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94화
94화. 그런 말
회귀한 이래로 지금처럼 유릭의 표정이 굳은 적이 없었다.
분명 볼모로 팔려가는 미래는 회피했다 생각했다. 운명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그런데 그 얘기가 다시 나오게 되다니?
‘라그룬 아칸.’
분명 교류전에서 녀석의 반응이 이상하긴 했었다.
그러니 뭔가의 변화는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변화가 설마 볼모 얘기가 부활하는 것일 줄이야.
아칸 정도 되는 대가문의 의향을 손바닥 뒤집듯 제 맘대로 휙휙 뒤집는 변덕스러운 노인.
라그룬 아칸이 유릭을 보며 손짓했다.
“내게로 와라, 유릭 로스카. 너의 그 불꽃을 로스카 따위에서 썩히지 말거라.”
로스카 따위라는 말에 로스카의 행정관들이 발끈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라그룬은 철저히 무관심하다.
지금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은 단 하나. 유릭밖에 없었으니까.
“아칸에 가면 내 염…… 화염술의 단련에 도움을 주겠단 소린가? 그런 얘기라면 일전에 거절했을 텐데.”
“일전에? 무슨 얘기지?”
“성인식 때 클레어가 5성 마법서를 가지고 와선 비슷한 소리를 했었지. 나는 거절했고, 그 대답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호오? 클레어 고년이 제법 보는 눈이 있구나.”
라그룬이 슬쩍 아칸 쪽 자리의 끝자락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견학 겸 와 있는 클레어가 숨을 죽인 채 자리해 있었다.
그녀보다 훨씬 윗줄인 루카스나 샤니스조차도 라그룬 앞에서 감히 토를 달지 못하는데, 그녀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클레어에게 듣는 것과 내게 듣는 것은 다를 테지. 약조하마. 내게로 와 충성을 맹세한다면 아칸의 모든 비전과 비술을 알려주겠다. 내 제자로 받아 나의 불꽃을 직접 전수해 주마. 어떠냐?”
라그룬이 히죽 웃으며 유릭을 응시했다.
마치 맹수가 침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가까이 얼굴을 들이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실제로 초월을 이룬 노인 앞에서 유릭은 한낱 사냥감이라 하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한다.”
한낱 사냥감에게도 반격을 위한 발톱은 있는 법.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일축하는 유릭의 말이 회의실에 울렸다.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중 아칸의 행정관 하나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건방진 녀석! 감히 가주님께 말버릇이 그게 무어냐!”
평소에도 분위기를 읽을 줄 모른다고 정평이 난 고지식한 남자였다.
지금 말투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라그룬 본인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으니 더욱 나설 명분이 없는데도.
유릭이 힐끔 그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저 가주가 당신 가주지 내 가준가? 내가 가주님이라 부를 분은 세상에 단 한 명. 우리 어머니뿐이다.”
“저, 저……!”
아칸의 행정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릭은 저런 녀석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가 다시 이 사태의 원흉에게 눈을 돌렸다.
“라그룬 아칸. 확실하게 얘기하지. 내가 당신에게 충성할 일은 만에 하나도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유학 얘기를 받아들일 일도 없어.”
“흐음……. 무슨 말을 해도 안 되나? 내 직전제자가 싫다면 본래 유학하기로 한 아카데미는 어떠냐. 우리 아케인 아카데미는 화염술에 한해서는 대륙 제일의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지.”
짐짓 여유롭게 수염을 쓰다듬는 그 모습조차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카데미? 이 나이가 돼서 학교에나 다니라고?”
“굳이 학생이 아니라도 상관없지. 쓸 만한 교수에게 얘기해 놓을 테니 조교수로 들어가거라. 그것만으로도 배울 게 많을 게야.”
“그건 더 거절이야.”
유릭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아케인 아카데미에 ‘또’ 들어가라고?
회귀 전 자신을 가둔 감옥이나 다름없던 그 학교에?
라그룬과 유릭의 눈싸움이 이어졌다.
라그룬은 어디까지나 평화로운 교섭을 원한다는 듯, 단 한 줌의 기세도 흘리고 있지 않았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기세를 올렸다면 유릭은 교류전 때의 바리처럼 그대로 기절했을 텐데.
