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97화
97화. 클레어
클레어는 에른을 대동하곤 아칸의 식솔이 머물고 있는 장원으로 향했다.
그녀의 뒤에서 호위하고 있는 에른이 슬쩍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말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제가 너무 흥분해서 그만…….”
사과를 하는 건가? 클레어가 웬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괜찮아요. 별일 없었으면 됐죠.”
“돌아가면 어떤 질책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나저나…… 유릭 공자랑 꽤 오래 얘기를 하셨군요. 소리 방벽까지 치시고.”
“…….”
의외라는 눈빛을 띠던 클레어가 이내 그럼 그렇지, 하며 코웃음을 쳤다.
사과는 결국 물꼬를 트기 위해 꺼낸 소리일 뿐. 진짜 목적은 유릭과의 대화 내용을 캐내려던 것이다.
이 약간의 대화로 에른의 의도를 모두 읽어낸 그녀였으나.
“부끄러워서 그랬어요. 아무래도 남녀의 얘기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짐짓 모른 체를 하며 대답을 흘려 넘겼다.
핑계로도 그럴싸하고, 이렇게 얘기하면 더 묻기도 뭐하다.
“그, 그렇군요.”
아니나 다를까 에른은 지금의 대답으로 싹 입을 닫았다.
아무리 샤니스의 명이 있었다곤 해도 두 남녀의 비밀 대화까지 캐내는 건 기사로서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머지않아 두 사람은 장원에 도착했다.
클레어는 피곤하다는 한마디와 함께 에른을 떼어내곤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가던 중 잠시 돌아보니 에른이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기사들의 숙소가 아닌 다른 방향이었다.
‘후우.’
한숨을 쉬며 방으로 돌아온 그녀가 피곤한 듯 눈가를 덮었다.
그러곤 아직 일어나 있는 시녀를 찾아 차를 한 잔 부탁했다.
목을 넘어가는 따스한 차의 향기를 느끼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똑똑.
-클레어, 자니?
지금만큼은 듣고 싶지 않은, 그러나 올 것임을 알고 있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잠시 자는 척을 할까 고민도 해봤지만.
‘시녀한테 이미 들었겠지.’
자신에게 차를 내준 시녀에게 이미 얘기를 들었으리라.
그런 쪽에 있어선 과할 정도로 철저한 것이 샤니스란 인간이었으니까.
“일어나 있어요. 들어오세요, 언니.”
자신의 언니인 샤니스 아칸.
가문 내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있었던’인 이유는 오늘부로 그것이 불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유릭 공자에게 다녀왔다며? 이 야밤에 오붓한 밀회라니. 후후.”
샤니스가 짐짓 놀리는 듯한 말투로 접근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안심이 되면서도, 동시에 섬뜩했다.
차라리 정색하며 기어오를 생각 따윈 말라든가 그런 얘기를 꺼냈다면 더 편했을 텐데.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오늘 일이 너무 당혹스러워서 공자의 생각을 좀 더 자세히 들어보려고 간 거예요.”
“어머, 그래? 그는 뭐라고 하던?”
“아버님이 먼저 취소하지 않는 이상은 본인도 의견을 바꿀 생각은 없다고 하네요.”
“…….”
일순간 샤니스의 눈에 차가운 빛이 흘렀다.
그것은 아주 순간에 불과했고 샤니스는 능숙히 감추었지만, 클레어의 눈을 피해 갈 순 없었다.
샤니스의 눈빛에 천천히 섞이기 시작한 적의(敵意).
그녀의 정적인 루카스나 필라페를 볼 때와 똑같은 적의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언니…….’
클레어는, 다른 이라면 몰라도 샤니스에 대한 일이라면 아주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가문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챙겨줬던 것이 샤니스니까.
유일한 편이기에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
아주 약간의 변화도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어렸을 때부터 클레어의 시선은 언제나 샤니스를 향하고 있었고, 그건 오늘 이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클레어. 난 항상 네 편이야. 알고 있지?”
“……그럼요.”
어머니가 없는 클레어에게 샤니스는 언니이자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자식이란 본디, 어미의 사랑이 떠나는 순간을 가장 민감하게 알아차리게 마련이었으니.
“이해해. 아버지의 제멋대로인 결정을 네가 뒤집을 수 없다는 건. 하지만 말이야…… 남편이 될 유릭 공자 정도는 휘어잡을 수 있겠지? 넌 이렇게 어리고 아름답잖니. 네가 마음만 먹으면 넘어오지 않을 남자는 없어.”
글쎄요, 그 유릭 공자에게 그렇게 쉽게 될까요?
