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95화
95화. 미친놈
현대의 상식을 가진 유릭이었으나 이상하게 정략 자체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볼모로 팔려가는 것보단 훨씬 나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소개팅이나 선의 연장선처럼 느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라고 해서 모든 결혼이 연애혼은 아니니까.
그 때문인지 정략 자체는 괜찮았지만.
‘아이를 넘기라고?’
그건 절대 안 될 일이다.
현대의 상식이든 이 세계의 상식이든 뭐든 상관없다. 유릭은 결코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회귀 전, 정우였을 때의 그는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시설에서 자랐다.
때문에 부모가 없는 설움에 대해선 사무치게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에게 그런 경험을 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꼭 정략을 해야겠다면.’
그래서 내건 최소한의 조건이 그 두 개의 조건이다.
아이와 떨어지지 않게 자신도 아칸 쪽에 기거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안전과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일정 지위를 획득한다.
그 ‘일정 지위’에 소가주 자리를 부른 것은 조금 과하다 생각할 수 있다.
굳이 가만히 있는 아칸의 직계를 자극해 위험을 자초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유릭은 반대로 생각했다.
오히려 이 정도는 되어야만 자신과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그 정도가 아니면 언젠간 암살당한다.’
라그룬이 물러나고 나면 당연히 다음 아칸의 패권은 직계 중 누군가가 쥘 것이다.
그때 자신, 그리고 자신의 아이가 애매한 지위로 머물고 있다면 당장에 목이 날아갈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들과 동등히 맞설 수 있는 지위가 필요하다.
“…….”
라그룬이 말없이 침묵했다.
그의 웃음소리가 그치니 회의실엔 적막이 가득했다.
뱀처럼 번들거리는 눈빛이 유릭을 향했다.
“다다음 번도 아니고 내 바로 다음 가주로 올려라?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말이 안 될 건 뭐지?”
“나도 나이가 있는 몸이다. 그리 오래지 않아 물러나게 되겠지. 내가 물러날 때 네놈의 아이가 과연 몇 살이나 되어 있을까.”
유릭이 콧방귀를 뀌었다.
다 알면서 모른 체하긴.
“새로 옹립된 군주가 아직 아이인 경우는 역사 속에서도 수없이 있던 일이 아닌가? 그에 대한 해법도 명쾌하게 기록되어 있지.”
“…….”
-섭정(攝政)…….
어딘가에서 누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바로 그것이 유릭이 제시하는 조건의 실체였다.
군주가 아이일 경우 일반적으로 부모가 섭정을 맡곤 한다.
이 경우 자격이 있는 건 둘. 유릭 본인과 클레어 아칸.
그 정도 자리가 있어야지만 이미 아칸에 뿌리내리고 있는 루카스, 필리페, 샤니스의 암수를 물리칠 수 있다.
유릭은 그렇게 판단했다.
“말도 안 돼!”
쾅!
누군가가 책상을 쾅 치며 일어났다.
두 눈에 한껏 분노를 담고 있는 삐쩍 마른 사내.
루카스 아칸이었다.
“유릭 로스카! 그딴 제안을 잘도 뻔뻔히 나불대는구나! 용납할 수 없다!”
“용납 못 할 건 뭔데?”
“아칸의 후계는 오로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출된다. 그건 지난 수백 년간 가문을 지탱해온 힘의 원천이자 전통이야! 네 녀석이 멋대로 침범할 영역이 아니다!”
벌겋게 소리치는 루카스를 보며 유릭이 귀를 후볐다.
“싫은데?”
“뭣……!”
“애초에 납득할 수 없는 제안을 한 건 그쪽 가주가 먼저 아냐? 앞으로 태어날 내 아이를 넘기라니? 너는 그게 맞다고 보는 건가?”
“그건-”
“후계 경쟁이 아칸의 전통이라면 부모가 제 자식을 키우는 것은 인류의, 아니, 모든 생물의 전통이 아닌가? 그걸 무시하는 제안을 던질 거라면 가문의 전통 따위를 주장하면 안 되지.”
“이 자식…… 혓바닥만 나불대서는…….”
루카스가 분노로 이를 갈지만 대꾸할 말이 있을 리 없다.
그의 옆자리엔 샤니스도 있어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애초에 루카스처럼 들고 일어서지 않았다.
