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99화
99화. 귀향길
아칸의 일원을 태운 말과 마차가 티르옌을 떠났다.
기나긴 행렬이 모래 먼지를 흩뿌리며 아칸의 본가가 위치한 남부 땅으로 향했다.
그중 장남인 루카스는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직접 달리고 있었다.
-크카카카카!
간혹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지는 마차를 보며 그가 눈을 찌푸렸다.
그 마차는 가주인 그의 아버지와 측근인 칼 노인이 타고 있는 마차였다.
‘기분이 좋으신가 보군.’
루카스가 재미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회담이 끝난 이후로 아버지인 라그룬의 기분은 항상 최고조였다.
회담의 결과가, 특히 클레어가 직언한 예의 조건이 크게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앙큼한 녀석.’
그때는 루카스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항상 금붕어 뒤에 달린 똥처럼 샤니스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던 녀석이 아버지와 독대하여 일방적인 제안을 하다니.
그 겁을 모르는 행동에는 루카스도 질릴 수밖에 없었다.
사생아라곤 하지만 그 배짱은 충분히 아칸의 자식다웠다.
‘샤니스만 우습게 됐지.’
한 가지 즐거운 소식이 있다면 그 이후로 샤니스의 표정이 자주 일그러진단 것이었다.
겉으로는 평소처럼 웃음 짓고 있지만 그녀의 오라비인 자신은 알고 있다.
그 눈에 얼마만 한 굴욕감이 담겨 있는지를.
‘흥. 애초부터 넌 가주의 재목이 아니다, 샤니스.’
그런 샤니스를 루카스가 비웃었다.
샤니스가 가진 두 얼굴은 어찌 보면 군주에게 필요한 덕목이지만 아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현 가주인 라그룬이 수십 년에 걸쳐 쌓아 올린 패도(霸道)의 길.
그걸 이을 자에게 ‘두 얼굴’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덕목도 없을 것이다.
“클레어 공녀님이 공을 세우셨군요.”
그때, 누군가가 루카스와 말 머리를 나란히 했다.
“셀베크.”
기사 셀베크.
루카스에게 충성을 바친 기사로, 그의 오른팔 격인 자였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뭐가 말이냐?”
“클레어 공녀가 차기 후계에 영향을 줄 것 같습니까?”
셀베크는 어릴 때부터 언제나 루카스에게 온갖 질문을 하곤 했다.
그건 일상의 아주 작은 소소한 감상부터 시작해서, 군주로서의 대국적인 판단을 보기 위한 질문까지 아주 다양했다.
직접적으로 루카스를 교육한 적은 없지만, 루카스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남자.
이번 일로 가주가 클레어를 인식한 것이 후계 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물어보는 것이리라.
“의미 없지.”
루카스는 딱 잘라 대답했다.
“이미 가문 내의 세력은 3파전으로 견고하다. 그건 내부에서 누구 한 사람이 두각을 보인다고 흔들릴 만한 것이 아니야.”
“클레어 공녀는 샤니스 공녀의 세력과 함께하고 있지요. 그 샤니스 공녀의 세력이 흔들리게 될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클레어가 그걸 흡수해서 단숨에 신흥 세력으로 나선다, 뭐 그런 말이냐?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현실성은 없군. 나나 필리페가 망부석도 아니고 말이야.”
샤니스의 세력이 흔들린다면 가장 먼저 움직일 자는 클레어가 아니라 자신과 필리페다.
오히려 세력 내의 샤니스나 클레어보다 바깥의 자신들이 훨씬 더 빨리 낌새를 눈치채고 움직이리라.
역시나 클레어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이다.
“이제 와서 미꾸라지 한 마리 날뛴다 하여 강물의 흐름이 바뀌진 않지.”
“확실히 그렇겠군요.”
루카스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셀베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단 뜻이리라.
그리고, 그의 다음 말 역시 루카스의 생각과 동일한 것이었다.
“강 속의 미꾸라지는 흐름을 바꿀 수 없지만, 강 바깥은 어떻습니까?”
“…….”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차마 말로 하지 않았던 그것.
그의 자존심을 대놓고 건드리는 발언에 루카스가 얼굴을 씰룩였다.
“클레어 공녀와 연을 맺을 뻔했던 유릭 로스카 말입니다. 가주님이 흥미를 보이신 사내이기도 하지요.”
루카스가 잔뜩 찌푸리며 기분이 나쁘단 티를 팍팍 내도 셀베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유릭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루카스는 두어 번의 심호흡을 해야 했다.
“공자님?”
“……시끄럽다.”
그가 내놓은 대답은 보류.
아버지의 그 비정상적인 관심은 그라고 해도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게 어떤 변수가 될지 도저히 추측할 수가 없었으니.
“그깟 것 아무런 장해도 안 돼.”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말을 채찍질하는 일뿐.
루카스를 태운 말이 속력을 높여 앞질러 가는 것을 보며, 셀베크가 고개를 저었다.
* * *
어둑하고 낡은 초가집.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초라한 이 집은 티르옌의 당주가 사는 집이었다.
“당주님. 아칸이 떠났습니다. 로스카 역시 곧 떠난다고 합니다.”
하얀 천으로 된 티르옌의 전통복을 입고 있는 건장한 사내가 침상에 누워 있는 당주에게 보고를 올렸다.
“허어…….”
당주가 힘없이 파들거리는 손을 들어 올린다.
그 뜻을 헤아리곤 남자가 공손하게, 그러나 신속히 당주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조곤조곤, 개미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가느다란 노인의 목소리에 남자는 귀를 기울였다.
“예. 바리가 배웅하고 있습니다. 예. 예. 아쉽지만 용에 대한 정보는 그다지 없었습니다. 유릭 로스카가 호의로 나누어준 비늘 몇 장이 전부입니다.”