라는 반박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꾹 숨겼다.
“휘어잡아서 어떻게 하라는 거죠?”
“꼭 뭘 하라는 게 아니라, 잘 가르치라는 거지. 그 왜 유릭 공자가 이번에 되도 않는 제안을 했잖아?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제안인지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같던데, 네가 잘 가르쳐 주렴.”
요는 반하게 만든 다음에 의견을 철회하게 하라는 거다.
말만 정중하지 비밀 외교나 첩자들이 쓰곤 하는 미인계를 쓰라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동생인 자신을, 말 그대로 말 잘 듣는 부하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샤니스의 시선이 뱀의 동공과 같이 열리며 클레어의 반응을 세세히 살핀다.
흡사 자신이 달아놓은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제대로 묶여 있는지 확인하는 것과 같이.
클레어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웃었다.
“알겠어요, 언니. 그런데 오늘은 제가 좀 피곤해서…….”
“어머, 미안.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구나. 너도 혼자 생각할 게 많을 텐데.”
샤니스가 너스레를 떨며 일어났다.
잘 자란 인사와 함께 그녀가 클레어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뒤돌아 방을 나설 때까지.
샤니스는 클레어의 미소를 간파하지 못했다.
여전히 사슬이 잘 묶여 있다 생각한다.
“…….”
그 사실이 클레어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자신은 언니를 사랑했다.
그래서 항상 언니를 지켜봤고, 언니의 아주 세세한 변화와 연기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언니는 자신의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스티안. 불 좀 붙여줄래?”
그녀가 손짓하며 부르자 허공에 마법진이 새겨지더니 둥둥 뜬 불꽃의 해골이 나타났다.
일전에 파티 때와 달리 머리만 나온 해골이 클레어의 명령대로 벽난로에 불을 붙였다.
클레어가 나무 의자에 앉아 조용히 불꽃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은 쌀쌀하네…….”
그녀가 걸치고 있던 스톨을 여몄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의 빛이 눈동자에 비쳐 일렁이고 있음에도 그녀는 서늘함을 느꼈다.
벽난로는커녕 밤바람이 부는 담벼락에 있던 때에도 추위 따윈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유가 무엇인지는,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그때는 둘이었고.’
……지금은 혼자니까.
* * *
어느덧 달이 하늘 너머로 사라지고 태양이 떠올랐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해 퀭한 눈이 된 클레어가 얼굴을 씻곤 간단히 단장을 마쳤다.
이른 새벽부터 그녀가 향한 곳은, 일찌감치 불이 켜져 있는 가주의 집무실이었다.
모든 일에 제멋대로고 변덕이 심한 라그룬이었으나 단 하나, 새벽부터 움직이기 시작하는 습관만은 수십 년 동안 거른 적이 없었다.
“후우.”
집무실의 방문 앞에서 그녀가 숨을 고른다.
자연스럽게 몸이 굳어오려는 것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녀가 문을 두드렸다.
“아버님.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 얘기하고 잠시 기다리니,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책상에 앉아 곰방대를 물고 있는 라그룬이 보였다.
그리고 한쪽에서 차를 타고 있는 집사 칼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가씨.”
칼이 부드럽게 인사하며 찻잔 두 잔을 가져왔다.
이 꼭두새벽에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곧바로 차를 내오다니, 과연 수십 년이나 라그룬을 보필한 집사다웠다.
“무슨 일이냐?”
칼이 건넨 찻잔에는 별반 흥미도 보이지 않은 채 라그룬이 나른하게 물었다.
그것만으로 클레어의 몸이 돌처럼 굳어왔다.
평소 라그룬의 앞에만 서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몸이 굳어오는 그녀였다.
밀려오는 숨 막힐 듯한 압박감 속에서, 그녀가 두어 번 심호흡을 거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유릭 공자와의 정략을 취소해 주세요.”
그녀가 눈을 내리깔며 얘기했다.
잠시 동안 견디기 힘든 침묵이 흘렀다.
고개를 숙인 클레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고, 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오묘한 미소만을 띠고 있다.
그리고 라그룬은.
“흐음.”
클레어의 말을 음미라도 하듯 턱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다오, 클레어. 내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다. 그러니까 유릭 로스카와 결혼을 하기 싫다?”
“네.”
“분명 내가 하라고 얘기를 하였는데, 그래도 하기 싫다?”
“……네.”
“하.”
라그룬이 피식 웃었다.
이런 일은 근 십 년간 없던 드문 일이라 그도 잠시 얼이 탔다.
