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96화
96화. 귓등으로도
기사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안쪽에서 들리던 소리를 모두 들은 모양이었다.
벽도 두껍지 않은데 그렇게 크게 떠들었으니 충분히 들었을 법하다.
그 때문인지 기사는 한껏 험악한 인상을 짓고 있었지만.
“유릭 공자.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클레어는 그걸로 뭐라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러지.”
유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고 싶은 말이 없을 수 없겠지.
그만한 일이 있었으니 한 번쯤 진득이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긴 했다.
회의실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녀였지만, 그건 아마 라그룬이나 다른 이의 눈 때문에 하지 못한 것이리라.
“공자님. 호위하겠습니다.”
비교적 술을 가장 적게 마신 가장 연장자인 기사가 나섰다.
저쪽도 호위 기사가 있으니 최소한 인원수는 맞춰야 안전하리라 생각한 모양.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호위는 이미 있으니까 괜찮다.”
“예?”
유릭이 클레어와 함께 방을 나섰다.
나가는 그의 뒤에서 그림자가 일렁였다.
순간 클레어의 시선이 유릭의 그림자로 향했지만, 그녀는 말없이 돌아섰다.
그들이 향한 곳은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장원 바깥의 담벼락 근처, 달빛이 그대로 쏟아져 내리는 장소.
‘브로치가 빛나고 있군.’
적색 지대에서 얻은 달빛 브로치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환한 달빛을 한껏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게 해서 뭐에 쓰는 것인지는 아직 감이 안 오긴 하지만, 그래도 유릭은 달빛의 충전을 일과처럼 행하고 있었다.
“…….”
인적이 드문 담벼락 근처에 도착한 클레어가 유릭을 돌아보았다.
먼저 할 말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유릭이 얌전히 기다리자, 머지않아 그녀의 입이 열렸다.
다만 그때.
“유릭 공자!”
입을 연 그녀보다 먼저 말을 쏘아붙인 건 옆에 있던 아칸의 기사였다.
클레어의 말을 기다리던 유릭은 눈을 찌푸리며 그를 보았다.
“왜?”
“정식으로 사과를 요청하오.”
“뭔 사과?”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기사를 보니, 그의 눈에 담긴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에른 경!”
당장 오러라도 일으킬 기세에 클레어가 찌푸리며 기사를 말렸으나.
“그런 말을 듣고 어찌 진정하겠습니까 공녀님! 유릭 공자. 공자가 진정으로 두 가문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면 이 자리에서 당장 사과하시오!”
기사는 귓등으로도 듣는 척을 하지 않았다.
클레어의 말을 거스를 정도로 흥분했다는 얘긴가?
주군의 욕을 들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유릭은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에른 경이라고 했나? 꽤나 머리가 잘 굴러가는군.”
“무슨 소리요?”
“아까까진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지?”
“……!”
뜨끔한 것이 있었는지 에른의 표정이 움찔했다.
만약 그가 이야기를 엿들은 그 즉시 지금처럼 폭발했다면 유릭은 인정했을 것이다.
충직한 기사라면 충분히 그럴 법하니까.
반대로, 그때도 잘 참고 지금까지도 계속 참고 있었다면 사적인 감정보다 클레어를 존중할 줄 아는 정중한 기사라 생각했겠지.
그런데 아까는 꾹 참다가 이제 와서 폭발하다니?
생각할 수 있는 이유야 하나뿐이다.
“머릿수 많아서 쫄았어?”
“뭣……!”
“거기서 뭐라고 하기엔 내 편이 너무 많아서 지금까지 기다린 거 아냐.”
로스카의 기사들이 다수 있는 앞에서 항의하기엔 조금 후달린다.
그러니 공자만 홀로 남을 때를 기다려 압박을 해보자.
그런 계산이 없고서야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기사라기보단 장사치 같은 녀석이구만.”
“큭!”
유릭이 피식 웃자 기사의 얼굴이 대번에 달아올랐다.
울분과 수치심이 뒤섞인 듯한 그런 오묘한 표정이었다.
“공자!”
유릭의 비웃음을 견디지 못했는지 그가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 손은 검 손잡이를 채 잡지도 못했다.
슉!
“큭……!”
그림자 속에서 올라온, 정체불명의 검신이 어느새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검을 잡기라도 했다간 당장에 목에 구멍이 뚫릴 거라며.
