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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108화 (108/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08화

108화. 베르넘

준비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챙길 것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엘린이 보내온 보석과 금화만 신경 써서 실으면 끝이었다.

하나 더 신경을 쓴 부분은 머리 색 정도.

과거 사막 왕국 카자르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색으로 염색을 한 그였다.

그때도 생각한 것이지만 머리만 따로 염색을 해줘도 꽤 정체를 숨길 수 있다.

현대처럼 사진이나 인터넷 따위가 발달한 세계도 아니었으니.

‘사막이라.’

염색된 머리를 보니 새삼 카자르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여행 준비를 하며 대륙에 대한 여러 정보를 수집하다 알게 된 것인데, 클레어가 샤니스의 세력에서 떨어져 나와 본격적으로 후계 다툼에 뛰어들었다 한다.

티르옌에서의 일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

그리고 그런 클레어를 처음으로 지지하고 나선 것이, 바로 그 카자르라고 했다.

아마도 자신들을 물 먹이려 했던 루카스에 대한 보복의 의미겠지.

‘샤니스가 아니라 클레어를 지지하고 나선 건 의외긴 한데.’

아마 외부 사람은 알지 못할 무언가의 계산이 있지 않았을까.

이미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는 샤니스보다 이제 막 세력을 일으키는 클레어 쪽에 붙는 게, 승산은 낮을지언정 얻는 것이 많으리라 판단했다든가.

뭐 자세한 속사정은 외부에 있는 유릭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하튼 그쪽도 바쁘구만.’

협정이 체결되어 로스카와 아칸의 전쟁은 휴전 상태가 되었지만 바쁜 것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이쪽은 로즈의 일로 여유가 없게 되었고, 저쪽은 외부의 전쟁이 멈춘 만큼 내부의 알력 다툼이 강해진 모양이고.

‘최종적으로는 아칸에 가야 할 텐데. 그전까진 정리가 좀 되려나.’

그가 이 정도로 아칸의 정보를 수집한 것은 단순한 흥미 본위는 아니었다.

3년을 계획한 이번 대륙행의 최종 목적지가 바로 아칸이기 때문.

불의 기운을 키우는 것이 목적인 그의 행보에 아칸은 빼놓고 싶어도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아칸이 섬기는 신은 대륙의 모든 불꽃의 시초라 불리는 존재.

그런 곳을 제쳐두고 다른 곳만 돌아봤자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래도 당장은 안 되고.’

라그룬이 자신을 노리고 있는 데다 루카스 역시 이를 갈며 벼르고 있을 것이다.

유릭의 경지인 7성 수준이면 대륙 어디에서도 무시 받을 수준은 아니지만, 라그룬과 루카스 앞에서 주름잡을 정도는 아니다.

갈 땐 가더라도 단단하고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리라.

‘그러니 일단은.’

그 준비도 할 겸, 처음으로 향할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대륙의 모든 물류와 정보를 쥐락펴락하는 10대 가문 중 하나, 황금가 골든하트.

그 골든하트의 일원 중 하나이자 유릭과도 연이 있었던 스카디 왕국에 가볼 생각이다.

어차피 대륙으로 내려가면서 거쳐 가는 곳인 데다, 여왕을 통해 쓸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가자, 글렌.”

“……예.”

준비를 마치고 얘기하니 글렌이 눈을 번뜩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 눈에 담긴 결연의 의지가 엿보인다.

녀석은 스카디 쪽에 자신의 정보원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그것을 밝혀낼 생각으로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이리라.

‘하여간 지는 건 싫어해가지고.’

아무래도 저번 스카디행에서 밝혀내지 못한 것에 무척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

그러거나 말거나, 유릭은 콧노래나 부르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오르기에 앞서.

발판을 밟은 발을 잠시 멈춘 유릭이 손바닥을 펼쳐 불꽃을 피어 올렸다.

이윽고 불꽃은 붉게 변하며 분노한 맹수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프로미넌스>.

핏빛 불꽃을 일으킨 유릭이 그 손으로 허공을 그었다.

콰지지지직!

하늘이 갈라지고 틈새가 열린다.

“헙!”

그리고 그 틈새로 데릭이 떨어졌다.

입에 빵을 물고 있는 것이 한창 식사 중이었던 모양이었다.

“나 간다, 인마.”

“……겨우 그거 때문에 밥 먹고 있는 사람을 부른 거냐?”

“겨우라니. 형이 3년이나 나가 있겠다는데 배웅도 안 하고 말이야.”

