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04화
104화. 피는 통할지 몰라도
‘아하.’
유릭이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솔렛을 소환하는 능력이구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두 말이 된다.
특히 유화에게 들었던 이솔렛의 유래. 갑자기 하늘을 열고 나타났다고 했던.
그 자체가 검이 가진 능력 중 하나였던 것이다.
아마 공간을 격하는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겠지.
어쩌면 초대가 무림 세계에서 이 세계로 넘어온 것도 이솔렛의 힘이 아니었을까.
“큭……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데릭이 찌푸린 얼굴로 유릭에게 답을 구했다.
대답해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보다는.
“너 괜찮냐?”
데릭의 몸을 살피는 것이 먼저였다.
척 봐도 전신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특히 한쪽 팔뚝은 피멍이 들어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데릭 네가 왜 여기에?”
“아, 어머니, 윽…….”
그때 시야에 들어온 발렌티나의 모습에 데릭이 반사적으로 일어나려 하였다.
그러나 전신이 삐걱거려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곤 발렌티나의 얼굴이 굳었다.
“의술에 조예가 있는 자는 있느냐!”
명령 하나에 사람이 달라붙어 데릭의 부상을 치료했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응급처치뿐이었지만 그것만 해도 훨씬 나았다.
마나를 수련한 자는 자연 치유력 역시 일반인보다 높은 만큼,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악화되진 않으리라.
갑작스러운 데릭의 등장, 그것도 부상을 가진 모습에 여정이 잠시 중단됐다.
마차가 멈추고 기수가 말에게 물을 먹이러 간다.
붕대를 감고 편히 누운 데릭 옆에 발렌티나와 유릭이 자리했다.
“데릭이 나타난 것이 유릭의 능력이라는 건 이해했다. 유릭 역시 초대의 안배를 받았으니 아마 그 연장선이겠지.”
“유릭이 초대 님의 안배를 말입니까?”
처음 듣는 얘기에 데릭이 눈을 크게 떴다.
“기연관에서 초대의 불꽃을 얻었거든.”
유릭이 불을 피워 보여주려고 했지만 피식 김새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프로미넌스>의 부작용이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독학으로 익힌 화염술이 아니었던 건가…….”
“뭐 그렇지.”
그제야 유릭의 비정상적인 강함이 이해가 된다는 듯 데릭이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초대가 불꽃도 남겼다는 것도 놀랍긴 하지만 그보단 유릭의 강함의 비밀이 풀린 것이 더욱 컸다.
그때 얌전히 주억거리던 데릭이 눈을 번쩍 떴다.
“잠깐. 초대의 안배를 얻은 것은 알겠는데 왜 너냐.”
“뭐가?”
“소환 말이다! 이솔렛을 소환하는 능력이 왜 너한테 있어!”
“몰라. 어쩌다 보니.”
“이 자식…… 윽!”
남일처럼 으쓱이는 유릭에게 뭐라 하려던 중 가슴이 욱신거려 부여잡았다.
아니, 세상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초대의 검을 얻은 것은 분명 자신인데 그 검을 소환하는 능력은 유릭이 가지고 있다니?
‘심지어 나까지 딸려오잖아!’
거기다 검의 주인인 데릭도 검과 동일한 취급을 받는지 유릭의 소환에 덩달아 딸려온다.
그 말은 즉 유릭이 아무 때나 부르면 자신은 당장에 달려가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밥 먹을 때라든가 목욕이라도 하고 있을 때 부르면 대체 어떤 낭패를 당할는지!
“그렇게 남용은 못 하니까 안심해.”
데릭의 걱정을 읽었는지 유릭이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
지금의 그가 이솔렛과 데릭을 소환하기 위해선 <프로미넌스>를 써야 한다.
프로미넌스는 뛰어난 마법인 대신 한동안 불을 일으킬 수 없다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엑셀레아라는 보험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남발할 수 있는 마법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불만인 것은 아니다.
불러오는 것만 가능한 일방통행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공간이동이다.
관련 전공을 가진 마스터급의 마법사는 되어야 간신히 입문할 수 있는 게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이라고 하는데.
제한적으로나마 그걸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이점이란 말인가.
“끄응.”
유릭이 얘기하니 데릭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신음을 삼켰다.
기왕 얻은 능력을 지우라고 할 수도 없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절대 아무 때나 쓰지 말라고 단단히 다짐시키는 일뿐이었다.
그때.
“데릭.”
