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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93화 (93/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93화

93화. 네 녀석이

노르둔은 바리가 아주 어릴 적에 계약한 정령이다.

검의 원시 정령으로 그 존재의 격이 오르긴 하였으나, 태생은 대지의 정령.

실제로 대지의 정령으로서도 상당히 상위에 있는 존재였다.

전투는 정령이 대신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행해야 한다는 티르옌의 전통 때문에 이 자리에 현현하진 않았지만, 그 감각은 언제나 바리와 이어져 있었다.

‘소리는…… 특별할 건 없는데.’

유릭이 밟은 태양천보의 발소리.

당장 귀로 들리는 소리에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특색은 없었다.

왜 굳이 유릭이 이런 소리를 들어달라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바리의 감각이 아닌 노르둔이 느낀 감각은 달랐다.

‘……!’

갑작스레, 바리의 숨이 턱 막혀왔다.

폐가 쥐여 짜이는 듯한 감각과 함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와 노르둔의 감각은 언제나 일부 공유되어 있다.

그 공유된 감각을 통해 노르둔의 반응이 바리에게도 일부 흘러들어 온 것이다.

‘이…… 건…….’

지금 느끼는 그것이 무엇인지 바리는 알 수 없었다.

광활한 하늘을 보는 것도 같고 깊은 무저갱을 보는 것도 같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너무나 방대한 감각.

정령과 인간은 너무나 다른 생물이고, 하물며 노르둔은 정령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존재.

그런 존재의 날 것 그대로의 반응이 역류하는 것만으로 바리의 수용량은 꽉 차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

바리의 상태를 눈치챈 노르둔이 급하게 감각 공유를 뚝, 끊었다.

덕분에 바리는 무사할 수 있었으나, 정상적으로 서 있을 수는 없었다.

툭.

그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했다.

“……엉?”

바리가 기절하기까지의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해서, 유릭에겐 너무나 갑작스럽게 보였다.

그가 눈을 깜빡거리며 쓰러진 바리를 보았다.

태양천보의 효능은, 간단히 비유하면 주변의 중력을 조작하는 그래비티 마법과 얼추 비슷했다. 똑같지는 않아도.

때문에 상대가 기절한다는 건 유릭의 예상 밖의 일이었다.

“…….”

“…….”

한편 주변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두 가주를 비롯한 구경꾼들이 모두 침묵에 싸였고, 북을 치며 분위기를 북돋던 이까지 그 손을 멈췄다.

단순히 유릭의 걸음 하나로 바리가 기절했기 때문이 아니다.

태양천보의 영향력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뻗어 나간다.

바리 외에도 이 자리의 모두가 전신을 관통하는 유릭의 기운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거꾸로 치는 벼락과 같았다.

하늘에서 내리쳐 땅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 땅에서 솟아 하늘로 오르는 벼락.

“크카카카카!”

“…….”

라그룬은 아까보다도 더욱더 유쾌하다는 듯 웃어젖혔고, 발렌티나는 알지 못했던 아들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한줄기 웃음소리만 울려 퍼지는 침묵 속에서 유릭이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아닌데…….’

그의 눈은 기절한 바리를 향해 있었다.

그냥 천보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이 없을까 해서 밟은 것뿐인데 이렇게 될 줄은.

-유, 유릭 로스카 승!

“끙.”

덕분에 경기는 승리하긴 했지만, 영 찝찝한 결과였다.

* * *

“헉!”

“일어났냐?”

마을 의료원의 돌침상에서 바리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유릭이 읽던 책을 탁, 덮고 그를 보았다.

“상태는 어때.”

전혀 고의는 아니었다만 어쨌든 그를 기절시킨 건 자신이다.

몸 상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예. 괜찮습니다만…….”

바리가 어안이 벙벙한 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잠시 뒤에야 전후 기억을 되찾았다.

교류전의 한중간이었고 유릭과 대련하던 중, 그리고 그의 발소리를 듣고 기절한 일까지.

“제가 졌군요.”

“응, 뭐.”

일단 진 것으로 되긴 했다.

조금 찝찝한 승리였지만 어쨌든 마지막까지 일어서 있던 것은 자신이니.

“교류전은 어떻게 되었죠?”

“이미 끝났어.”

“끝났어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습니까?”

“슬슬 해 질 녘이야.”

바리가 깜짝 놀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릭의 말대로 창밖의 하늘은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차저차해서 스코어 하나 차이로 우리가 이겼다.”

“하나 차이로……. 그 말씀은 제가 이겼다면 저희가 이겼단 말씀이시군요.”