유릭이 프로미넌스의 불꽃을 흩어내며 피식 웃었다.

좋아, 이솔렛 -이랑 데릭- 의 소환도 잘 되는군.

“하아…… 그래, 잘 다녀와라. 무운을 빌지.”

“고맙다. 뭔 일 있으면 부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하다못해 전조라도 좀 있었으면 좋겠군.”

한껏 찌푸리며 빵을 우물거리는 데릭에게 손을 흔들곤 유릭이 진짜로 마차에 올랐다.

마차 벽을 툭툭 노크하니 마부석에 앉은 글렌이 채찍을 내리쳤다.

‘다녀오겠습니다.’

겨울성의 모습이 점점 멀어진다.

차디찬 고향의 땅을 일별하며 그가 등받이 깊이 몸을 묻었다.

* * *

“국경 쪽의 일은 조사가 끝났나요?”

알현실에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10살은 넘었을까 싶은 짙은 분홍빛 머리의 아이.

스카디 왕국의 리헨델 왕자였다.

“예, 저하. 평소 때와 다름없이 끝났다고 하옵니다. 오히려 올해는 작년보다 규모가 조금 줄었다고 하는군요.”

“줄은 이유는 작년 토벌 덕분인가요?”

“맞습니다. 그때 남작의 강권으로 조금 더 깊숙이 토벌을 진행한 것이 좋은 결과로 돌아온 듯합니다. 남작의 용기가 병사들을 구한 것이지요.”

“남작에겐 상을 내려야겠군요.”

“남작에게 물욕이 있는 것은 아니나 저하께서 알아봐 주신 것에 무척 기뻐할 겁니다.”

신하가 깊숙이 허리를 숙이곤 알현실을 떠났다.

알현실에 왕자는 혼자 남은 듯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의 뒤쪽에 팔랑거리는 커튼 뒤에, 왕비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어떤가요? 지금 건 잘 대응한 것인가요?”

“무척 늠름한 모습이었습니다, 왕자. 하지만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네? 어디가요?”

“너무 성급히 상을 내리겠다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작년 남작은 무리하게 토벌을 강행하여 큰 피해를 내었지요. 그 성과가 정말로 올해에 돌아온 것이 맞다면 상을 내려도 좋겠으나,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따끔히 질책해야 하겠지요.”

“그,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하지요?”

“글쎄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끄응거리며 왕자가 고민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미레유 왕비는 대견한 얼굴로, 한편으론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직은 실컷 뛰놀고 목검을 휘두르며 다닐 어린 나이인데.

그러나 사정이 사정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잠잠하다고 하나 언제 또 왕제(王弟) 크라우 공작이 왕위를 노리려 들지 모른다.

가능하면 빨리 국정을 보는 법을 익혀, 성인이 되는 즉시 정식으로 왕위를 받아야 했다.

“으음, 으음……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상을 내린다고 하였으니 그 말을 무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남작의 용기를 칭찬하기 위한 상을 내리되, 지나치게 무모함은 몸을 망친다는 뜻을 담는 겁니다.”

“좋은 방법이군요. 본디 사람의 혀는 하나인 듯해도 둘로 갈라져 있는 법. 같은 말일지라도 다른 뜻이 담길 수도 있지요. 그럼 구체적인 방법은 어미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 저, 그럼, 오늘은 이걸로 끝이지요?!”

리헨델 왕자가 눈을 빛냈다.

오늘의 알현은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이 더 남아 있으나, 그 사람은 리헨델 왕자가 목을 빼며 기다리던 그 사람이었다.

나이다운 어린아이의 눈으로 반짝이는 왕자를 보며 미레유 왕비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끝이라니요.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후후.”

“유릭 공자는 일 때문에 만나러 온 게 아니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만요.”

미레유 왕비가 웃으며 시종을 불러 다음 사람을 들여보내라 하였다.

곧이어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검은 머리의 유릭과 그를 수행하는 글렌이 또각또각 걸어 들어왔다.

* * *

오랜만에 만나는 리헨델 왕자는 제법 자라있었다.

물론 아직 작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꽤나 관록이 붙은 모습.

아무래도 크라우 공작이 주춤한 이때 왕비가 최대한 교육을 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비 전하, 왕자 저하.”

유릭이 예법에 따라 정중히 인사를 하였고 그런 유릭에게 리헨델 왕자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공자! 오랜만이에요!”

