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98화 (98/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98화

98화. 해왔던 것처럼

콰아아아아!

예르바넨 폭포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폭포가 보이는 하나로 된 거대한 바위.

교류전을 치렀던 그 장소에서 두 인영이 엎치락뒤치락 움직이고 있었다.

“합!”

바리가 눈을 부릅뜨며 손을 휘저었다.

그 손에서 폭사된 잿빛의 기운이 네 자루의 검을 움직여 유릭을 덮쳤다.

하나하나가 묘리를 담고 있는 위력적인 검.

캉! 카카캉!

그러나 유릭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요리조리, 날아오는 검들 사이를 쳐내고 재주넘으며 유릭이 착실히 빈틈을 노렸다.

당장은 바리가 공세를 유지하고 있고 유릭은 피하기만 하고 있었지만.

여유가 있는 유릭에 비해 바리의 얼굴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대로는 또 진다.’

노르둔의 여섯 거인검. 그중 네 자루를 움직이는 것은 나름 바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전투 스타일이었다.

단순히 우르르 움직이자면야 여섯 자루 모두 운용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각자의 묘리를 띤 검술을 펼치기엔 네 자루가 한계.

하지만 이것으론 유릭을 잡기 힘들어 보였다.

‘해보자.’

남은 두 자루도 비슷한 수준으로 운용하지 못하면 유릭을 이기지 못한다.

바리가 눈을 부릅뜨며 더욱 기운을 끌어올렸다.

잿빛의 기운이 너울거리며 팔뚝과 이마에 힘줄이 울긋 솟았다.

휙!

쌔애애애애액!

“흡?”

갑작스레 두 자루의 검이 추가돼 유릭이 잠시 당황했다.

네 자루의 검을 쳐내는 것만 해도 상당히 신경을 쏟고 있었는데 이젠 여섯 자루다.

고작 두 자루가 더해진 것에 불과했지만, 두 자루가 더해지면 공격 루트는 네 제곱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카카카캉!

여섯 자루나 되니 아무리 유릭이라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빈틈을 찾아 거리를 좁히려 시도를 해보지만, 그럴 때마다 바리는 귀신같이 알고 도망쳤다.

‘됐다!’

바리가 승리를 확신했다.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다른 방향에서 날아드는 여섯 자루의 검을 모두 받아내지는 못할 터.

바리 본인 역시 상당한 정신력이 소모되고 있었으나, 스스로가 지쳐 쓰러지는 것보다 먼저 유릭을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한편 그 시각 유릭은.

‘어쩔 수 없지.’

한쪽 눈을 찡그리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 손이 엑셀레아를 잡는다.

살짝 뽑은 즉시 방대한 바람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지만, 유릭은 바람은 억눌렀다.

좋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검의 힘을 사용하는 건 조금 치사하니까.

‘서리검무 제3검.’

엑셀레아의 바람을 쓰지 않을 거면서도 그걸 뽑은 건 빙하설월의 기운을 쓰기 위함이다.

엑셀레아가 몸에서 강제로 뽑아간 빙하설월의 기운과 손잡이 끝에 걸어 놓은 풍령이 공명하며 서리바람을 만들어냈다.

당장 눈앞에 덮쳐 오는 네 자루의 거인검을 바라보며 유릭이 엑셀레아를 휘둘렀다.

‘<잔설(殘雪)>.’

화아아아-!

검과 함께 불어온 눈폭풍이 바리의 검을 덮쳤다.

허공을 격하며 날아오던 네 자루의 검이 휘청휘청 바람에 쓸려 흩어졌다.

그사이 유릭이 바리에게 뛰었다.

“!”

바리가 급히 남은 두 자루의 검으로 유릭을 막으려 하였으나.

콰아아아아!

재차 덮쳐든 서릿빛 오러가 그 두 자루 역시 튕겨내었다.

첫 참격을 막아내 방심한 상대를 재차 덮쳐드는 참격으로 베어내기 위한 것이 서리검무의 세 번째 검, 잔설.

일련의 과정이 펼쳐지는 사이 유릭은 유유히 바리의 앞에 도착해, 이미 녹시아를 치켜들고 있었다.

<화룡검화>.

불꽃의 용을 두른 검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고.

휙!

