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11화
111화. 단순무식한 성격
불도마뱀의 심장을 얻기 위해서는 검술 대전에서 우승해야 한다.
검술 대전은 매번 다른 형식으로 치러지곤 했다.
어떨 땐 평범한 무투회같이 치러지기도 했고, 어떨 땐 검술 이론에 대해 논의하는 세미나 같은 형식으로 치러진 적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번 검술 대전의 방식은, 마경 안에서 치르는 서바이벌이라 한다.
‘알기 쉽게 1등을 가릴 수 있는 방식이군.’
이런 형식으로 치르는 이유는 명백했다.
베르넘은 신검의 주인이 이번 검술 대전에서 누구보다 눈에 띄기를 바라는 것이다.
‘신검의 주인이라 하면 황족의 핏줄일 테니까.’
황가의 직계는 글렌이 마지막이지만 그것이 황가의 모든 핏줄이 끊겼다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황제를 포함해 당시 황족들은 방탕하기로 소문났던 놈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사생아 몇 명쯤 만들어 숨겨두었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베르넘이 찾은 이도 그런 사생아 중 하나겠지.
비록 황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일지 몰라도, 그 몸에 테메레르 대왕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베르넘은 만인의 앞에서 신검의 주인을 보여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제국의 시초, 마신을 물리친 테메레르 대왕의 인기는 아직도 독보적이었으니까.
‘유일하게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이니.’
역사 속엔 수많은 위인과 명장, 호걸 등이 존재하나, 대륙이 입을 모아 ‘영웅’이라 부르는 이는 오직 한 명.
건국제 테메레르뿐이었다.
“쳇, 언제적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건지.”
글렌은 그런 도시의 분위기를 탐탁지 않아 했다.
그는 테메레르 대왕의 명성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라고 생각했다.
천 년이나 지난 기록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단 말인가.
테메레르 대왕의 일대기를 기록한 문서들은 너무나도 오래된 것들뿐이었고, 지나치게 허무맹랑한 것들이 많았다.
섬마을을 침략한 마족을 처치하러 가야 하는데 배가 없어 곤란해하던 때, 바닷물이 알아서 갈라져 길을 터줬단 일화라든가 그런 동화 같은 것들.
그런 일화를 들을 때마다 글렌은 항상 코웃음을 치곤 했었다.
“그런 거짓부렁을 철석같이 믿고 떠받들다니,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너무 그러지 마라. 믿는다고 벌 받는 것도 아니잖아?”
“역사란 건 절대적이지 않다. 승자의 입맛따라 쓰인 기록을 철석같이 믿는 게 옳단 말이냐?”
“옳다고는 안 하겠지만 적어도 네 말에 한 가지 진실은 있네.”
“진실?”
“이겼다는 거.”
역사 속 기록이 모두 진실이라고는 안 하겠지만, 적어도 승리했다는 것 하나만큼은 진실이 아니겠는가.
그것 하나만큼은 충분히 평가할 만한 일이다.
“…….”
“신검은 광장에 있다고 했었나?”
말이 없어진 글렌을 두고 유릭이 화제를 돌렸다.
“도시의 중심부다.”
베르넘의 영지에 와본 것은 처음이지만 신검이 도시의 중앙에 꽂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우글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치며 두 사람이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검을 뽑아 보이면 눈에 확 띄겠군.”
“베르넘도 그걸 노리고 있는 거겠지.”
신검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은밀한 소문.
그 소문을 흘리고 있는 것이 베르넘이란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번 검술 대전이 그 주인을 띄워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무슨 사교계 데뷔도 아니고.’
나이가 찬 귀족가의 자제는 보통 가문에서 여는 파티를 통해 사교계에 데뷔한다.
파티를 여는 명목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실제로는 오로지 데뷔하는 아이를 띄워주기 위한 파티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베르넘은 신검의 주인을 검술 대전을 통해 세상에 데뷔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승 상품으로 아무 영약이나 내준다고 통 크게 걸었지.’
검술 대전은 본디 매년 하는 행사로, 당연하지만 연례행사에 꼬박꼬박 영약을 내걸 리가 없었다.
이번이 지나치게 특수한 상황인 것.
유릭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이번 검술 대전은 준비된 무대라는 건데.’
베르넘이 신검의 주인을 공개해 세상에 다시금 테메레르 대왕의 핏줄을 알리기 위한 무대.
실제로 회귀 전에는 그 의도가 잘 먹혀들었다.
테메레르 대왕이 남긴 신검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소문과 더불어, 그 주인이 검술 대전에서 우승했다는 소문은 파급력이 대단했으니까.
