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01화
101화. 여전하구나
목재와 종이의 냄새가 가득한 방.
유일하게 놓여 있는 창가의 작은 화분만이 은은한 꽃향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 방의 장지문을 열고 한 여성이 들어왔다.
여인이라고 하기엔 어리고, 소녀라고 하기엔 성숙한, 미묘한 나이대의 여성.
설유화가 손을 들어 머리의 비녀를 빼내려다 우뚝 멈추곤, 그대로 손을 내렸다.
“나와.”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천장에 숨어 있던 검은 복면이 떨어져 내렸다.
꽤 높이가 있는 곳에서 떨어졌음에도 복면은 개의치 않고 땅을 박찼다.
휘익!
그의 눈이 검게 가라앉으며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른다.
가타부타 말없이 칼부터 휘두르는 자세는 과연 마교의 살수라 불릴 만한 것이었으나.
채채챙!
“커헉!”
펄럭이는 소매 속에서 뻗은 유화의 일장이 검을 박살 냄과 동시에 복면의 가슴을 그대로 가격했다.
새하얀 음기에 휩싸인 손바닥이 복면의 가슴을 자비 없이 뚫어버린다.
허공에 흩날려야 할 핏방울들이 모조리 얼어붙어 붉은 보석이 되어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그 모든 광경을.
‘빙백장(氷白掌)을 벌써 저 정도의 경지로 펼치다니!’
뒤쪽의 또 다른 그림자가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천마삼공이라 불리는 마교의 지존무공 중 하나인 빙백장.
빙궁의 전설적인 무공인 소수마공과 비견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던 그 천마의 무공이 열여덟 소녀의 손에서 펼쳐졌다.
너무나 완벽한, 군더더기 하나 없는 초식은 사내로 하여금 크나큰 감탄과.
‘역시 미끼를 쓴 게 정답이었습니다, 공자님.’
그리고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방금 죽은 남자는 미끼로, 일부러 조금 실력이 떨어지는 자를 붙인 것이었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더라도 목표의 방심을 끌어낼 수 있으니까.
‘저년은 지금 잘라내야 합니다. 반드시!’
차대 신교의 교주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는 마차를 가득 메울 정도로 있다.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당연히 마교의 뼈대라 할 수 있는 6대 가문의 출신들.
그러나 남자는 육가(六家)의 어느 누구보다도 가문 하나 없는 눈앞의 소녀가 더욱 전율스러웠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온갖 무공을 습득하고, 비급을 읽는 것만으로 선현의 깨달음을 고스란히 체득한다.
그 남다른 무공에 대한 이해도는, 불손한 말이지만, 당대의 천마와도 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정체 모를 서역의 주술까지 사용한다고 하니, 그녀가 가진 깊이를 사내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깊은 그릇이라도 아직 채워지기 전이라면.’
아직은 어리다.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얕은 세월은 그만한 한계를 가지게 마련.
유화가 검은 복면의 시체에 정신을 팔린 틈을 타 사내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등불에 흔들리는 그림자만큼이나 고요한 사내의 움직임은 일체의 기척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방금 죽은 검은 복면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살수라는 증거.
‘잡았다!’
이윽고 들키지 않고 사정거리까지 접근한 남자가 묵빛의 단검을 들어 올렸다.
빛이 반사되지 않도록 특수한 약품으로 칠을 한 단검.
그 검은 칼날이 유화의 뒷목을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노바 프로스트(Nova Frost).”
그때, 작은 목소리와 함께 유화가 디딘 땅을 중심으로 원형의 기운이 퍼졌다.
쩌적.
그 기운에 고스란히 노출된 남자는 단검을 든 자세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피부에 얕은 서리가 내리며 모든 관절이 얼어붙어 왔다.
“큭!”
사내가 재빨리 내공을 일으켜 얼어붙은 몸을 녹이려 하였으나.
푸슉!
그보다 유화가 은장도를 뽑아 휘두르는 것이 더욱 빨랐다.
