫릴 낌새는 없다.

녹시아는 단단함을 특기로 하는 보검인 만큼 이 정도로 위태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검 자체가 점점 무거워지고, 아니, 무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특별한 주문이나 술식은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설마?’

의아해하던 유릭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원시 정령인가?”

“원시 정령을 아시나요?”

유릭의 중얼거림에 오히려 바리가 놀랍다는 듯이 반문했다.

원시 정령.

정령에겐 본디 높낮이가 있다.

인간 세계의 신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서열인데, 대개 그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했었는지로 정해진다.

원시 정령은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즉 가장 높은 정령이라는 뜻.

“굉장히 박학다식하시네요. 원시 정령에 대한 건 어지간한 정령술사도 잘 모르는데.”

“능력을 보니 검의 원시 정령인가보군.”

“노르둔. 대지의 정령이면서 검의 원시 정령이기도 한 제 동반자입니다.”

대지와 검이라…….

“어울리긴 하네.”

“본래 검이란 물건은 대지에서 태어나는 것이니까요.”

-그나마 검이어서 다행이네요. 대지의 원시 정령이었으면 지금 어르신의 육체론 꿈도 못 꿨을 텐데.

‘……그거 다행이네.’

관객석 구석에서 메르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지의 정령이자 검의 원시 정령이란 말은 즉 이런 것이리라.

본디 태생은 대지의 정령으로 태어났으나 무슨 일을 계기로 검의 원시 정령이 되었다고.

메르가 얘기한 대지의 원시 정령이란 존재에 비하면 그나마 약한 존재긴 하다.

원소 계열의 최상위 정령이 가지는, 소위 정령왕이라고도 불리는 그들의 파괴력은 유릭도 익히 알고 있었으니.

전해지기로 그들의 힘은 저 하늘의 드래곤도, 이 땅을 지배하던 마왕들도 경시하지 못했다고.

그렇다고 검의 원시 정령이란 이름이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나마 이렇게 맞서고 있는 건 상대하는 것이 정령 본체가 아니라 힘을 빌린 바리이기 때문이겠지.

“검에 대한 무슨 억제력 같은 게 있는 건가?”

“시조의 앞에서 존경심을 품지 않는 아이는 없으니까요.”

바리가 웃으면서 네 번째 검을 날렸다.

캉!

유릭은 막고 있던 세 번째 검을 날린 후, 녹시아로 허공을 그었다.

화르륵!

불길이 솟아올라 네 번째 검의 궤도를 억지로 비틀어 흘렸다.

튕겨 나간 검까지 하여 네 자루의 검이 유릭을 공격하고 현혹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네 자루의 검들이 바리에게 돌아가 등 뒤에 나란히 자리했다.

“후우…….”

바리가 땀을 흘리며 호흡을 고르는 것이 보인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 검을 조종했을 뿐이지만, 상당한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한 것 같았다.

물론 유릭도 남 말 할 때가 아니었다.

‘확실히 까다롭군.’

그도 숨을 고르며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정령술의 특색인 완성된 힘과 기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까다로운데 심지어 원시 정령이라는 오래된 정령의 힘이라니.

‘하지만 결국 그걸 사용하는 건 술사야.’

그러나 결국 싸움의 주체는 정령이 아닌 정령을 부리는 술사다.

그들의 기술이 아무리 위력적이라 할지라도 활용하는 것은 술사 본인.

거기에 파훼법이 있다.

탁!

유릭이 부서진 바위를 밟고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쌔애애애액!

노르둔의 첫 번째 검이 쏜살같이 휘둘러졌다.

그 검격에 바닥이 패며, 부서진 파편들이 그대로 유릭에게 쏟아졌다.

화륵!

피워올린 불꽃이 쏟아지는 파편을 모조리 태워버린다.

일전에 엘가이아의 참격을 파괴하고 그 파편을 막아낼 때와 비슷하다.

그때는 미처 못 막아낸 파편이 유릭의 몸에 박혔지만, 이번에는 그런 일은 없었다.

모든 바위 파편을 불태우며 유릭이 바리에게 접근했다.

‘이렇게 가까우면 검들도 섣불리 움직이진 못하겠지.’

저 검들은 모두 거인이 들던 것처럼 거대하다.

그러고 보니 역사 수업 때 들었던 것이 떠오른다.

이 땅에서 처음으로 융성하여 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치렀던 건 지금의 인류가 아니라 멸종한 거인족이었다고.

그러니 대륙에 최초로 등장한 무구는 필시 거인이 쓰던 것일 거라던, 그런 얘기를 해줬던 선생님이 있었다.

바리의 등 뒤에 있는 노르둔의 여섯 검이 어째서 모두 거대한 크긴지 알 만했다.

‘…….’

역사 수업은 어찌 됐든, 유릭이 더욱 지근거리로 파고들었다.

저 거대한 검은 리치와 사거리는 더할 나위 없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이런 접근전에선 힘을 발하지 못한다.

자칫하다간 제 주인인 바리를 베어낼 수도 있으니.

유릭이 녹시아가 더 무뎌지기 전에 몇 차례의 검격을 쏟아냈다.

캉! 카카캉! 캉!

바리는 여섯 검의 지원이 모두 막혔음에도 손과 발로 그것을 모두 막아내었다.

그의 손발에 덧씌워진 기운은 노르둔의 힘으로 이루어진 오러였다.

‘근접전도 꽤 하는데.’

유릭이 작게 감탄했다.

