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15화
115화. 어디 간 거야?
유릭은 협곡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지대에 자리 잡았다.
손바닥보다 조금 긴 사이즈의 망원경을 한쪽 눈에 대고 협곡의 상황을 상세히 살핀다.
메르의 마법이 걸린 지도와 함께 교차하며 전체 상황을 그리는 중이었다.
“이젠 참가자들 쪽이 우세해 보이는데.”
“그런가?”
“베르넘 쪽의 움직임이 갑자기 안 좋아졌어.”
자신들이 3명의 흑기사를 처리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움직임이 지나치게 나빠졌다.
보다 유연하고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던 아까까지에 비해, 지금은 딱딱히 경직되어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의문이 들었지만 협곡 내부의 상황까지 살필 방법은 없다.
바깥에서 치러지는 베르넘과 일반 참가자들의 전투를 지켜보며 유릭이 지시를 내렸다.
“냇가 쪽에서 흑기사 둘이랑 일반 참가자 여섯이 대치 중인데, 이쪽만 처리하고 와라.”
“이번엔 어느 쪽을 살리지?”
“흑기사 쪽. 저 둘이 발이 풀려서 입구로 지원을 가면 적당히 막을 것 같다.”
글렌이 끄덕이더니 검은 베일처럼 보이는 그림자에 휩싸여 모습을 감췄다.
얼마간 기다리고 있으려니 협곡의 정면 쪽에 두 명의 흑기사가 참전하는 것이 보였다.
글렌이 지시를 무사히 수행했단 증거였다.
머릿수만 따지면 고작 둘이었지만 7성 기사 둘의 전력은 강력하다.
잘하면 협곡을 뚫을 수도 있을 것 같던 전장이, 그 둘의 참전으로 간신히 틀어막는 데 성공했다.
-젠장! 후퇴한다!
누군가의 외침을 신호로 일반 참가자들이 우르르 빠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후퇴하는 것이다.
‘조금만 쉬게 놔두고, 이번엔 흑기사 쪽을 한둘쯤 처리해야겠어.’
베르넘 쪽의 전력을 그대로 두면 일반 참가자들이 제풀에 지쳐 포기할 우려가 있다.
아직 그래선 안 된다. 틈을 봐 베르넘 쪽에 빈틈을 만들자.
일반 참가자의 입장에서 군침을 흘릴 만한, 그러나 결코 쉬이 뚫리진 않을 정도의 적당한 빈틈을.
“넌 진짜…….”
망원경을 보며 히죽거리는 유릭을 보곤 글렌이 할 말이 참 많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글렌도 유릭의 방식이 합리적이란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임시 동맹 쪽에 유릭과 글렌이 힘을 합한다면 베르넘을 밀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렇게 처리한 후에 일반 참가자들을 상대하는 것도 우승 확률이 결코 낮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일반 참가자들이 맺은 임시 동맹의 취지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는가.
하지만 유릭은 그 임시 동맹조차 멀쩡히 서 있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승산을 높이기 위해서.
베르넘도 임시 동맹도, 양쪽 모두 너덜너덜하게 만들 생각이다.
“이런 방법은 언젠가는 들키게 되어 있어. 그전까지 최대한 깎아내야지.”
유릭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리 얘기했다.
아래 사람들은 죽는 맛일 텐데 무슨 게임판이라도 보듯 얘기하고 있다니.
“이번엔 흑기사 쪽을 치자고. 혹시 모르니까 같이 가자.”
그런 상황이, 이 몇 시간 동안에만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되었다.
* * *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동틀 녘부터 시작된 경기는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큭! 일단 후퇴한다! 다 빼!”
에른 하인켈이 크게 소리를 치며 빠르게 전선에서 이탈했다.
그를 따르는 하인켈의 검사들이 함께 빠졌고, 다른 가문의 검사나 용병들도 눈치를 보며 조금씩 후퇴했다.
그들의 숫자는 밀고 들어갈 때에 비해 꽤나 줄어 있었다.