발렌티나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아, 네.”
데릭이 괜스레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
그 반응을 유릭이 의아하게 바라보았으나 당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이냐? 그 상처는 또 뭐고?”
“그것이…….”
데릭이 잠시 얘기하기 힘들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칼 같은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는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없는 사이를 틈타 아이작 형님이 숨어들었습니다.”
그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 * *
순식간에 사라진 데릭을 보며 아이작이 잠시 벙쪘다.
당혹스러운 사태에 그도 사태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데릭, 그리고 이솔렛을 놓쳐 버렸다는 것을.
‘젠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에 그의 얼굴이 뒤틀렸다.
칠색 마경을 회수한다는 1차 목적은 이뤘지만 이솔렛을 놓친 것은 너무나 아쉬웠다.
차라리 아예 데릭이 가문에 없었다면 모르겠는데 눈앞에서 놓치니 이보다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로즈 얘기를 하지 말고 그냥 검부터 뺏어서 달아나는 건데.
‘일단 나가자.’
짙은 미련이 남았지만 이러고 있을 수만도 없다.
이미 꽤나 시간이 지났다. 슬슬 엘린이 쫓아올 시간이니-
-챙! 채채채채챙!
그때, 별궁을 뒤덮고 있던 흑색 얼음의 새장이 단번에 깨져 나갔다.
와장창 깨진 얼음 조각이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아이작이 표정을 굳히며 당장 땅을 박차려 할 때.
“네 이노오오오오옴!”
“큭!”
콰아아아아앙-!
맹렬히 다가온 멧돼지와 같은 무언가가 아이작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간신히 팔을 들어 막아내었으나 그 충격까지 모두 흘릴 수 있던 건 아니었다.
데릭의 몸이 쭈우욱 옆으로 날아갔다.
“데릭을 어디로 데려갔느냐!!”
나타난 것은 웃통을 벗어 던져 우락부락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레오폴딘.
그는 수염이 거꾸로 솟을 정도로 분노하며 아이작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이봐, 영감. 내가 안 데려갔어. 지가 알아서 사라졌다구.”
“그 말을 믿으란 말이냐!”
“진짜라니까?”
아무리 마왕이 힘을 일깨웠다고 하더라도 레오폴딘은 방심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
아이작이 적당히 대꾸하며 천천히 도망칠 자세를 취하려 할 때.
“!”
-채앵!
반대쪽에서 쏘아진 정체 모를 검격이 아이작을 강타했다.
마왕의 힘이 깃든 검은 문양의 팔로 막긴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몸이 그대로 두 쪽이 나버렸을 것이다.
“알프레도 경…….”
그 검기의 정체는 알프레도 데번. 로스카의 제3기사단장이었다.
“오랜만이오, 공자.”
“경도 아직 팔팔하시군. 슬슬 은퇴하고 뒷방에 처박힐 때가 되지 않았나?”
알프레도가 대꾸 없이 아이작의 위아래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 완전히 잠식되진 않았구려. 걱정 마시오. 문양이 깃든 부분만 도려내면 괜찮을 것이니.”
“뭐? 문양은 내 몸의 절반을 덮고 있는데?”
아이작이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짓자 알프레도가 얼굴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적어도 절반은 인간으로서 죽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소.”
“이 노친네들이…….”
아이작이 몸을 숙였다.
레오폴딘 하나만 해도 까다로운데 알프레도까지 있다면 절대 싸울 수 없다.
정면으로 싸운다면 필패(必敗).
온전히 도주에 전념한다고 해도 붙잡힐 가능성이 절반은 되리라.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쿠구구구구구!
하늘에서 거대한, 얼음의 첨탑이 거꾸로 머리를 박은 채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엘린의 마법이다.
“……쉽지 않은데.”
가주가 없을 때를 노려 왔는데도 간단한 일이 없다.
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아이작이 초조하게 웃었다.
* * *
데릭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발렌티나는 가장 먼저 가문으로 급한 전령을 보냈다.
가문엔 엘린도 있고 레오폴딘도 있으니 아이작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하루빨리 데릭이 무사하단 사실을 알리는 것이 급했다.
그렇게 대략 일이 마무리되고.
데릭은 홀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즈 로스카…….’
데릭은 아이작이 침입한 사실을 알렸지만 그에게 들었던 그 말은 얘기하지 않았다.
이걸 얘기해도 좋은 것인지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작이 적당히 거짓을 말한 것이라면 너무나 실례가 되는 질문이다.