“컥! 커헉!”
사내의 목에 난 고작 세 치 깊이의 검상.
그러나 거기서 흐르는 피는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니.
곧 사내의 눈에서 생의 빛이 사라지고, 유화가 작은 한숨과 함께 피 묻은 은장도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지겨워…….”
천마의 은퇴 선언을 기점으로 펼쳐진 육가(六家)의 후계 다툼.
점점 과열되던 그 싸움은 이윽고 암살대전이라 불리는 작금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야말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말을 실천하는 단계.
‘관심 없다고 하는데.’
아무리 천마 자리에 관심이 없다고 얘기한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위험한 경쟁자에게 암살자를 보내오는 것이다.
한번은 할아버지에게 하소연해 보았으나, 자기는 가르쳐 줄 것은 다 가르치고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말만 들었다.
각종 무공과 생존법, 그리고 지식 등은 가르쳐 주겠지만, 그걸 이용해 살아남는 건 그녀 본인의 책무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강자존을 율법으로 삼는 신교의 교주다운 말.
“향이야.”
한쪽에 늘어진 줄을 잡아당기며 그녀가 시녀를 불렀다.
“네, 부르…… 에그머니나! 이게 또 뭐람!”
곧바로 들어온 향이가 방 안의 참상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그러나 그건 기겁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또?’라는 느낌의 놀람이었다.
“좀 치워줘.”
“알겠어요, 아가씨. 사람들 깨워서 당장 치워 드릴게요.”
부산스럽게 떠나간 그녀가 잘 자고 있던 하인들을 걷어차 깨우고는 금세 돌아왔다.
하인들 역시 이런 일이 익숙한지 눈을 비비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시체를 치웠다.
하인들이 시체를 가지고 나가고 피 묻은 방안을 시녀가 걸레로 훔친다.
한창 걸레질을 하던 시녀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유화는 탁자에 앉아 창밖의 동그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한몸에 받는 유화는 같은 여자인 그녀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우수에 찬 그녀의 속눈썹은 그 그림의 깊이를 한층 더해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계신 것일까.
필시 스스로의 운명을 슬퍼하고 계신 것이겠지.
유화가 신교에 들어오기 전까지 평범한 상인의 집에서 자랐다는 건 시녀인 그녀도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 평화로운 세상에서 떼어져 온갖 암계가 가득한 무림의 세계에 끌려 들어오다니.
가끔 나오는 한숨은 필시 그 애환을 담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무림인도 아닌 일개 시녀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쓰러움을 감추며 향이가 묵묵히 유화의 방을 쓸고 닦았다.
하다못해 그녀의 방을 깨끗이 청소해 주는 일만은 할 수 있으니.
한편 그 시각 유화는.
[“아저씨~ 아저씨이~ 대답 좀 해봐요. 아무리 바빠도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네?”]
향이의 상상은 조금도 알지 못한 채, 달 너머의 그에게 초조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설마 지금 정……혼자분이랑 그렇고 그런 일 하고 있는 건 아니죠? 방해했다면 사과할 테니까 한 마디만 해줘요. 아저씨? 아저씨! 아 쫌! 대답 좀요!”]
* * *
정신을 잃으며 유화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그것도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강제로 연결이 끊긴 채 유릭의 정신이 당도한 곳은 과거에 와본 적이 있던 그 장소였다.
천마 설군악과 마주쳤던 곳.
“…….”
잠시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보았으나 당연하게도 천마는 없었다.
아무도 없는 헛헛한 공간.
두근.
유릭의 의사와 상관없이 심장이 묘하게 고동쳤다.
그 맥동을 따라 유릭이 정원에 꽂혀 있는 이솔렛으로 향했다.
“네가 부른 거냐?”
검에 입이 달린 것도 아니기에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유릭은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다시 이 공간에 불린 것은 눈앞에 이 검 탓이라고.
‘갑자기 왜?’
문제는 왜 갑자기 그러냐는 것.