‘후우…… 대체 뭐지?’
빠르게 후퇴하며 에른 하인켈이 이를 갈았다.
베르넘의 흑기사가 자리를 잡은 협곡에서의 전투는 오전부터 계속 밀고 밀리는 양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쪽이 우세하다가도 어느 순간 역전당해 밀리고, 그렇게 밀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역전한다.
그런 전투가 반나절 동안 지속되다 보니 양측은 많이 지쳐 있었다.
탈락자도 결코 적지 않다.
양쪽 모두 도저히 경기 첫날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많은 숫자가 탈락했다.
이 추세로 경기가 이어진다면 겨우 하루 만에 300명이 모두 탈락하는 그림도 충분히 나올 법할 페이스였다.
“잠깐 쉬면서 상황을 살피자.”
“예.”
에른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당초 4명이던 그들 일행도 지금은 단둘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 외에 다른 팀들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더욱 미치겠는 건, 베르넘 역시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조금만 더 밀면 쓰러질 것 같으니 달려들게 되는데, 막상 부딪쳐 보면 생각보다 잘 버틴다.
결국 소모전만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협곡 동쪽이 열렸다! 지금이 기회야!
한동안 쉬고 있으려니 그런 외침이 들려왔다.
분명 기회다. 지금은 잘 버티고 있는 베르넘이지만 한쪽이 완전히 붕괴한다면 도미노 쓰러지듯 우르르 무너지리라.
그러니 반색하며 일어나야 정상이지만.
“끄응…….”
어째선지 에른의 입에선 앓는 소리부터 나왔다.
기회가 기회 같지가 않다.
또 가더라도 괜히 힘만 빼고 성과 없이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에른 님…….”
“가야지. 일어나자.”
하지만 가지 않을 수도 없다.
그래, 영약을 얻는 길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그저 그런 어설픈 영약도 아니고 10대 가문 중 하나인 베르넘이 반출하는 영약이다.
어떤 물건이든 간에 상상 이상일 것이 확실하다.
“으아아아아아!”
그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팀들이 애써 사기를 올리며 협곡 동쪽으로 진격했다.
그들과 무리 지어 돌격하던 중.
‘……!’
문득 등골을 핥아 올리는 서늘함에 그가 홱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나무 옆.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분명…….
‘아침에 만난 그 용병 아냐?’
아침 일찍 임시 동맹을 제안하러 돌아다니다 만났던 젊은 용병.
스스로의 검을 시험해 보고 싶다니 뭐니 했던 그 남자.
저 남자도 이 근처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던 건가?
실제로 그가 들고 있는 검에는 얕게나마 피가 묻어 있었다.
“에른 님?”
부하 검사가 그를 불렀다.
그제야 에른이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다.
“어, 어어. 금방 가마.”
부하의 뒤를 따라 다시 발을 옮기며 에른이 남자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
정체 모를 찜찜한 기분을 느끼며 그가 협곡으로 향했다.
어째선지 등골을 쓸어 올리는 서늘함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유릭은 지도의 변화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가 뚫어놓은 협곡의 동쪽 입구로 빨간 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에 대치하는 검은 점의 수, 그리고 흑기사와 일반 참가자들의 평균적인 전투력 차이.
그런 것들을 고려하면 제법 밸런스가 맞아 보였다.
“이번에도 나쁘지 않게 맞춘 거 같은데. 어느 쪽이 이길 거 같냐?”
“……저 아래 사람들이 너 이러는 걸 알면 칼을 갈 거다.”
유릭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글렌이 혀를 내둘렀다.
지금 유릭에게 휘둘리고 있는 일반 참가자들과 흑기사들은 아마 죽을 맛일 것이다.
서로가 단 한 끗 차이로 쓰러뜨리지 못하고 쓰러지지 않는다.
과거에 어떤 학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희망이야말로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장 큰 고문 도구라고.
저 아래 사람들은 그 말을 몸으로 체감하는 중이겠지.
“응?”
그때 유릭이 협곡 아래의 변화를 발견했다.