‘그럼 안 되지.’
신검의 주인이라는 남자와 판을 짠 베르넘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검술 대전은 자신이 우승해야 한다.
그들이 보관하고 있을 제국의 보물 중 하나인 불도마뱀의 심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윽고 두 사람은 신검이 꽂혀 있는 중앙 광장에 도착했고.
-흐아아아아아압!
-야, 안 되니까 그만 내려와라!
-나도 못 뽑았는데 네가 되겠냐?
-시끄러 이 자식들아! 크아아아아아아!
검을 뽑으려 낑낑거리고 있는 근육질의 남자와 킬킬거리는 구경꾼들을 볼 수 있었다.
* * *
근육질의 사내가 바위에 꽂힌 검 한 자루에 끙끙거리고 있었다.
덩치만 보면 쑤욱 뽑을 것 같은데, 땀을 뻘뻘 흘리고 근육이 바들거릴 정도로 힘을 줘도 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사내의 동료들이 킬킬거리며 비웃고 있었고, 베르넘의 주민들은 항상 보는 광경이라는 듯 끄덕거리며 지나갔다.
-하아!
이윽고 사내가 포기하고 내려왔다.
동료들에게 돌아간 그는 부끄러운 듯이 툴툴대며 동료들과 함께 떠나갔다.
그 뒤로도 몇이나 되는 사람들이 바위의 검에 도전했다.
첫 사내처럼 거친 용병도 있었고 번쩍이는 갑옷을 갖춰 입은 기사도 있었다.
심지어 정갈하게 차려입은 귀족도 몇몇 있었다.
‘베르넘에서 초청한 가문의 사람들인가 보군.’
대륙 최고의 검술명가인 베르넘은, 다른 검술로 유명한 가문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가문들에게 검술 대전 때마다 초청장을 보내곤 한다.
이번에도 물론 그렇게 했겠지.
오히려 이번엔 평소보다 많은 가문에 보냈을지도 모른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신검의 주인을 보여주고 싶을 테니까.
그렇게 몇몇 사람이 도전했다 내려오는 걸 구경하다, 유릭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나도 한번 해봐?”
“아서라. 안 되는 걸 알면서 뭘 힘을 빼냐.”
유릭이 얘기하니 글렌이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말리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글렌의 만류에도 유릭은 검을 뽑아보겠다며 줄을 섰다.
무슨 롤러코스터를 기다리는 줄도 아니고, 신검을 뽑아보겠다고 모여든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이윽고 유릭의 차례가 되어 한번 쥐어보았으나.
“안 되는군.”
곧바로 그는 입맛을 다시며 내려와야 했다.
유릭이 아무리 힘을 줘도 바위에 꽂힌 신검 라엘라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초대의 공간 속에 꽂혀 있는 이솔렛 같았다.
그나마 그 이솔렛은 지금은 조금씩 달그락거리긴 하지만, 라엘라는 그런 미동조차 없었다.
“라엘라를 뽑으려면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 자격엔 ‘테메레르 대왕의 핏줄일 것’이라는 항목이 들어 있고. 될 리가 없잖냐.”
“넌 안 해보냐.”
핀잔을 주는 글렌에게 유릭이 얘기했다.
“난 안 해.”
“왜, 한번 해보지. 넌 핏줄은 확실하잖아.”
“대왕의 핏줄이라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뽑히면 뽑히는 대로 문제잖아.”
“문제 될 게 뭐가 있어. 좋기만 하지.”
“내가 정말 뽑기라도 하면 베르넘이 귀찮게 굴 거 아니냐.”
“그렇게 되면 플랜B로 가면 돼.”
“플랜B?”
“널 넘기고 불도마뱀의 심장을 달라고 하는 계획.”
“절대 안 뽑아!”
찌푸리며 소리치는 글렌을 두고 유릭이 돌아가자며 손짓했다.
신검도 구경했고 검술 대전에 참가할 이들의 면면도 보았으니 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신검의 주인처럼 보이는 남자는 없었지만.’
상관없다.
회귀 전 들었던 소문으론 절대 조용히 있을 남자가 아니다.
검술 대전까지 앞으로 며칠이나 남았으니, 그 안엔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터.
‘결국 최대 경쟁자는 그놈이니까.’
회귀 전 대전에서 우승한 놈이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라고 할 수 있겠지.
그 말은 즉.
‘그 남자만 꺾으면 우승이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 * *
며칠 동안 유릭은 정보 수집에 힘썼다.