대체 무슨 조화로 그림자 속에서 무기가 올라온 것인진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명백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갔다간 목에 구멍이 뚫리리라는 것.
에른이 이도 저도 못하고 움찔거리고만 있자, 클레어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만하세요, 에른 경. 공자, 저희 쪽 기사의 무례는 제가 사과드리죠. 죄송합니다.”
“하지만……!”
“경.”
차분하지만 단호한 클레어의 어조에 에른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그가 오러를 가라앉히곤 검에서 손을 멀리했다.
그러자 그림자 속에서 솟았던 검도 스르륵 다시 들어갔다.
“저흰 좀 떨어져서 얘기를 하고 올 테니 경은 이 자리에서 기다리세요.”
“위험합니다, 공녀님!”
“경과 있는 게 더 위험하겠어요.”
클레어가 에른을 두고 조금 떨어졌다.
유릭도 그녀와 함께했다.
떨어졌다고 해도 멀리 간 것은 아니어서 에른과 글렌의 시야에서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
클레어가 손가락 끝에 마나를 모으더니 허공에 그었다.
그러자 마나의 입자가 퍼져 얇은 벽을 만들었다.
소리를 차단하는 벽이었다.
‘신중하군.’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는 됐다.
정략결혼에 대해 얘기를 할 참이니 남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그런 말도 오갈 수 있을 터.
“공자. 회의실에서 했던 얘기는 모두 진심이신가요?”
“그래. 그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도 라그룬 아칸의 제안을 받을 용의가 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요?”
“그건 그때 생각해 볼 문제고.”
“…….”
클레어가 잠깐 입을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로 괜찮겠어요? 만약 아버님이 조건을 받아들여 저희 아…… 아…….”
“아이?”
유릭이 대놓고 얘기하자 클레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요! 아이! 저희 아, 아이를 소가주로 삼는다고 해도 그걸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다.”
“아뇨. 공자가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빨개졌던 클레어의 얼굴빛이 어느새 다시 차분하게 돌아왔다.
표정이 없어진 그녀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얘기했다.
“에른 경의 태도를 보셨죠?”
“좀 건방지긴 하더군.”
“원래 남부엔 다혈질인 기사들이 많지만 저 정도는 아니에요. 다 저 때문이죠.”
“네가 왜?”
“전 사생아거든요.”
유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클레어가 사생아라는 정보는 회귀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들은 바가 없었다.
내부 사정인 만큼 아칸에서도 숨기고 있던 정보인 건가?
“아시다시피 아칸에선 직계들의 경쟁을 방조하고, 오히려 부추기는 풍조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데…….”
“어머니의 권력 말인가?”
“맞아요.”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이 방임주의인 만큼 그 자식을 낳은 어머니의 권력이 강조된다.
아칸에 있는 가주의 부인들은 모두 출신도 대단하고, 권력이든 무력이든 혹은 재력이든 한 가지는 뛰어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 힘으로 그녀들은 본인의 자식을 지원하며 후계 경쟁에 참여한다.
그런 사이에서 어머니가 없는 사생아라는 것은…….
“과연. 그러니까 네겐 아이를 철저하게 지켜줄 배경이 없다는 말이군.”
“……네.”
클레어가 쓴웃음을 지으며 힐긋 에른 쪽을 바라보았다.
“에른 경은 원래는 저렇게까지 무례한 기사는 아니에요. 아마 언니의 입김이 들어갔을 테죠.”
“샤니스의? 그 여잔 너를 아끼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생아는 절대 가주가 되지 못할 걸 아니까.”
“…….”
절대 자신의 경쟁자가 되지 못할 걸 아니까 아껴준다는 것인가.
어떤 의미론 대단하기까지 하다. 그 정도로 적아를 철저하게 구분하고 다닌다니.
괜히 가주 후보로 손꼽히는 여자가 아닌 것 같았다.
“에른 경이 저러는 건 언니가 공자에게 보내는 메시지예요. 가문 내에서 제 입지가 한낱 기사들에게도 무시 받는다는 걸 보여서 뜻을 꺾기 위한. 저와 결혼해도 이득이 적다는 걸 공자에게 보여주려는 거죠.”
“……고생이 많군.”
“후.”
클레어가 피식 웃으며 깊은숨을 토해냈다.
처지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약간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흡사 물속에서 숨 막혀 하다가 간신히 수면에 오른 것처럼.