반대로 사실이라면…….
“데릭.”
“!”
그때 그를 부르며 유릭이 찾아왔다.
고민하던 내용이 내용인지라 데릭이 흠칫 놀랐다.
아까와 똑같은 반응에 유릭이 쓰게 웃었다.
“또 뭔 일인데.”
“뭐, 뭐가 말이냐.”
“또 무슨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니, 딱히…….”
“어머니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인다. 어딜 그냥 형도 아니고 쌍둥이 형을 속이려고.”
“……쯧. 겨우 몇 분 먼저 태어났다고 20년을 형 행세라니.”
“아무튼 뭔데. 말해봐.”
데릭이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혼자서 고민해 봤자 아무런 답도 내리지 못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유릭은, 인정하긴 싫지만, 의지가 되는 사내였다.
충분히 털어놓아도 괜찮을 상대.
“유릭. 로즈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
“로즈? 장미 말이야?”
“로즈 로스카. 우리의 누이다.”
“???”
너무나 당연한 반응을 보이는 유릭을 보며 데릭이 마음을 다잡았다.
그의 입에서 아이작에게 들은 누이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왔고.
“…….”
모두 들은 유릭 역시 데릭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 말, 진짜야?”
“형님은 진짜라고 얘기했다.”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적진 않은데. 이간질을 하는 걸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심술을 부리려고 그럴 수도 있고.”
“글쎄.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네 말대로 모두 연기였을지도 모르지. 지금쯤 날 비웃으며 킬킬대고 있을지도.”
거짓말일 가능성은 확실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건 반대로 말하면, 진실일 가능성 역시 존재한단 뜻이었다.
데릭 역시 여기까지 생각을 했고, 그랬기에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좋아.”
잠시 함께 고민하던 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러 가자.”
그의 말에 데릭이 깜짝 놀랐다.
“물어보자고? 어머니께?”
“그래. 물어보면 알겠지.”
“그렇게 간단히 생각해 볼 일이 아니지 않나?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고…….”
유릭은 그렇게 위험하다 생각하지 않았지만, 데릭이 걱정하는 것은 이해했다.
그는 레오폴딘에게 들은 바가 있었기에 어머니를 믿고 있지만 데릭은 그런 것이 없었으니.
‘하는 수 없지.’
유릭이 품속에 웅크리고 있는 메르를 툭툭 두드렸다.
‘메르, 다 들었지?’
-네, 네에……. 듣긴 했는데요.
‘혹시나 해서 말인데 여차할 때 나랑 이 녀석 데리고 튈 수 있지?’
-이 모습으론 힘든데.
‘당연히 본체로.’
-으응, 할 수 있냐 없냐로 따지면 할 수 있긴 해요. 어머님과 싸우는 건 무리지만 도망치는 정도라면…….
확답을 들은 유릭이 데릭에게 얘기했다.
“여차할 땐 데리고 도망가 줄 테니 걱정 마라.”
“뭐?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자세한 방법은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너 하나쯤은 데리고 튈 수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유릭이 탁탁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네가 무서워하는 것도 이해하고, 무서운 거랑 별개로 물어보기 힘든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결국은 물어봐야 해결될 일이야.”
“그건 그렇지만…….”
“그렇지만이고 뭐고 물어보러 가자고. 걱정 마라.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다는 건 진짜니까.”
만약 아이작의 말이 진실이고 정말로 어머니가 그런 악마 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데릭 하나 데리고 도망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고생하는 건 저잖아요!
‘부탁 좀 하자.’
물론 그 일은 온전히 메르의 일이었지만, 이미 유릭은 메르에게 전혀 거리낌이 없는 상태였다.
“가족이라고 해도 대화는 필요한 법이다. 피는 통할지 몰라도 말은 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아.”
그러니 일어나라고.
유릭이 데릭에게 손을 뻗었다.
잠시 그 손을 응시하던 데릭이,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붙잡았다.
유릭이 붙잡은 손을 끌어당겼고 데릭은 끄응, 소리를 내며 아픈 몸을 일으켰다.
‘로즈 로스카.’
월하무녀의 체질을 가지고 태어난 그의 또 하나의 누이.
‘그러고 보니 유화랑 얘기하던 중 끊겼었지.’
월하무녀라고 하니 자연스레 유화가 떠올랐다.
다만 잡담은 나중이다.
일어난 데릭을 이끌곤 유릭이 발렌티나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