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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112화 (112/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12화

112화. 첫 단추

“꺼져!”

상인이 던지는 돈을 받으며 카를이 쩝 입맛을 다셨다.

과일을 파는 상인이라고 하지만 덩치나 발달된 근육을 보면 검깨나 쓰는 남자 같은데.

괜찮은 결투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나 보다.

“카를 님. 너무 눈에 띄는 일은 삼가주십시오.”

그때 작게 한숨을 쉬며 카를에게 다가오는 여인이 있었다.

가벼운 경장에 허리춤엔 얇은 세검.

밤하늘을 닮은 짙푸른 남색 머리의 그녀를 보곤 방금까지 성을 내던 상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마, 마야 아가씨? 아시는 분입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 중에 그녀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마야 베르넘.

흑철검가 베르넘의 여식이자 검가의 비전인 <검은 별>을 계승한 이.

베르넘의 검은 별은 일인전승의 비전으로 알려져 있어, 그걸 계승했다는 것은 그녀가 베르넘의 후계자라는 뜻이기도 했다.

“…….”

그 마야가 말없이 상인을 째릿 노려보았다.

방금까지 카를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던 상인은 새파란 얼굴로 몸을 벌벌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부, 부디 한 번만 용서를!”

“일일이 나무랄 생각은 없습니다만, 부디 양심껏 장사하세요. 만약 양심을 팔아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렵다면 그전에 가문에 문의하시길.”

“예, 옛!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상인의 뻣뻣한 인사를 받으며 마야가 카를을 끌고 자리를 떴다.

어느 정도 걸은 후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며칠 후면 대중의 앞에서 검을 뽑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때까지 눈에 띄는 일은 삼가주세요.”

“가는데 사과가 맛있어 보여서 한 봉지 샀다. 너도 들어라.”

“제 말 듣고…… 하아…… 아닙니다.”

“듣고 있다, 듣고 있어. 그런데 그 검은 꼭 뽑아야 되나? 얄쌍하게 생긴 게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더만.”

마야는 카를이 자신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음을 알았다.

신검이 가지는 의미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렇게 설명을 했건만.

그녀가 한숨을 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됐으니 잔말 말고 따라오시지요. 사과 봉지는 좀 놓고요. 여봐라! 누가 와서 좀 받아가거라!”

그녀의 명령에 그들을 수행하던 종자 중 하나가 다가와 카를에게서 사과 봉지를 받아갔다.

미련 넘치는 표정으로 봉지를 보던 카를은 기어코 사과 두 개는 꺼내 들고 남은 봉지만 건넸다.

그중 하나를 마야에게 건넸고, 마야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과를 받아들었다.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경향은 있어도 사람은 착하다니까.

그때.

“응?”

카를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홱 고개를 돌렸다.

그의 동공이 어두운 밤의 맹수처럼 좁혀지며 시야에 비치는 모든 것들을 상세히 훑었다.

갑작스레 살기를 피어 올리는 그를 보곤 마야가 깜짝 놀랐다.

“카를 님?”

“쉿.”

카를이 마야를 제지하곤 잠시 조용히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평범한 인파뿐, 수상한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시선이 느껴졌는데.”

그가 입맛을 다시며 얘기하자 마야가 어이없다는 듯 얘기했다.

“그야 그리도 소란을 피웠으니 누가 쳐다볼 만도 하겠죠.”

“그런가?”

“얼른 가시지요. 검을 뽑기 전까진 최대한 카를 님의 존재는 숨기는 것이 좋습니다.”

“음.”

마야가 다소 억지로 카를을 붙잡고 끌고 갔다.

끌려가는 카를은 시종일관 영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누가 보고 있었는데.

* * *

방금까지 카를이 살폈던 장소.

골목길의 그늘에서 유릭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감도 좋군.’

-굳이 숨을 필요가 있었어요?

‘아니, 그냥. 습관적으로.’

쫓아오니까 도망치는 그런 느낌으로 반사적으로 숨어버렸다.

숨어서 나쁠 것도 없으니 결과적으론 좋은 선택……이었다고 믿는다.

메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가슴팍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저 남자가 검가에서 내세우는 신검의 주인인가요?

육포 하나를 꺼내주니 메르가 눈을 빛내며 덥석 물었다.

‘카를 클라인. 신검 라엘라를 뽑을 녀석이다.’

-정말 뽑을 수 있는 거예요? 괜히 호들갑 떠는 게 아니라?

‘응. 검가에서도 이미 확인했을걸.’

아마 카를이 신검을 뽑을 수 있단 사실은 이미 확인이 끝난 후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귀중한 영약까지 내걸면서까지 대대적으로 사람을 모을 이유가 없다.