자신의 결정에 가문의 구성원이 감히 토를 달다니.
오히려 그것이 클레어에겐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덕분에 한번 들어볼 정도로는 흥미가 생겼으니.
“네 언니 때문이냐?”
곰방대를 물고 불을 붙이며 라그룬이 물었다.
클레어가 샤니스의 비호를 받고 있고, 항상 그 그늘에서 지내고 있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방임하고 있다지만 가문의 모든 대소사는 그의 귀에 들어오게 되어 있으니.
“제 뜻이에요.”
그러나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샤니스는 의미 없는 일에 매달리지 않는 성격이다.
클레어를 압박해 정략을 거부하게 해봤자, 라그룬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을 아는데 뭐 하러 그런 일을 하겠는가?
실제로 샤니스가 클레어에게 했던 말은 정략 후에 유릭을 조종하라는 얘기.
즉 라그룬의 뜻을 일절 거부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최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그런 방향이었다.
“그렇군.”
이런 사정을 라그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클레어가 본인의 뜻이라고 하였을 때 그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단지 의문을 품었을 뿐.
“그럼 왜? 그 꼬마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냐? 아니면 이제 와서 정략 자체에 회의감이 들기라도?”
라그룬이 삐딱하게 고개를 틀며 물었지만 클레어는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정략을 취소하고자 하는 이유 자체는 어제 유릭에게 얘기한 것과 같았다.
‘유릭 공자에게도 태어날 아, 아이에게도 너무 위험해.’
아이를 생각하려니 얼굴이 달아오르려 했으나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정략이 이루어져 유릭이 아칸으로 오게 된다면.
그에겐 필시 수많은 위험과 역경이 닥칠 것이다.
아마 한순간도 발 뻗고 자기 힘들 테지.
실제로 그녀의 언니인 샤니스도 어릴 때부터 저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철이 든 이후로,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한순간도 편안히 잠을 자지 못했다.
그 극심한 스트레스가 그녀를 자연스럽게 바꿔놓은 것이다.
그래서 클레어는 샤니스의 변화를 이해하고, 지금도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릭을 이런 세계에 끌고 들어오라고?
심지어 자신의 아이까지도?
‘나한텐 득의양양하게 희생하지 말라고 그랬으면서.’
분명 처음 만났을 때 그런 얘기를 들었었다.
희생하지 말라니 뭐니 그런 얘기를 떠들었던 주제에,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내던지려 하다니.
그런 걸 그녀가 용납할 리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제…….’
어제 느꼈던 그 온기가 아칸이라는 차디찬 가문에 시들어 꺼져 버리지는 않을지.
마치 언니처럼.
……그게 어쩌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이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할 수는 없었다.
“없다라?”
“예.”
“이유도 말하지 않고 멋대로 내 뜻에 반하겠다는 것이냐?”
라그룬이 콧잔등을 씰룩이며 얘기했다.
그 순간 집무실의 공기가 완전히 경직되었다.
클레어는 덜덜 떨려오는 몸을 멈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어야 했다.
“내 뜻은 곧 가문의 뜻. 가문의 의지가 나의 의지다. 가문의 이름을 떼면 아무것도 아닌 네년 따위가 내 말을 거역해!?”
분노하는 라그룬을 보며 클레어는 허파를 뚫고 올라오는 두려움을 견뎌야 했다.
단순한 부모의 꾸짖음이 아니다.
자식의 엇나감을 바로잡으려는 호통이 아닌, 본인의 불쾌함을 여실히 드러내기 위한 말.
그렇기에 더욱 오금이 떨려오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용서를 구하며 모든 말을 취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이름을 버리고 가문에서 나오겠습니다.”
오히려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가장 물러서고 싶을 때야말로 가장 나아가야 할 때인 법.
“감히!”
쾅!
책상을 치는 소리와 라그룬의 호통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만으로 집무실이 흔들리며 창문이 깨질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더 오래 시간을 끌었다간 각혈이라도 할 것 같았다.
새파래진 얼굴로, 그러나 침착하게 클레어가 얘기했다.
“대, 대안을 가져왔습니다.”
싫다고 울기만 하면 통하는 것은 어린아이일 때의 얘기다.
어른이라면 무언가를 거부하기 위해선 대안을 준비해야 하는 법.
그것 때문에 어젯밤 그녀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말해봐라.”
라그룬의 기세를 가라앉았다.
사라진 것이 아니다. 마지막 기회라는 듯 웅크리고 있다.
꿀꺽.
클레어가 침을 삼키곤, 생각해 온 대안을 얘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