역시 티르옌의 제자라고 해야 할까.

보통의 정령술사는 전투는 정령에게 맡기고 본인은 뒤에 숨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때문에 정령을 무시하고 술사를 치러 가는 것이 정석적인 공략법.

하지만 티르옌은 정령의 힘을 빌리되, 정령에게 싸움을 맡기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싸우는 것은 자기 자신.

스스로의 손에 정령의 힘을 담아 스스로의 판단으로 전투를 치른다.

그것은 용을 숭상하고, 나아가 스스로가 용이 되기를 바라는 티르옌의 전통 신앙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정령은 가장 용과 닮은 존재라고 하니까.’

신체의 99% 이상이 순수한 마나로 이루어진 존재인 드래곤.

그리고 그것은 정령 역시 마찬가지다.

티르옌은 과거부터 정령을 드래곤의 하위 생명체쯤으로 여겼고, 그 정령을 몸에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가 용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스스로의 손과 발에 정령의 힘을 받아들여 싸우는 것 역시 그 때문.

‘하지만.’

탁!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접근전에선 유릭이 한 수 위였다.

수차례의 페이크를 주고 속고 속이는 합이 오가던 중 한 번, 바리가 유릭이 섞어놓은 함정에 걸렸다.

유릭에게 속은 바리는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사이 유릭은 그의 반대쪽 땅을 밟았다.

‘잡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유릭이 바리의 옆구리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캉!

녹시아가 막혔다.

어느새 이쪽을 캐치한 바리가 오러를 감싼 무릎을 들어 유릭의 검을 막은 것이다.

유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명 바리의 시선은 반대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왼쪽을 보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일순간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 일순간으로 승패가 결정 날 싸움을 하고 있었다.

“땅을 밟고 사는 이상 제 감각을 벗어날 순 없습니다.”

키잉.

유릭이 바리의 오러에 파고들기 위해 녹시아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바리의 오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원시 정령의 기운은 지금 유릭의 경지로 훼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대단하군. 땅에 닿아만 있다면 보지 않아도 전부 보인단 말인가?”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 발소리예요.”

“발소리?”

“발소리를 듣고 공자의 움직임을 알아챘을 뿐입니다.”

휘둘러진 검을 오러를 덧씌운 무릎으로 절묘히 막아낸다.

무릎의 각도나 오러의 집중이 조금만 흐트러졌어도 큰 상처를 입었을 묘기였다.

그 정도의 일을 발소리만 듣고 행했다고?

“어릴 때부터 있던 재능입니다. 발소리만 들어도 주인의 키나 몸무게, 버릇도 알아낼 수 있었죠. 발자국이 보이면 더 확실하구요.”

발소리나 발자국만으로 상대를 판별하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기술은 아니다.

사냥꾼들은 짐승의 발자국만 봐도 그들의 상태를 알아맞히며, 레인저 부대의 정예병들은 발소리로 그 사람의 호흡 주기까지 알 수 있다 하였다.

바리는 그저 그들의 기술을 선천적인 재능으로 가지고 있었을 뿐.

대지의 정령이기도 한 노르둔에게 선택받은 이유가 그것이라고.

“굉장한 재능이군. 남들은 수십 년을 단련해야 간신히 발현되는 기술인데.”

“하늘의 축복이죠.”

“발소리라…….”

쌔액!

유릭이 붙잡힌 검을 강제로 휘둘렀다.

더 이상 막고 있기 힘들었던 바리는 검에 튕겨 그대로 한 바퀴 돌아 뒤로 뛰었다.

다시금 거리가 벌어지고, 싸움은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발소리를 듣는다고 하니까 궁금해지는데. 너한테 이게 어떤 식으로 들릴지.”

“뭔가 있습니까?”

유릭의 말에 바리가 제법 흥미를 가졌다.

어차피 거리가 멀면 노르둔의 여섯 검이 있는 만큼 그가 유리하다.

먼저 거리를 좁힐 이유도 없었기에, 바리는 유릭이 무엇을 보여줄지 차분히 기다렸다.

바리에 비해 유릭은 아직 제대로 보여준 것이 없었다.

화룡검화도 1중첩에 그쳤을 뿐이고, 쓸 수 있는 몇몇 마법도 무공도 쓰지 않았다.

그저 순수히 검술만으로 승부에 임했을 뿐.

하지만 바리의 말을 들으니 한 가지를 시험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알아보겠어.’

그가 초대에게 받은 신비한 힘 중 하나.

천마 설군악에 의해 보증되긴 하였으나 아직 미숙하여 제대로 힘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그 보법.

<태양천보(太陽天步)>.

‘천마는 이 보법이 대지와 소통하기 위한 보법이라 했었지.’

그걸 대지의 정령의 계약자 앞에서 선보이다니, 흔치 않은 기회가 아닌가?

검의 원시 정령이기도 한 노르둔인 만큼 대지의 정령 안에서도 상당히 고위의 정령일 터.

어쩌면 천보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오시지요.”

바리가 웃으며 얘기했다.

그러나 입가와 달리 그 눈과 귀는 날카로이 유릭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다.

조금의 방심도 없이, 무엇이 날아오든 완벽히 대처하기 위해.

그 가시 같은 긴장감은 유릭에게도 전해졌다.

왈칵, 단전에서 더욱 많은 내기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유릭의 전신에 뻗어 나가더니 다리와 발바닥에 모였다.

“간다.”

한 걸음.

유릭이 경기장 바닥을 밟았고.

쿠웅-!

땅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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