이솔렛이 부른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왜 불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검에 입이 달린 것도 아니기에 그 이유를 추측하는 건 온전히 유릭의 몫이었다.
‘유화한테 검의 유래를 들어서?’
첫째로 생각나는 건 그 이유.
하지만 애매한 이유였다. 뭐 그렇게 대단한 유래라고 듣자마자 불러댄단 말인가?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유릭이 꽂혀 있는 이솔렛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네 과거를 들었다고 불렀냐? 내가 알면 안 되는 정보라도?”
그러나 검은 침묵할 뿐이다.
무슨 반응이라도 보여 달라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검신을 툭툭 찔러보지만, 이전처럼 유릭을 거부하는 냉기만 뿌려댈 뿐 특별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유릭이 하얗게 얼어붙은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손가락을 쪼아대는 까칠한 냉기를 보니 문득 오기가 들었다.
화륵!
그의 손이 염화신무의 불꽃에 싸이며 얼어붙은 손가락을 녹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이솔렛의 손잡이를 덥석 잡았다.
치이이이이익-!
그에 맞춰 이솔렛의 냉기가 더욱 강해졌다.
검이 피어 올리는 싸늘한 냉기가 유릭의 불꽃과 부딪치며 대량의 수증기가 터져 나왔다.
유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화룡검화 2중첩>.
한 겹의 불꽃을 더 덧씌우며 유릭이 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억지로 뽑아내려 해봐도 거절의 냉기만 더욱 솟아오를 뿐, 검이 뽑힐 기미는 전혀 없었다.
“여전하구나, 너.”
처음 봤을 때도 그랬듯, 이솔렛은 유릭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근래 엑셀레아의 힘으로 빙하설월의 기운을 조금씩 다루고는 있지만, 역시 유릭의 근원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서리 마나와 수백만 리 담장을 쌓은 듯한 그 파멸적인 재능 말이다.
대신 유릭은 화염 마나의 재능이 있었고, 반대로 그에게 없는 서리 마나의 재능은 쌍둥이 동생인 데릭이 가져갔다.
두 사람이 서로 짜기라도 한 듯 불과 얼음을 나눠 가졌고, 초대의 두 보물 역시 그렇게 나뉘었다.
염화신무는 자신에게.
이솔렛은 데릭에게.
‘…….’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과연 이게 초대가 원하던 그림이 맞는 것일까?
‘사실 자기처럼 불과 얼음을 모두 다루는 후손을 원하지 않았을까?’
만약 자신과 데릭이 쌍둥이가 아니라 한 명의 아이로 태어났다면, 초대처럼 불과 얼음의 재능을 모두 가지고 태어났을 텐데.
초대의 진전을 온전하게 이을 수 있는 그런 몸으로.
‘쯧, 쓸데없는 생각.’
유릭이 혀를 차며 잡생각을 모두 날려 버렸다.
‘만약’같은 가정은 이제 와선 하등 쓸모없는 것이다.
이미 자신과 데릭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일란성 쌍둥이라곤 하나 엄연히 별개의 인격체.
둘이 퓨전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초대처럼 불과 얼음의 재능을 모두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룡검화 3중첩>.
유릭이 검화를 더욱 덧씌웠다.
검이 발산하는 냉기도 그에 맞춰 올라간다.
수증기가 더욱 폭발하며, 이미 공간 전체를 가득 메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안개의 세계 속에서 있는 것이라곤 자신.
그리고 눈앞에 굳건히 꽂혀 있는 검 한 자루뿐.
“혹시.”
힘 싸움을 계속하며 유릭이 물었다.
두 번째 추측을.
“데릭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냐?”
그것도 분명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중 하나다.
이솔렛의 지금 주인은 그의 동생인 데릭 로스카.
이솔렛이 만약 데릭을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했고 그 주인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뭐라도 하려고 했을 터.
한 번 본 적이 있는 유릭을 불러 도움을 청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그때, 그의 질문에 답하듯.
-드륵.
바위에 꽂힌 검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