이미 모든 판을 짜놓았고, 앞으론 시행만 하면 되는 단계겠지.

-옆에 있는 여자는요?

‘마야 베르넘 같아.’

회귀 전 소문에서는 카를의 옆에는 항상 베르넘의 흑기사 중 한 명이 따라다닌다 하였다.

그 이름이 마야 베르넘.

일인전승의 비전으로 알려진 베르넘의 검은 별을 익힌 명실공히 검가의 후계자다.

‘아마 저 여자도 검술 대전에 참가할 거야.’

-그래도 돼요? 주최 측이 참가하면 안 되잖아요.

‘꼭 그러란 법은 없지. 특히 이번 검술 대전은 규정이 많이 느슨하니까.’

올해 검술 대전의 규정은 진작 공개되었다.

베르넘의 인근에 위치한 마경에서 펼쳐지는 서바이벌.

무엇을 해도 좋다.

다른 참가자들과 일시적인 팀을 이뤄도 좋고, 남들이 싸우고 있는 곳에 난입하여 이득을 봐도 좋다.

물론 정정당당히 스스로의 힘을 믿고 정공법으로 풀어나가도 괜찮다.

뭘 하든 간에 최후까지 서 있는 자가 승자.

금지된 것이라곤 살인은 안 된다는 점과 검을 제외한 다른 무기를 쓰지 말라는 것 정도.

올해의 규정이 이렇다는 건, 그만큼 베르넘이 진심이란 뜻이었다.

‘마야뿐만 아니라 다른 베르넘의 검사들도 참가하겠지. 아마 자기들끼리는 싸우지 않고 카를을 1등으로 만들려고 움직일 테고.’

-네에? 그건 진짜 비겁하지 않아요?

‘애초에 개인으로 참가하는 경우가 거의 없을 거야. 그냥 단체전이라고 생각해.’

같은 가문끼리, 같은 기사단끼리, 혹은 같은 용병단끼리.

이미 뭉칠 놈은 진작 뭉치고 있었다.

요 며칠 유릭이 조사하러 다닌 것 중엔 그런 팀 관계를 알아보려 다닌 것도 있었다.

-괜히 영약을 내건 게 아니네요. 애초부터 안 줄 생각이었네.

‘손해 보는 장사는 싫을 테니까.’

영약을 미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정작 그 영약은 본인들이 다시 회수한다.

영약도 소비하지 않고 카를의 이름을 알리며 검술 대전을 성황리에 끝마칠 수 있는 계획.

베르넘의 입장에선 이보다 완벽할 수 없는 계획이다.

물론 특별히 유릭만 간파한 것은 아니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다 알면서 도전하는 거지.’

만에 하나 베르넘을 뚫고 우승을 한다면 그들의 영약을 하나 받아올 수 있으니까.

아무리 불리하다 할지라도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어르신네는 몇 명이에요. 그 하인 놈이랑 둘?

메르는 글렌을 하인 놈이라 부르고 있었다.

본인이 알았다간 크게 분개할 호칭이었지만 어차피 글렌은 메르가 드래곤이란 사실을 모르니까.

‘셋이야.’

-왜 셋이에요? 아, 그 소환 능력으로 동생분을 불러오시려고요?

유릭이 고개를 저었다.

‘데릭은 혹시 모를 때를 위한 비장의 카드로 쓸 거다. 미리 불러서 정식 참가자로 등록할 필요는 없어.’

처음부터 세 명의 참가자로 등록하는 것과 도중에 몰래 한 사람이 추가되는 것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전자는 안정적이지만 후자는 만에 하나의 변수를 끌어낼 수 있다.

만약 유릭의 목표가 ‘3등 안에 들기’ 뭐 이런 것이었다면 전자를 택했겠지만 그렇지 않다.

무조건 1등을 노려야 하는 상황에선 변수가 더욱 중요하다.

-? 그러면 누구누군데요?

‘나랑 글렌, 그리고 너.’

-……네?

‘마지막 팀원은 너다.’

-어, 어어…… 저는 고행 중이라 사람으로는 못 변하는데요? 사람으로 폴리모프하려면 한 번은 다시 본체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냥 그 모습이어도 상관없어. 아니, 그 모습인 쪽이 좋아.’

메르도 팀이라고 해서 메르의 이름을 정식 선수로 등록할 생각은 아니다.

그냥 경기를 치를 때 같이 데려갈 뿐.

지금 모습의 메르가 쓸 수 있는 마법은 정말 소소한 것들뿐이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실낱과도 같은 균형을 유지하는 전투에선 작은 돌멩이 하나로도 확 승세가 기울곤 하니까.

‘거기다 애초에 큰 마법은 쓸 수도 없어.’