유릭의 제안에 불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 자리에서 말과 논리로 어찌할 수 없다 생각했기에 애초에 일어서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도도하게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물론 눈은 한껏 찌푸리고 있었지만.
“유릭 로스카. 네놈의 조건은 그게 끝인가?”
라그룬이 얘기했다.
“그래. 나는 그렇지.”
그 말에 대꾸하며 유릭이 한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라그룬의 시선 역시 유릭을 좇아 같은 곳으로 향했다.
그 끝에 있는 것은.
“…….”
새파랗게 질려 있는 클레어였다.
“내 조건은 이걸로 끝인데 그쪽에서 원하는 건 없나?”
“저, 저는…….”
혼인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니 클레어의 의사 역시 중요할 터.
유릭이 물으니 클레어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녀는 유릭을 보다, 시선을 돌려 라그룬을 보고는 폭 고개를 숙였다.
“……저는 딱히 없어요.”
“그래?”
뭐 그렇다면야.
유릭이 다시 고개를 돌리니 라그룬이 피식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뜻이 곧 가문의 뜻이다. 기껏해야 정략 정도의 이야기에 아이의 의견 따위가 필요한가?”
“…….”
해주고 싶은 말이 많긴 했지만 굳이 하지 않았다.
말한다고 바뀔 만한 남자도 아니고.
“어쨌든 잘 알겠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지. 아무리 나라도 즉답하긴 어려운 일이로군.”
라그룬이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폭발 직전까지 달아올랐던 열기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각 가문의 행정관들이 웅성거리며 오늘 있었던 폭탄과도 같은 대화들을 복기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유릭, 그만 가자꾸나.”
발렌티나는 여전히 경멸스러운 표정을 띄운 채 뒤도 보지 않고 회의실을 떠났다.
유릭도 얌전히 그 뒤를 따라 회의실 밖으로 향했다.
그가 막 문턱을 넘었을 때.
“유릭 로스카. 하나는 알아두어라.”
뒤에서 라그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회담은 무척이나 재밌더군. 난 더욱더 네놈이 갖고 싶어졌다. 크크크.”
발걸음을 멈췄던 유릭이 대꾸 없이, 라그룬을 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미친놈.’
회의실을 나가는 그의 표정은 기이하리만치 가라앉아 있었다.
* * *
오늘의 회담은 끝이었으나 일거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정관들은 더욱더 잠도 못 자고 논의를 계속 나누게 되었다.
오늘 있었던 갖가지 발언을 정리하고 각자의 입장을 고려하여, 대책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 유릭은 발렌티나에게 따로 불려가 한참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유릭. 라그룬 아칸과 정면에서 대립하다니, 왜 그리 무모한 짓을 하는 것이냐. 어미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잘못했다간 놈의 턱짓 한 번에 잿더미가 되어버릴 수도 있어.”
“그게…… 저도 어머니가 뒤에 있으니까 그런 건데…….”
“누가 말대꾸를 하라고 그랬지?”
“죄송합니다.”
유릭이 재빨리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차라리 왜 가문의 대사를 멋대로 진행하는 거냐든가 그런 호통이었다면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칸의 가주와 정면에서 맞선다는, 위험천만한 짓거리를 한 것에 대해 혼내는 것은 어떤 변명도 불가능했다.
상대는 초월을 이룬 노인.
유릭 따위는 길가의 돌멩이만큼이나 손쉽게 치워버릴 수 있는 절대자였다.
“후우…… 그래, 일단은 이 정도로만 하지. 그만 쉬거라. 뒷일은 맡기도록. 절대 네가 홀로 희생해야 하는 결과는 내지 않으마.”
한참을 꾸중을 듣고 있으려니 발렌티나가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유릭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걱정 말거라, 유릭. 네 아이가 어떻게 되는 일은 없을 터이니.”
머리 숙인 유릭에게 발렌티나가 중얼거리듯 얘기했다.
그건 강한 어조였지만, 어째선지 유릭에겐 무척 쓸쓸하게 들렸다.
‘아이작 때문인가.’
순간 아이작을 떠올린 것이란 생각에 유릭이 고개를 들어 발렌티나를 보았다.
“아이작이라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 자식은 이미 한참 전에 독립할 나이였어요. 부모에게서 떨어지면 안 된다는 건 아이일 때 얘기지, 다 큰 자식은 당연히 떨어지는 게 맞죠.”
“……그래. 그렇지.”