부릅뜬 바리의 바로 눈앞에서 우뚝 정지했다.

이글거리는 형상이 바리의 눈동자에 맺히며 그가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졌습니다.”

바리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바위 위 여기저기 흩어진 여섯 거인검이 잿빛의 기운으로 화해 흩어졌다.

“고생했다.”

유릭이 손을 뻗어 바리를 일으켜 주었다.

“하아아……. 그 걸음이 아니어도 제가 지는군요.”

유릭의 부축을 받으며 바리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릭의 걸음, 태양천보만 아니라면 그래도 조금은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릭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교류전에서 이미 알았지만 그래 봤자 같은 또래가 아닌가?

실력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 변수를 이용하면 충분히 이길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강하시군요. 도저히 비슷한 나이라고 생각이 안 듭니다. 꼭 나이 드신 구도자분들과 대련하는 기분이었어요.”

“과장은.”

“과장이 아닙니다. 혹시 나이를 속이고 있는 거 아닙니까? 20살이란 건 거짓말이고 사실 50살쯤 되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없잖아.”

유릭이 피식 웃으니 바리가 턱을 쓰다듬으며 빤히 유릭을 바라보았다.

“나이를 속인다라……. 그러고 보니 드래곤들에겐 그런 유희가 있다고 하던데. 혹시…….”

바리의 중얼거림에 한쪽에서 구경 중이던 메르가 흠칫 놀랐다.

-헉! 저 녀석이 눈치챈 것 같아요, 어르신! 어떡하죠!?

메르의 과민반응에 유릭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넌 사람 말을 의심하는 법 좀 배워라.’

알고 지낸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유릭은 바리의 말버릇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건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드래곤 얘기를 꺼내 오곤 한다는 것이다.

어떨 땐 너무 맥락이 없어서 재미없는 개그라도 들은 것처럼 표정이 굳기도 했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그냥 그러면 어떨까 상상이나 해본 것이죠. 그 왜, 공자가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것이라면 그 나이에 이렇게 강한 것도 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까.”

-진짜예요! 이번엔 진짜라니까요!?

“재미없으니까 그만해.”

둘 다 제발 그만했으면.

대련의 여운을 즐기며 그렇게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으려니.

“공자님! 유릭 공자님 계십니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유릭이 고개를 돌렸다.

일전에 자신에게 회담에 대해 알려줬던 그 행정관이었다.

“무슨 일이지?”

“헉……. 허억…….”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숨이 가쁜지 행정관이 잠시 헥헥대더니 얘기했다.

“공자님의 그, 정략 말입니다만.”

“그게 왜?”

“아칸의 가주가 대뜸 말을 취소했습니다. 클레어 공녀가 원치 않는다고 하더군요.”

“클레어가?”

유릭이 갸웃거렸다.

일전에 둘이 얘기한 분위기로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아니지. 라그룬 그 작자가 클레어의 말을 들을 리가 없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라그룬이 그 정도 이유로 뜻을 꺾을 리가 없다.

클레어가 그랬다는 건 핑계고, 실제론 본인의 마음이 바뀐 것일 터.

이번엔 또 무슨 억지 제안을 하려고…….

“정확히는 아칸의 가주가 아니라 클레어 공녀가 직접 회의실에서 얘기했습니다. 가주의 묵인이 있던 것을 보아 미리 얘기된 사안인 것 같긴 합니다만…….”

“뭐 누가 얘기하든 큰 차이는 없지. 그래서, 대신 무슨 조건을 걸었지?”

변덕을 부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정략이 취소된 것은 알았다.

본래부터 약혼 같은 것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던 터라 취소됐다고 해서 무슨 감정이 들진 않았다.

단지 이번엔 라그룬이 무슨 억지를 부릴까 걱정만 될 뿐.

“그것이…….”

“그것이?”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겠다. 그게 조건이라고 합니다.”

“……뭐?”

유릭은 행정관의 말을 듣고는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 *

“제안을 받아 양측 모두 별다른 조건은 걸지 않기로 했다. 이것으로 양 가문의 뜻은 모였고, 남은 것은 세세한 조정뿐이야. 이틀 내에 귀향길에 오를 수 있을 거다.”

그 길로 유릭은 발렌티나에게 달려가 회담의 결과를 전해 들었다.