검술 대전인 만큼 마법은 사용해선 안 된다는 규정이다.

쓸 수 있는 것은 검술뿐.

물론 고도로 발달된 오러는 마법과 차이가 없다고, 매년 검술 대전에선 마법전을 방불케 하는 장면이 펼쳐진다고는 한다.

하지만 어쨌든 원칙적으로 마법은 금지.

그러니까 메르가 할 일은.

‘안 들키게 조용히. 알겠지?’

들키지 않게 마법을 쓰는 일.

굳이 사람으로 폴리모프하여 눈에 띌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제 보니 제일 비겁한 건 어르신이었네요.

‘뭐가?’

-적어도 저쪽은 룰 안에서 술수를 부리잖아요! 어르신은 시작도 전부터 반칙할 생각만 가득하고!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최선을 다한다고 해라, 어? 영약이 장난이야?’

하지만 이번 우승엔 많은 것이 걸려 있다.

비겁이고 뭐고 유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불도마뱀의 심장을 얻어가야 한다.

다행히 승산은 낮지 않다.

자신과 똑같이 영약을 노리는 수많은 하이에나들.

카를을 1위로 만들기 위해 암약할 마야와 베르넘의 검사들.

그리고 신검을 들고 참가할 카를 클라인.

장애물은 수없이 많지만, 해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야 결국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일 센 놈이 이기는 법이니까.’

강한 자가 살아남게 되어 있으니까.

* * *

중앙 광장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있었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이 신검을 뽑으려다 실패했으나 그보다 더 많은 새로운 도전자들이 몰렸다.

“또 신입들 오는 거 봐라.”

“그래 봤자 안 될 텐데.”

이미 도전했다 깨진 이들은 마음 편히 술을 홀짝이며 그들을 구경했다.

이제는 평범한 일상의 광경처럼 된 장면이었다.

그랬던 분위기가 바뀐 것은, 카를이 검에 손을 댄 직후였다.

우우웅-

검이 울린다.

동시에 검이 꽂힌 바위틈에서 조금씩,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요 며칠 변화 하나 없던 검이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 사실은 단숨에 모두의 시선을 끌었고.

“흡!”

카를이 신검을 양손으로 잡더니, 숨을 멈추고 단숨에 들어 올렸다.

그러자 검이 뽑혀 나왔다.

지금껏 수백의 사람들이 도전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신검 라엘라가.

새하얀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광장 전역을 가득 덮었다.

“오…….”

“세상에……!”

빛의 신검 라엘라.

옛 영웅 테메레르 대왕의 애검이 새로운 주인을 찾았다.

구경꾼들의 눈엔 신검의 빛에 휩싸인 카를이 그야말로 영웅의 재림처럼 보였고, 역사적 순간을 목격했단 사실에 환호했다.

하지만.

단순히 환호만 하는 그들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만감이 교차하고 있음을.

‘저 남자가 베르넘이 내정해 놓은 우승자란 말이지?’

‘신검은 어차피 내 것도 아니고 관심 없다. 중요한 건 우승 상품인 영약이야.’

영약을 얻어 가문의 세를 더욱 키우려는 다른 검술 가문의 귀족들.

혹은 입신양명이나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유기사와 용병들.

‘지켜봐 주십시오, 할아버님. 카를 님은 반드시 새로운 제국을 다시 일으킬 것입니다. 부패하고 썩어빠진 나라가 아닌, 진정으로 대왕의 의지를 받드는 그런 나라를.’

그 가슴에 웅심을 품고 있는 마야 베르넘.

그때가 되면 지금 이 순간은 카를의 진정한 여정이 시작된 역사적 순간으로 남으리라.

검술 대전의 우승은 그런 카를의 앞길을 닦아줄 좋은 거름이 되리라.

마야는 그리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저게…….’

멀리 떨어진 구역에서 글렌은 높은 건물의 지붕에 올라 중앙 광장을 보고 있었다.

신검의 주인. 자신과 같은 테메레르의 피를 잇는 자.

사실 글렌의 관심은 카를에게 있진 않았다.

그보단 그가 들고 있는 신검에 더더욱 못 박혀 있었다.

신검이 뿜는 환한 빛이 그의 비취색 눈동자 속에서 명멸했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

‘이제 시작이군.’

유릭은 각오를 다졌다.

불도마뱀의 심장을 얻기 위한 검술 대전.

그저 힘을 원하는 욕심뿐만이 아니다.

가문 지하에 얼어붙어 있는 누이 로즈를 구하기 위한.

나아가 로즈의 소생에 30년의 세월이 묶여 있던 어머니를 해방하기 위한 것.

‘첫 단추부터 실패할 순 없지.’

그 성사가 걸린 중요한 첫 행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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