그러나 이 정도 위로론 발렌티나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이 이상 위로할 말도, 그럴 방법도 없어 유릭은 침묵했다.
자신이 라그룬과 이런저런 언쟁을 나누긴 했으나, 실제 아이를 잃은 발렌티나 앞에서 선뜻 말을 꺼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미안하구나. 괜히 신경 쓰게 만들어서.”
“아니요…….”
“그만 들어가 쉬거라. 오늘은 고생했다.”
발렌티나가 쓰게 웃으며 얘기했고, 유릭이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왔다.
* * *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때에도 로스카의 장원은 불이 꺼질 일이 없었다.
행정관들은 한창 앞으로의 회담에 대해 깊은 논의를 하고 있었고, 그런 한편.
“다들 수고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모두 공자님 덕분에 이긴 겁니다!”
“다 잘해서 이긴 거지.”
유릭과 또래 기사들은 교류전의 승리를 축하하며 축배를 들고 있었다.
빵과 고기에 가주가 특별히 하사한 값비싼 포도주를 곁들인다.
머나먼 타지인 만큼 진수성찬까지는 아니었으나 그것에 불만을 가지는 기사는 없었다.
사실 음식이 어떻든 술 한 동이만 있으면 흠뻑 취하는 것이 이 나이대의 젊은이들이 아니겠는가.
“이야, 정말 굉장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마법인가요? 그 몸이 무거워지던 그 기술이요.”
“마법은 아니고 풋워크 같은 거야.”
“그게요? 무슨 풋워크가 그렇게 마법 같답니까?”
“가문의 비전 중 하나니까.”
기사들이 감탄성을 내뱉으며 선망의 눈길로 유릭을 바라보았다.
과연 직계는 다르구나. 로스카의 비전은 엄청나구나.
그런 식의,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한껏 솟아오르는 눈빛이었다.
순수한 호의와 뿌듯함이 섞인 시선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유릭이 피식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뭐야, 마르쉘. 너도 마시고 싶냐?”
“예?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술맛을 즐기던 중 시선이 느껴져 유릭이 마르쉘을 보았다.
그녀 역시 교류전의 멤버였던 만큼 이 자리에 참석해 있다.
물론 미성년자이기에 술이 아니라 주스만 마시고 있었지만.
“넌 안 돼. 나중에 성인식 치르고 나면 마셔라.”
“네, 네에…….”
마르쉘이 할 말이라도 있다는 듯 힐긋힐긋 유릭을 보았다.
조금 낌새가 이상해 보였지만 유릭은 개의치 않았다.
예전부터 마르쉘은 항상 저랬었으니까.
그렇게 떠들썩한 시간이 흐르고.
“아칸의 가주가 미친 게 틀림없습니다! 감히 우리 공자님께 그런 말을 하다니!”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기 시작하자 점차 분위기가 과열되기 시작했다.
그런 중 화제로 나온 것이 오늘 있었던 회담의 이야기.
기사들은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는 모두 전해 들은 후였다.
“멋대로 제 딸을 들이미는 것도 모자라서 태어날 애를 모두 내놓으라고? 강도 놈도 그딴 소리를 지껄이진 않을 겁니다!”
“조용, 조용. 다들 일하고 있으니까 좀 자제해.”
분개하는 기사들을 오히려 유릭이 진정을 시켜야 했다.
하지만 젊은 혈기에 교류전의 승리로 한껏 달아오른 상태, 심지어 술까지 실컷 들어갔다.
말 몇 마디로 진정할 리가 없었다.
“빌어먹을 노친네!”
“노망난 늙은이!”
결국 유릭도 포기하고 고래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없는 자리에선 황제도 욕한다고 하니까.’
아군도 아니고 적군의 우두머리를 욕하는 것이니, 굳이 이 악물고 말릴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렇게 떠들게 내버려 두고 유릭은 혼자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때.
“…….”
닫힌 문 바깥에서 숨길 생각도 없는 살의가 느껴졌다.
유릭이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한창 시끄럽던 기사들도 마나를 운용해 순식간에 취기를 몰아내며 검을 잡았다.
-공자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시종의 목소리에 유릭이 들어오라 얘기하였고.
“…….”
“바쁘신데 미안해요, 공자.”
문이 열리며 도끼눈을 뜨고 있는 아칸의 기사와 쓴웃음을 짓는 클레어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