그토록 용을 갈망하는 티르옌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일방적인 구애일 뿐.
칼리오르페도 메르베키아도 그들에게 답해줄 의리는 없었다.
심지어 메르는 극도로 티르옌을 피하기까지 하였으니.
그렇기에 그들은 바로 방금까지도 두 용이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아니오. 안타깝지만 그 정도 비늘로는 비술을 앞당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룡의 비늘이면 또 모르겠으나 유릭 로스카가 가져온 것은 성체가 된 건지도 의심스러운 어린 용의 비늘이었습니다.”
“…….”
“그웬델 쪽에서도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고 합니다. 수정드래곤의 레어란 것은 진짜였으나, 아쉽게도 늦은 것이지요. 하다못해 용이 떠나기 전에 레어를 찾았다면 모르겠습니다만.”
“…….”
당주가 힘없이 손을 내린다.
그 안에 담긴 진한 아쉬움을 모를 남자가 아니었다.
그가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그래도 걱정 마시길. 이미 비술은 9할 가까이 완성되었습니다. 적어도 바리의 대에는 확실히 완성할 수 있겠지요.”
당주가 파들거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천장에 매달린 등불의 빛이 그의 눈에 새겨지듯 들어왔다.
당주의 눈은, 마치 스스로 빛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등불의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의 입이 열리고, 아까보다는 조금 커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애는…… 너무 순진하다…….”
“확실히, 비술에 대해 알게 되면 충격을 받을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노르둔…… 그년이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구슬릴 것이냐…….”
“걱정 마시길.”
당주의 걱정에 남자가 차가운 날붙이 같은 어조로 대답했다.
“바리 역시 티르옌의 일족. 일족의 숙원을 헛된 정 따위로 거스를 아이가 아닙니다.”
순간 창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천장의 등불을 살랑이며, 길게 드리워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 그림자가 어떤 형상을 이루었는지, 그것을 목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바리가 웃으며 손을 내미는 것을 유릭이 맞잡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공자.”
“유익한 시간이었다. 마지막까지 노르둔을 보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하하, 다음에 만나게 되면 다시 물어보지요. 워낙 변덕스러우니 그땐 현현해 줄지도 모릅니다.”
“그래.”
유릭이 피식 웃으며 손을 놓았다.
옆을 보니 다른 이들도 그간 알게 된 티르옌의 구도자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훈훈한 그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바리가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로스카와 아칸의 협정은 무사히 체결되었습니다. 티르옌이 정식으로 그것에 참관했죠.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됩니다, 공자.”
“…….”
“전쟁은 말이나 종이 쪼가리로 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 힘뿐이지요.”
전쟁을 피하기 위해선 전쟁을 위한 무기가 필요한 법.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었으나 그것은 세상의 섭리 중 하나였다.
비단 인간의 세계뿐만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서도 힘이 약한 짐승은 핍박만 받다 죽게 마련이었으니.
“……그래. 잘 알고 있다.”
유릭이 대답하니 바리가 힘을 풀고 웃었다.
“제가 괜한 참견을 했군요. 그런 걸로 방심할 공자도 아닌데. 그럼 언제나 조심하시길. 공자의 앞날에 꽃길만이 있기를 빕니다.”
“꽃길일지 불꽃길일지는 모르겠지만.”
“하하하. 그럼 이만. 메르도 다음에 또 만나지요.”
“샤아아!”
-저리 가!
바리가 웃으며 메르에게 인사를 하니 메르가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내며 인상을 썼다.
물론 바리는 그걸 보고도 귀엽다는 듯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바리가 떠나가고 유릭이 마차에 올랐다.
그곳에는 이미 티르옌의 당주와 인사를 마치고 온 발렌티나가 앉아 쉬고 있었다.
“인사는 마쳤느냐?”
“예.”
“그럼 출발하자.”
발렌티나가 똑똑, 마차 벽을 두드렸고 마부가 고삐를 내려쳤다.
그걸 신호로 로스카의 대인원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떠나가는 마차 속에서 유릭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티르옌의 광활한 초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끝났군.’
유릭이 등을 기댄 채 반쯤 뜬 눈으로 초원을 바라보았다.
물론 아직 남아 있는 일은 많다.
라그룬도 문제고 아이작도 문제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 세계엔 온갖 위험이 산적해 있으니.
하지만 볼모의 운명을 회피한다는 큰 목적을 달성한 지금, 유릭은 어느 종류의 탈력감에 싸여 있었다.
딱히 기분 나쁜 탈력감은 아니었다.
큰일을 하나 끝냈다는 성취감과 비슷한 그런 감각이었다.
적어도 가문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편한 마음으로 풍경을 즐겨도 되겠지.
다그닥 다그닥.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유릭이 눈을 감았다.
그 표정은 그간 7년 중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표정이었다.
서서히 쏟아지는 졸음에 몸을 맡기며, 유릭이 7년 만에 처음으로 온몸에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돌아가면 뭘 할까…… 일단 아껴두었던 최고급 브랜디를 까볼까?
한 병에 금화 200장은 하는 비싼 술인데 우연히 얻게 된 이후로 마시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는 중이었다.
앞으로도 할 일이 태산 같다곤 하지만, 할 땐 하더라도 축배의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 편히 쉬고 있던 유릭이었으나.
[“아저씨, 아저씨!”]
아무래도 편히 있을 시간은 없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요, 말 좀 전해 달래요! 북천멸강검이란 검에 대해 알아낸 게 있다는데요?”]
천마 설군악이 조사해본다고 했던 초대 로스카의 검, 이솔렛.
듣지 않을 수 없는 대형 정보에 심지어 유릭 본인이 부탁했던 사안.
‘뭔데?’
단숨에 졸음을 날려 보낸 유릭이 명민해진 머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