“저하. 체통을 지키셔야 하지 않습니까.”

“일하는 자리도 아닌데 뭐 어때요!”

유릭이 곤란한 듯 미레유 왕비를 바라보았으나 왕비도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평소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어려운 교육만 받고 있는 왕자다.

이럴 때만이라도 편하게 해줄 생각인 그녀였다.

“글렌 경도 오랜만이에요. 어? 키가 살짝 작아지지 않았어요?”

“……저하께서 조금 자라신 겁니다.”

“아하하.”

붙임성도 없는 글렌에게도 쉬이 농을 던지는 모습을 보니 여간 넉살이 좋지 않았다.

잘 지내고 있는 듯 보여 유릭이 피식 웃었다.

회귀 전에는 진작 암살당해 죽었을 터인 왕자가 이렇게 웃는 것을 보니, 그도 나름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왕비 전하. 훈장의 건은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계셨다면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문득 생각이 나 물어보니 왕비가 장난스레 웃었다.

“그야 놀라라고 그랬으니까요. 애초에 저를 속이려 한 공자가 나쁜 것이 아닙니까.”

“그건…… 면목 없습니다. 아무래도 조심하려다 보니.”

“그래 보입니다.”

왕비가 유릭의 검은 머리를 보며 대답했다.

그녀 역시 로스카라는 이름의 무게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신분 정도는 속이고 다니겠지.

저 검게 염색한 머리도 같은 의미일 터.

“오늘은 어떤 일이신가요. 왕자랑 놀아주러 오신 건가요?”

“정말인가요, 공자!?”

“대륙으로 나갈 일이 있어 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물론 저하와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러 왔지요.”

리헨델 왕자가 기뻐하며 유릭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유릭이 쓴웃음을 지으며 왕자의 몸을 받아주었다. 행여나 바지가 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리곤, 왕비에게 물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한껏 흥분 상태인 왕자와 다르게 미레유 왕비는 단번에 눈치챘다.

이 한 가지 질문이 바로 로스카의 직계가 비밀리에 스카디에 행차한 이유라고.

“제가 알려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베르넘에서 검술 대전(大典)이 열린다고 들었는데요.”

흑철검가 베르넘.

대륙의 10대 가문 중 하나로 오로지 검술 하나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위대한 검술명가.

동시에 과거 제국이 건재하던 시절, 누구보다도 황가에 충성을 바쳤던 기사의 가문이기도 했다.

그 베르넘에서 검술 대전을 연다고 한다.

전쟁을 뜻하는 대전이 아닌 큰 행사나 축제 등을 뜻하는 의미의 대전(大典).

대륙의 수많은 검사를 초빙하여 치르는 모든 검사를 위한 축제였다.

‘물론 먹고 마시는 축제는 아니지만.’

모든 검사들을 위한 축제가 그런 평범한 축제일 리가 없다.

당연하게도 술과 음식이 아닌, 칼부림이 메인인 축제였다.

“그랬죠. 베르넘의 연례행사잖아요.”

왕비도 물론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 대전 자체야 매년 치르는 것이고, 또 이미 대륙 곳곳에 베르넘의 초청장이 전달된 후이다.

황금가의 일원인 스카디의 왕비가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이번 우승 상품으로 베르넘이 보관 중인 보물 하나를 내어준다고 들었는데.”

“그런 소리가 들리긴 했지요. 아직 확정인 것은 아닙니다만.”

“베른넘은 제국이 망할 때 황실의 보물 일부를 회수하기도 했었지요.”

“그랬죠.”

그곳에서 우승하면 베르넘이 보유한 영약 중 하나를 얻을 수 있다.

개중엔 옛 제국의 비고에 있던 물건들도 있겠지.

유릭이 알고 싶은 것은 하나였다.

“혹시 베르넘의 비고에 불도마뱀의 심장이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세상에 단 하나, 제국의 비고에 잠들어 있었다던 불도마뱀의 심장.

그것을 베르넘이 회수했는지 아닌지 알고 싶었다.

* * *

저벅.

갈색 로브를 두른 마법사가 연병장의 모래를 밟았다.

그곳에 있던 것은 천천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옅은 금발을 가진 중년의 기사.

마법사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공손히 얘기했다.

“각하께서 입궁하라 하십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한창 검을 휘두르던 기사가 천천히 페이스를 늦추며 땀을 식혔다.

마법사가 눈치 좋게 가져다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기사, 엘가이아가 대답했다.

“곧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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