그것을 잘 알지만 유릭은 놈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설령 기절하게 될지라도 정신을 잃는 그 순간까지 단호히 거부하리라 생각하며.
“라그룬 아칸.”
그러자 발렌티나가 라그룬을 불렀다.
가치 높은 상품이라도 보듯 유릭을 보던 라그룬이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뭐지?”
“이대로는 얘기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슬슬 본심을 얘기하는 게 어떤가.”
라그룬의 미소가 짙어졌다.
“진정으로 유릭을 제자로 받겠다고 했다면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겠지. 한 번 엎어졌던 유학 얘기를 다시 들고 오지도 않았을 테고.”
“호오, 과연 로스카의 가주님이로군. 상당히 냉정해.”
누구랑은 다르다고 얘기하듯 라그룬이 유릭을 힐끔거렸다.
‘젠장.’
뿌득, 이가 갈린다.
그렇지만 놈의 말대로 지금은 냉정해야 할 때다.
유릭이 심호흡을 하며 거세게 뛰는 심장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사이 라그룬과 발렌티나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그래. 나도 이래 봬도 염치는 있는 놈이다. 장성한 남의 자식을 대뜸 내놓으라고 깽판을 놓는 사내는 아니란 말이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짐짓 신사답게 얘기하는 라그룬.
아칸의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땀만 흘리고 있었고, 로스카의 사람들은 가증스러운 속물을 보듯 라그룬을 쏘아보았다.
두 종류의 시선을 모두 즐기며 라그룬이 진짜 제안을 얘기했다.
“이러는 건 어떤가. 저놈과 내 딸 중 하나를 혼인시키는 거야.”
“…….”
유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아까처럼 멋대로 흥분해 대꾸하지는 않았다.
일단 지금은 놈과 어머니가 대화를 하고 있으니, 자신은 끼어들지 말고 차분히 대응을 강구할 때다.
“혼인? 정략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래.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지 않나?”
라그룬이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듯 얘기했다.
실제로 대륙에서 귀족이나 왕족끼리의 정략은 흔한 편이고, 당장 라그룬만 해도 그런 정략혼을 수차례나 한 몸이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두 가문의 결합에 정략혼만큼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쪽에선 누가 좋으려나…… 그래, 클레어가 비슷한 또래였던가? 마침 잘됐군. 나보다도 저놈의 가치를 먼저 알아본 클레어라면 좋은 반려가 되지 않겠는가?”
딸꾹.
아칸 쪽 구석 자리에서 딸꾹질 소리가 들린다.
갑작스러운 호명에 클레어가 놀란 것이리라.
아칸과 로스카의 행정관들은 -아까부터 그러긴 했지만- 더더욱 말을 꺼낼 수 없게 되었다.
이야기의 주제가 회담이 아니라 두 가문의 결합으로 넘어갔다.
정략에 관해 말을 꺼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각 가문의 주인들뿐.
발렌티나가 눈을 찡그렸다.
“무슨 속셈이지? 둘이 결혼을 시키고 네놈 가문에서 신혼 생활이라도 하라는 얘기냐?”
라그룬은 유릭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혼인만으론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다.
혼인을 빙자해 유릭을 가문으로 데려가는 것.
그게 놈의 목적이라고, 발렌티나뿐만 아니라 이 자리의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 둘이 어디서 살든 그것까지 간섭하진 않으마. 어디 중립국에서 살아도 좋고, 뭣하면 로스카에 살림을 차려도 좋다.”
라그룬의 발상은 그들 모두가 하는 생각과는 그 방향성이 전혀 달랐다.
“내가 내걸 조건은 한 가지.”
이 자리의 아무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이라면 누구도 떠올리지 못할.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를 모두 내게 넘겨라.”
그건 악마의 목소리였다.
* * *
아이를 하나도 아니고 -물론 하나라고 괜찮은 건 아니지만- 낳는 족족 데려가겠다니.
그 비도(非道) 한 말에 모두가 말을 잃곤 침만 삼켰다.
“…….”
클레어는 얼굴이 새파래진 채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무슨 눈을 하든 라그룬은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이었다.