“너 때문은 아니지.”

“아닙니다. 당주 후계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는데요.”

바리가 쓴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 훤히 비친다.

자신이 이겼다면 스코어는 물론이고 다음 차례의 사기도 더 올랐을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

“저도 아직 멀었군요.”

그건 자책이라기보단 반성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바리가 고개를 저어 기분을 전환하고는 유릭을 보았다.

그때쯤 이미 그의 얼굴엔 평소와 같은 미소가 돌아온 채였다.

“대단했습니다, 공자. 로스카에 전해지는 걸음입니까?”

“태양천보 말인가?”

“그런 이름의 걸음이군요.”

“로스카의 비전은…… 아니, 맞아. 가문의 비전 중 하나지.”

무공의 일종이니 가문과는 관계없다고 하려다 고쳐 말했다.

생각해 보니 태양천보는 초대 가주가 남긴 기술이니 가문의 비전이라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근데 어떻게 된 거야? 그 걸음에 상대를 혼절시키는 그런 효능은 없는데.”

처음엔 바리가 대지의 정령의 계약자인 탓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티르옌의 구경꾼들 중에 바리 말고도 대지의 정령과 계약한 이들이 몇 사람 있었던 것이다.

물어보니 그들은 태양천보를 밟을 때 기절할 정도의 뭔가는 없었다고 하였다.

“아, 그건.”

바리가 짐작 가는 것이 있다는 듯 대답했다.

“노르둔이 특별한 정령이라 그럴 겁니다.”

“검의 원시 정령이라 했던가? 대지의 정령이기도 하고.”

“예. 일반적인 대지의 정령과는 조금 다른 존재이지요.”

그리고 특별한 것은 바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리가 타고난 정령과의 교감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일족 중 가장 뛰어나다고.

그 덕에 그는 노르둔이란 대단한 정령과 계약할 수 있었고, 더해서 티르옌의 차기 당주로서 길러지고 있던 것이다.

그 특별한 교감 능력이 이번엔 악재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 순간 노르둔이 느끼고 있던 감각이 그대로 제게 흘러들어 왔습니다. 저는 그걸 견디지 못해 기절한 것이구요.”

“그렇군.”

대강의 앞뒤 사정은 알겠다.

그걸 들은 유릭이 그동안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어땠어.”

“예?”

“실은 태양천보의 수련이 지지부진해서 말인데, 그 흘러들어 온 감각이란 게 어떤 느낌이었지?”

“글쎄요…….”

바리가 손바닥으로 입가를 덮으며 기절하기 직전의 일을 떠올렸다.

짧은 한순간의 일이었다지만 바리에게는 영원과도 같던 시간.

떠올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잠시 숙고하며 생각을 정리한 바리가 산뜻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군요.”

유릭이 눈을 깜빡거렸다.

“모르겠어?”

“예. 잘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흡사 구름 같은 감각이었습니다. 아마 제가 잘 알 만한 감각이었다면 기절하는 일도 없었을 테지요.”

그렇게 얘기하니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바리가 기절한 것은 그 모종의 감각이 그의 인지를 초월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

그걸 설명하라는 것은 사람에게 신의 존재를 설명하라는 것만큼이나 말이 되지 않는 일일 테지.

“그래…….”

유릭이 살짝 실망스럽게 대답했다.

‘뭐 어쩔 수 없나.’

그래도 실망감은 크지 않았다.

애초에 대지의 정령과 태양천보에 관한 일 자체가 충동적으로 떠올린 일에 불과하니.

이 악물고 지금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일은 아니다.

“노르둔을 불러 직접 들어보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어? 가능해?”

“잠시만요.”

바리가 그리 얘기하니 유릭의 얼굴에 다시 희망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태양천보 역시 비밀이 많은 무공이다.

천마의 얘기와 흡수한 비급의 페이지 덕에 어떻게 사용하고는 있다만, 구석구석까지 자세히 꿰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하지 못했다.

대지의 정령이 해주는 얘기는 적잖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에 눈을 빛내고 있으려니.

“으음…… 싫다고 하네요.”

“엥?”

“다른 사람 앞에 나오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을 위해 조언을 해주고 싶지도 않답니다. 그리고…… 아뇨, 이건 아닙니다.”

“뭔데? 괜찮으니 말해봐.”

“그게…… 공자에겐 더 얘기해 주기 싫다고…….”

유릭이 재촉하니 바리가 마지못해 노르둔의 마지막 얘기를 전달했다.