검술 대전이 치러지는 마경에 대한 것이나 우승이 유력한 참가자들은 있는지, 그 외에 베르넘의 기본적인 평판이나 최근 행보 같은 것들.
도시를 반으로 나눠 동쪽은 유릭이, 그리고 서쪽은 글렌이 맡아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다.
동시에 유릭은 베르넘이 찾아낸 신검의 주인에 대해서도 같이 수소문했다.
‘카를 클라인.’
얼굴은 모르지만 어느 정도 정보는 가지고 있다.
이름이 카를 클라인이라는 것, 외형은 무척 단단한 인상에 짧게 친 잿빛 머리.
그리고 성격적인 특징은…….
‘눈에 띌 만한 녀석인데.’
여러 의미로 제법 눈에 띄는 성격이라 하였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절대 어딘가에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그런 성격은 아니다.
-아니, 당신 미쳤어?
-미쳤다니 말이 심하군. 나는 그저 언쟁이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심플하게 결투로 승부를 보자고 했을 뿐이다만.
그때, 한창 도시를 탐색하던 유릭의 귀에 작은 소란 하나가 포착되었다.
‘결투’라는 단어에서 무언가를 직감한 유릭이 당장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과일 좌판을 깔고 있는 과일상과 한 잿빛 머리의 사내가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내가 졌다, 졌어! 바가지 씌우려고 했던 건 사과할 테니까 가져가! 가져가라고!”
“포기가 너무 빠른 것이 아닌가? 그 허리춤에 있는 검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가. 이럴 때야말로 자신 있게 뽑아서 스스로를 증명할 때가 아닌가?”
“장사해야 하는데 뭔 결투야. 이제 그만하고 좀 가라!”
“그럼 그만할지 말지 결투로 결정…….”
“꺼져!”
거부하는 상인에게 돈을 돌려받은 후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바가지 썼던 돈을 돌려받은 것인데 기뻐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다.
유릭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소문대로 심각한 결투 중독이로군.’
짧게 친 잿빛 머리에 단단한 강철 같은 외모.
복잡한 언쟁이나 머리 아픈 말다툼이 오갈 것 같으면, 잘 모르겠으니 결투로 해결하자고 하는 단순무식한 성격.
소문으로 들었던 카를 클라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 * *
검술 대전의 소식으로 베르넘에는 다양한 검사들이 잔뜩 모이게 되었다.
짧은 검을 쓰든 긴 검을 쓰든, 무거운 검을 쓰든 가벼운 검을 쓰든.
그들 모두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상처를 달고 사는 직종이라는 것.
고품질의 고약으로 유명한 루벨라에서 물건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한 상인은 그 덕에 매일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검사들이 모인 이 도시에서 성능 좋은 상처약의 수요는 무한대에 가깝다.
부피도 작고 가벼운 고약으로 이 정도 이익을 내었으니, 이번 행상은 완전히 대박이었다.
그때였다.
한 금발의 기사가 손님으로 찾아온 것은.
“루벨라산 고약인가. 품질이 좋아 보이는군. 하나 주게.”
“아이고 손님, 바로 싸드리겠습니다.”
흥얼거리며 포장하는 상인의 뒤로 손님이 지나가는 듯 물었다.
“주인장, 이곳으로 오면서 고용했던 호위 중에 A급의 젊은 용병이 있다던데.”
상인의 손이 잠시 멈췄다.
세상 얘기라도 하는 듯한 어조였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상인은 이 질문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대번에 눈치챘다.
“글쎄요…….”
포장한 고약을 건네며 상인이 손님의 위아래를 빠르게 훑었다.
그 눈이 특히 오래 머문 것은 손님이 차고 있는 검에서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좀 더 뻗대면서 은화라도 좀 뽑아볼까? 아니면 저 검이 번뜩이기 전에 바로 굽실거려야 할까?
딱.
그 고민을 해결해 주겠다는 듯 사내가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내려놓았다.
겨우 고약 한 통분이라기엔 지나치게 커다란 금액.
“아이고, 맞습니다. 이름이 뭐였더라, 유진이라던가? 20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놈이었죠. 처음엔 어려서 좀 미덥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A급 용병이라고 하더군요. 실력이 대단한 놈이었습니다. 검술 대전에 참가하러 왔다고 하던데-”
잽싸게 금화를 소매에 넣으며 상인이 묻지도 않은 말까지 나불나불 지껄였고.
“그거면 됐네.”
사내, 엘가이아가 만족하며 몸을 돌려 떠났다.
혼자 남은 상인만이 이게 웬 떡이냐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