아칸 안에선 절대로 하지 못했던 얘기를 풀게 되니 조금은 속이 시원했다.
“그래서 괜찮냐고 물어보러 온 거예요. 저야 언젠가는 팔려갈 몸이니 그게 지금이어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공자는 다를 테지요. 저보다 훨씬 괜찮은 혼사가 많이 들어올 거잖아요?”
“아칸보다 괜찮은 가문은 찾기 힘들 텐데.”
“아칸이라는 껍데기만 있는 것보단 나은 곳이 많겠죠.”
유릭이 팔짱을 꼈다.
확실히, 이렇게 되면 계획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라그룬에게 했던 유릭의 제안은 클레어가 최소한의 영향력은 가지고 있을 때를 상정한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아칸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아이 정서에 좋을 것 같지는 않군.”
육아에 좋은 환경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으리라.
“그래도 정략을 포기하지 않으실 건가요?”
“포기고 뭐고 애초에 그쪽 가주의 제안이잖아? 안 하면 전쟁인데 뭐 어째.”
“그, 그건 그렇지만…….”
유릭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을 시작했다.
그건 고민이라기보단 한 번 끝냈던 계산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는 듯한, 그런 느낌의 표정이었다.
그가 생각에 잠길 수 있게 잠시 기다리던 클레어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얘기했다.
“아버님의 제안이라면 혹시…….”
“뭐 좋은 생각이라도?”
“아버님이 원하시는 건 정략뿐이니까. 제가 아니면 괜찮지 않을까요?”
유릭이 눈을 깜빡였다.
그건 그가 예상했던 ‘좋은 생각’의 방향은 아니었다.
“너 말고 누구?”
“가령 언니라면……. 샤니스 언니라면 아버님도 불만 없을 테고 공자도 그렇게 고민할 필요는 없겠죠. 언니의 세력은 가문의 1/3에 달하니까 절대 위험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언니도, 소가주직이 함께 딸려온다면 기꺼이 유릭 공자를 반겨줄 테구요.”
“그건 그렇지.”
유릭이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클레어의 제안은 유릭과 라그룬, 샤니스의 입장에선 확실히 좋은 생각이 맞았다.
하지만 클레어 본인의 입장에서 좋은 생각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진 않으리라.
‘내가 한 조언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군.’
과거 유릭은 클레어에게 충고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스스로를 희생하는 길을 택하진 말라고.
볼모 얘기가 나올 때를 대비해 해둔 말이긴 했지만, 그거나 이거나 마찬가지다.
회귀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그녀는 여전했다.
“미안하지만 그런 여자는 취향이 아니어서.”
“네?”
“가문을 위해 정략을 하겠다곤 했지만 마냥 희생할 생각도 아니거든. 나도 조금은 상대를 고르고 있단 말이지.”
비즈니스 파트너 같은 걸 고르는 상황이었다면 샤니스도 충분히 고려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가족을 고르는 상황이기에 꽝이다.
그는 정치에 찌든 사람과 평생을 동고동락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얘기는 잘 들었다. 미리 알려줘서 고맙군.”
“…….”
“앞으로에 대해선 좀 더 생각해 보는 걸로 하고, 오늘은 일단 돌아가지. 너무 늦게까지 있어도 안 좋으니.”
“…….”
“클레어?”
“……엣?”
“일단 돌아가자고.”
“아, 네, 네!”
다른 고민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그녀는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이 중요한 상의를 하는 와중에 넋을 팔다니.
역시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는 게 맞으리라.
“조심히 들어가라. 잘 자고.”
“공자도, 안녕……히 주무세요.”
“글쎄. 잘 수 있을진 모르겠는데.”
한창 술 파티를 벌이던 곳을 바라보니 클레어가 작게 미소 지었다.
처음 테메레르의 연극을 보며 신나 하던 때 이후로 처음으로 보는 웃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달빛 아래로 사라지고 담벼락엔 유릭만이 남았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따라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때 글렌이 불쑥 나타나더니 선언했다.
“어디에? 아칸에?”
“예. 저는 그런 개고생만 할 장소까지 따라가고 싶지 않습니다. 도련님이 심어놓은 씨앗이니 부디 도련님 혼자 가시길.”
정중히 툴툴거리는 글렌의 말에 유릭이 피식 웃었다.
“할아버지한테 말해보든가.”
“…….”
절대 놔주지 않겠다는 말을 돌려 하는 유릭을 보며 글렌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