혹여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까 바리가 조심스레 유릭을 쳐다보았으나.

“…….”

유릭은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굳이 나를 지목하면서 비호감을 표시했다는 건가?’

당연하지만 노르둔이란 정령과 면식이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콕 집어서 자신을 싫다는 듯 얘기한다.

태양천보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대지의 정령 입장에선 불쾌하게 느껴질 힘이란 얘기군.’

비록 노르둔은 아무 얘기도 해주지 않았지만, 지금의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단서는 되었다.

당장 뭘 할 수는 없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때 지침이 될 수는 있으리라.

“역시 계약자라 그런지 많이 친한가 봐?”

얼추 대답은 들은 것 같아 유릭이 화제를 돌렸다.

“노르둔은 제 스승이자 친우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

“어릴 때 부모를 잃은 저를 일족의 모두가 가족으로 여기며 먹을 것이니 땔감이니 가져다주었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하지만…… 천둥이 치는 밤에 제 옆에서 저를 안아준 것은 노르둔뿐이었습니다.”

그 눈에는 깊은 정이 담겨 있었다.

다른 일족에게 보이는 눈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정이었다.

“그런 정령이라면 네 패배에 무척 아쉬워하고 있겠군.”

“하하하, 아쉬워하는 정도면 다행이지요.”

생각보다도 더 화를 내고 있는 모양이다.

유릭이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

“다음에 다시 제대로 붙어보자고.”

“그거 좋지요. 저도 이대로 끝내긴 아쉽던 참이었습니다.”

바리가 눈을 반짝이며 끄덕였다.

티르옌은 드래곤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수행에 대한 광적인 열정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식으로 끝난 대련을 달가워할 리는 없겠지.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며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고 있으려니.

-공자님! 크, 큰일입니다!

웬 사내 하나가 병실로 급하게 노크하며 들어왔다.

누군가 봤더니 아칸과의 회담을 위해 따라온 로스카의 행정관 중 하나였다.

유릭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니의 엄명 때문에 자신은 회담과 거리를 두고 있는데 행정관이 왜 자신에게?

“무슨 일인데?”

“아칸의 가주가-”

행정관이 숨이 넘어갈 듯 다급히 이야기를 꺼냈고.

“…….”

그걸 듣던 유릭의 얼굴이 점점 돌처럼 굳어갔다.

* * *

아칸과 로스카의 회담은 마을의 중앙에 있는, 가장 큰 회관에서 치러지고 있었다.

평소엔 일족의 큰 행사가 아니면 한산하기만 한 건물인데, 근래 며칠은 정말 많은 이들이 들락거리며 차가운 건물에 온기를 채워갔다.

그 온기는 단 며칠 만에 열기라 불릴 정도로 달궈졌고.

“말도 안 됩니다! 이제 와서 그 무슨 폭거입니까, 아칸 가주!”

지금은 뜨겁다 못해 터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너 같은 말단에게 묻지 않았다. 어떤가, 발렌티나 로스카. 제법 그럴듯한 제안이 아닌가?”

“…….”

능글맞게 얘기하는 라그룬 아칸과 굳은 표정의 발렌티나 로스카.

중간에 열을 냈던 로스카의 행정관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려 하였으나, 발렌티나의 손이 그걸 막았다.

“라그룬 아칸.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말이 아니면?”

“유학 얘기는 이미 끝난 것으로 아는데.”

조약의 강제력을 위해 각 가문의 자제를 서로에게 ‘유학’을 보내자던 최초의 제안.

이미 한 번 엎어졌던 그 얘기를 라그룬이 느닷없이 다시 꺼낸 것이다.

라그룬의 눈이 활처럼 휘어졌다.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 않은가.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네만?”

“달라져? 뭐가 말이지?”

“내 마음이 바뀌었지.”

“…….”

그 폭언과도 같은 말에 자리의 모두가 말문을 잃었다.

“원래는 별 쓰잘데기없는 인질 교환이라고 생각해 관심 없었다만-”

라그룬이 킬킬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검지와 엄지만을 쫙 편 그의 손이 회의실의 문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는 문을 가리키는 그 동작에 행정관들이 의아해하던 중.

-고, 공자님! 잠시, 일단 진정하시고…….

한 줄기 소란과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유릭 로스카.

회의실의 무거운 열기에 아무렇지 않게 침입한 그가 가장 처음 목격한 것은, 자신을 가리키며 히죽 웃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네 녀석이 갖고 싶어졌다. 유릭 로스카.”

유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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