“당연하지만 애를 갖지 않는다든가 하는 잔수작은 불허한다. 최소 둘, 아니, 셋은 낳도록. 기한까지 내걸진 않겠지만 10년은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도 나이가 있으니 말이야. 크크크.”
재치 있는 농담이라도 했다는 듯 키득거리는 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따라 웃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신 나간 새끼!’
유릭조차도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폭군이니 독재자니 하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로 단단히 미쳤을 줄이야.
유릭이 참다못해 한마디 하려던 그때, 먼저 입을 연 것은 그의 어머니인 발렌티나였다.
“불가.”
“……뭐?”
“그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유가 뭔지 들어볼까, 발렌티나 로스카?”
“자식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원한다고, 혹은 유릭이 원한다고 하여 네놈에게 그 자식을 넘길 수는 없어.”
“나랑은 견해가 많이 다른데. 내가 네 견해를 존중해야 할 이유가 있나?”
“그럴 수 없다면 회담은 여기까지다.”
한껏 뜨겁게 타올랐던 이 자리의 열기는 바야흐로 폭발 직전까지 치고 올라왔다.
발렌티나와 라그룬이 서로를 노려보며 불꽃이 튀고 있었다.
두 초월자가 정면으로 대립하니 주변의 다른 이들은 심장을 쥐어 짜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협정이 결렬된다면.’
아칸과 로스카의 갈등은 조금도 가라앉지 못한다.
오히려 이 결렬을 계기로 더욱 험악해지리라.
그건 회귀 전에 있었던 전쟁을 늦추기는커녕 훨씬 더 앞당기는 일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위험한 것들이 가득한 대륙인데 두 거대 가문의 전쟁까지 터진다면?
단순히 두 가문의 대립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둘의 동맹이나 속국,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여러 국가가 휘말리게 되어, 전 대륙이 전화(戰火)에 불타게 될 수도 있었다.
‘쯧.’
유릭이 속으로 혀를 차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발렌티나를 말렸다.
“어머니. 아직은 대화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화의 여지? 이자의 어딜 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게냐?”
발렌티나가 경멸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그 감정은 유릭이 아니라 라그룬을 향한 것이다.
라그룬은 익숙한 눈빛이라는 듯 어깨만 으쓱이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적의를 보이는 발렌티나보다 유릭의 말에 더욱 흥미를 보였다.
“역시 내가 점찍은 아이구나. 말이 잘 통해. 그래,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겠지?”
“내 쪽에서도 조건이 있는데.”
“흐흐흐. 그래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뭐든지 말해보아라.”
발렌티나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당장 분개하며 이 자리를 떠도 이상치 않을 그녀였건만, 일단은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이 유릭은 고마웠다.
자신을 신뢰하고, 또 자신의 말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분을 삭이고 있는 것이니까.
-공자…….
-대체 무슨 말을…….
상식으로 가늠할 수 없는 악마를 앞에 두고 무슨 조건을 얘기하려는 것인지.
유릭이 입을 열었다.
“첫째. 아이는 부모의 손에서 자라야 한다.”
“그 말은?”
“신혼집은 아칸 쪽에 차리기로 하지. 애초에 네놈이 원하는 것은 나이니 거절하진 않겠지?”
“크크크,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좋을 대로 하거라.”
거악의 노인과 그 앞에 선 고작 스무 살 난 청년.
그것은 흡사 악마와 거래를 하는 소년과 같이 위태로운 한 광경이었다.
영혼을 파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는 듯한.
“둘째 조건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
어쩌면 그 말 그대로일지 모른다.
유릭의 눈앞에 있는 이 노인은, 그가 봐왔던 그 어떤 악마보다도 거대하고 사악했으니까.
하지만.
“내 아이를 후계자로 지목해라.”
결코 헐값에 넘길 생각은 없었다.
“……뭐라?”
처음으로, 라그룬의 웃음이 멎었다.
유릭이 좀 더 확실하게 선언했다.
“아칸의 소가주직. 네놈의 세 아들딸이 피 터지게 경쟁하고 있는 그 자리. 태어날 내 아이에게 그걸 내놓겠다 약조하면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나를 원한다면 네놈의 가문 정도는 내놓아라.
그런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