그녀가 전한 얘기는 행정관에게 들었던 것과 동일했다.

더불어 회담이 모두 끝났으니 이제 곧 가문으로 돌아갈 거라고.

티르옌에 온 지도 나름 긴 시간이 지났으니 드디어 돌아간다는 것이 기쁘긴 했다.

다만 그전에 의문부터 들었다.

“아무 조건이 없다니…… 라그룬 아칸이 정말 그런 말을 한 겁니까?”

“그래. 발안자는 클레어 아칸이라고 하더구나.”

유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것이 조건.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의문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가진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내내 조용하고 잘 고개도 들지 않길래 얌전한 아인 줄 알았더니, 무서운 아이더구나.”

“클레어가…….”

발렌티나의 말처럼 그것은 무서운 말이다.

로스카와 아칸의 평화 협정은 비유하자면 사이가 나쁜 두 사람을 같은 방에 밀어 넣고 룸쉐어를 시키는 것과 같다.

그 둘이 한 방에서 공존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필요한 것은 명확한, 다른 해석의 여지 따윈 없는 명문화된 규칙.

처음 나왔던 볼모 얘기도, 다음에 나온 정략 얘기도 모두 이 명확한 규칙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 규칙이 없다는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상태라는 건데.’

그저 평화라는 겉껍데기만 뒤집어썼을 뿐인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

하기에 따라서 평생 터지지 않게 잘 관리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무엇을 계기로 터질지 모르는.

“그대로 회의가 끝난 거군요.”

“아칸 가주가 이 조건이 아니라면 절대로 협정을 맺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말이지.”

“……확실히 그 노인이 좋아할 법한 일이긴 합니다.”

라그룬 아칸과는 이번에 처음 만났을 뿐이지만, 짧은 만남으로도 그 본성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클레어의 제안이라고 했던가?

필시 클레어에게 처음 얘기를 듣고는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했으리라.

떨면서도 각오를 다지며 얘기를 하는 클레어와 그걸 듣고 사악하게 웃으며 박수를 치는 라그룬의 형상이 눈에 훤히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있는 이상 본 가문이 어찌 되는 일은 없을 것이야.”

찌푸리는 유릭을 보며 발렌티나가 그렇게 달랬다.

사실 그렇게까지 걱정한 것은 아니다.

껍데기든 뭐든 협정 자체는 무사히 이뤄졌고, 자신이 볼모로 팔리는 상황도 피할 수 있었으니.

클레어와 결혼해 아칸에 신혼집을 차리는 미래도, 사실 유릭의 입장에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미래까지 피할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유릭에겐 최상의 결과였다.

하지만 불안요소가 없지는 않았다.

“유릭.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이 협정으로 진정한 평화가 이룩되었다 생각하면 안 된단다. 전쟁은 멈춘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변모한 것에 불과하니.”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아칸의 가주도 필시 그런 속셈으로 조건을 걸지 않는 것이 조건 같은 소리를 지껄인 것이겠지.”

“…….”

그것은 확실히 폭군이라 불리는 라그룬의 취향인 일이다.

조건 따위 갑갑한 것에 목을 매지 않고 자유로이, 스스로의 힘으로 원하는 것은 모두 취하겠다는 광포한 성정.

찡그리는 유릭을 보며 발렌티나가 조용히 얘기했다.

“걱정 말거라. 이 어미도 그런 건 싫어하진 않으니까.”

그녀의 눈이 번뜩인다.

그것을 보며 유릭이 헛웃음을 지었다.

분명 막 평화 협정을 맺은 참인데, 어째 전보다도 더욱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듯했다.

‘나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분명 한고비를 넘긴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안심할 수 있다는 얘기도 아니다.

두 가문의 오랜 원한이 마법처럼 단숨에 풀리는 것도 아니고, 라그룬은 여전히 자신을 노리겠지.

조건을 달지 않은 만큼 오히려 더 음습한 방법으로 자신을 옭아매려 할 수도 있다.

이미 수많은 운명이 변하여 미래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캄캄한 곳이 되었다.

그래도.

“슬슬 채비를 하자꾸나. 2~3일만 더 머물다 돌아갈 것이다.”

“예.”

해낼 수 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쭉.

그런 자신이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