일반 참가자들이 들이닥쳐 잠시 전투가 이는 듯하더니, 흑기사들이 협곡 바깥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경기가 시작할 때에 비해서 절반은 되나 싶은 인원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일반 참가자들이 그들을 쫓으려 하였으나, 도망치는 데 전념하는 흑기사들을 쫓을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이 장소를 포기한 것 같군.”
글렌이 중얼거렸다.
그 말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한 가지 의문인 점이 있었다.
베르넘은 카를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후퇴를 한다고 해도 안전하게 뭉쳐서 후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처럼 산산이 찢어지는 것은 카를에 대한 방어가 너무 취약해질 텐데.
‘설마…….’
그때 문득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지켜야 할 이가 사실 이곳에 없다면?
사실 협곡에 진을 친 것 자체가 이목을 끌기 위한 미끼였고, 카를은 처음부터 다른 곳에 숨어 있었다든가.
혹은 카를을 협곡에 데려다 놓은 것까지는 사실이지만, 그 뒤로 카를이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든가.
결투에 환장하고 가만히 앉아 기다릴 줄 모르는 놈의 성격을 생각하면 후자도 충분히 있을 법했다.
‘어느 쪽이든 카를이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단 말이군.’
아무래도 메르가 한번 돌아와야 정확한 과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일찍 끝날지도.’
어찌 됐든 경기의 양상이 달라졌다.
생각보다 페이스가 빠르다.
원래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최소 3일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대로면 하루 이틀 만에 끝날지도 모른다.
“이제부턴 진짜 서바이벌이다.”
산개한 베르넘의 흑기사와 일반 참가자들이 곳곳에서 싸우기 시작하겠지.
난전으로 흘러가다 보면 참가자들 사이의 임시 동맹 따윈 종잇장보다도 쉽게 찢어질 것이다.
이제야말로 본래 룰의 취지에 걸맞은 서바이벌이 시작된 것이다.
‘꽤 재미 봤군.’
베르넘과 일반 참가자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며 생각보다 크게 이득을 봤다.
이미 남은 인원은 150명이 될까 말까 할 테지.
이 정도면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충분히 우승권이다.
이제부턴 정공법으로 공략해도 될 테지.
‘그건 그런데.’
결론을 내리는 한편 유릭이 지도를 펼쳐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도에 표시된 점들이 멈춰 있었다.
방금 전 협곡에서 산개하는 검은 점을 표시한 이래로 전혀 갱신되지 않고 있었다.
이 협곡뿐만 아니라 근방의 다른 점 역시 마찬가지.
메르가 정찰을 하고 있지 못하단 뜻이다.
‘얜 대체 어디 간 거야?’
움직이지 않는 지도를 보며 유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어? 다들 나가잖아?
작은 몸을 이용해 정찰 중이던 메르는 흑기사들이 협곡에서 튀어 나가는 산개하는 것을 목격했다.
메르라도 알 수 있었다.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행동 방침이 변경된 것이다.
-일단 한번 돌아갈까.
적들의 위치 신호를 계속 보내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론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다.
슬슬 한번 돌아갈 때가 되었단 생각에 메르가 발길을 돌려 유릭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능한 한 들키지 않게 기척을 숨기며 뽈뽈뽈 언덕을 내려가던 중.
“뭐지, 이건?”
-……!
메르의 몸이 훌쩍 땅에서 멀어졌다.
누군가에게 목덜미를 붙잡혀 들어 올려진 것이다.
대체 누가!?
“샤, 샤아-!”
메르가 허공에 뜬 네 발로 마구 발버둥을 쳤다.
발톱을 세워 자신을 붙잡은 팔뚝을 할퀴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하였지만, 팔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사내와 메르의 눈이 마주쳤다.
“위험하게 이런 데서 뭐 하는 거냐, 꼬마 고양아.”
“샤, 샤아…….”
등에는 대검, 허리춤에는 신검 라엘라를 차고 있는 잿빛 머리의 남자.
카를 클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