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16화
116화. 방해되거든
큼직한 바위 위에 올라 카를이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폈다.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내리쬐는 햇볕을 가리며 먼 곳까지 둘러보고 있지만 별다른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쩝.”
협곡에서 나와 이곳에 오기까지 이미 두어 번 전투를 치르긴 했다.
모두 실력 있는 이들과 치른 가슴 뛰는 전투였으나, 그거론 부족했다.
카를의 갈증을 채워주기엔 아직 한참이나 모자랐다.
한편, 그사이.
-…….
바위 아래의 메르는 슬금슬금 움직여 카를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조용히 기척을 죽이며 잘 벗어나나 싶었는데.
“오, 저쪽에 몇 명 보이는군. 가자, 꼬마 고양아.”
카를이 쿵! 떨어지며 메르의 목덜이를 단숨에 들어 올렸다.
“샤아!”
작은 다리로 애써 벌린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니 너무 억울하다.
메르가 싫다며 마구 발버둥을 쳤지만 카를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혼자 가면 위험해. 이따 마경 바깥에 데려다줄 테니 얌전히 있어라.”
한 손으론 물주머니라도 들 듯 메르를 대롱대롱 붙들고, 반대쪽 손으론 등에 차고 있는 대검을 뽑아 들더니.
콰앙!
그가 땅을 박찼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마냥 땅이 크게 패이며, 카를의 몸이 쏜살같이 치솟았다.
몇 그루의 나무를 타고 밟으며 그의 몸이 빠르게 달려갔고, 그의 목적지에는.
“적습이다!”
한창 주변을 경계 중인 3명의 검사가 있었다.
대검을 휘두르며 카를의 몸이 정확히 그들 사이에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앙-!
나무 사이로 충격파가 퍼져 나가며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다.
“큭!”
“경계해!”
자욱한 흙먼지를 3명의 검사들이 검을 휘둘러 걷어냈다.
그러곤 가운데에 서 있는 카를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신검의 주인!”
한눈에 카를을 알아본 그들이 눈을 빛내며 오러를 일으켰다.
제법 형체를 이룬 오러가 검을 뒤덮는 것을 보니 최소 6성의 후반. 잘하면 7성일 수도 있다.
그런 검사가 셋.
“좋군.”
1:3의 구도였지만 카를은 비겁하단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먼저 달려든 것인 데다, 딱히 1:1을 고집하진 않는 그였다.
검을 맞댈 수 있는 기회는 언제든 환영.
맞댈 검이 한 자루가 아니라 세 자루인 것은 오히려 기쁘기만 한 일이다.
‘한번 시험해 볼까.’
쿵!
대검을 땅에 꽂은 그가 허리춤의 라엘라에 손을 가져갔다.
신검의 손잡이를 쥐는 모습에 세 검사들은 감히 경시하지 못했다.
독이 잔뜩 오른 뱀처럼 긴장하는 세 검사들.
그러나 카를은 쩝 입맛을 다셨다.
“역시 손맛이 좀 없는데.”
한창 라엘라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기어이 그걸 뽑지 않았다.
신검의 강력함을 모르는 그가 아니었으나 아무리 봐도 그의 취향이 아니다.
일단 너무 작고 얇았다.
“역시 이거지 이거.”
라엘라에서 손을 뗀 그가 땅에 꽂았던 대검을 다시 쑤욱 뽑아 들었다.
그 묵직함이 주는 안정감.
라엘라를 잡을 때의 미묘했던 표정이 거짓말처럼 그의 얼굴엔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쳐라!”
라엘라에서 손을 뗀 것을 본 세 검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카를이 눈을 부릅뜨더니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폭풍과도 같은 바람이 일어 세 검사들을 단숨에 견제했다.
그러나 그들도 모두 실력자들.
위력적인 검풍이었으나 금방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달려들었다.
곧 그들의 검과 카를의 대검이 어지럽게 얽히기 시작했고.
-우웨엑.
카를의 손에 매달려 있는 메르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카를은 한 손으로 무거운 대검을 휘두르며 세 검사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당연히 그것은 결코 얌전하지 않았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은 기본이요 상체와 하체가 몇 번이나 어지럽게 회전하며 움직인다.
매달려 있는 메르로서는 멀미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이윽고.
“커헉!”
“하, 한 손으로 싸우는데도 이 정도라니…….”
세 검사들이 하나씩 쓰러졌다.
먼지투성이의 몸으로 쓰러진 그들은 어디 한 군데가 모두 부러져 있었다.
인식표 역시 모조리 부서진 후.
“괜찮은 결투였다.”
카를은 썩 만족했단 표정으로 쓰러진 그들에게 하나하나 다가가 그들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반강제로 두어 번씩 악수를 나누곤, 다시 밀림으로 들어갔다.
다음 상대를 찾기 위해.
“…….”
전투가 끝난 자리엔 패배한 세 검사들만이 허탈한 표정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샤아!”
“자자, 얌전히 있어.”
카를의 손아귀에서 마구 날뛰며 메르가 결심을 다졌다.
-이렇게 되면…….
비장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다.
카를을 엿보는 메르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 * *
해가 점점 기울고 있었다.
벌써 경기가 시작된 지도 한나절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초반에 그렇게 격렬했던 분위기는 지금은 잠시 소강상태였다.
흑기사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숨어 버렸고, 일반 참가자들도 무리하게 그들을 찾아 탈락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지친 것도 있었고,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찌어찌 흑기사를 찾아 쓰러뜨리는 데 성공해도 그 틈에 다른 팀의 습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이니까.
-캉!
그렇다 할지라도 전투가 아예 없지는 않아서, 간간이 칼 부딪치는 소리가 나무 사이로 메아리치곤 하였다.
특히 유릭과 글렌은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이미 몇 명이나 되는 검사들을 탈락시킨 후였다.
현재 두 사람의 방침은 간단했다.
만나는 이는 모두 쓰러뜨린다.
그 방침만을 가지고 둘은 밀림 내부를 누비고 다녔다.
‘메르가 어떻게 됐는지 신경 쓰이긴 하는데.’
하지만 이쪽에서 메르를 찾을 방법은 없었다.
메르는 지도에 걸어놓은 마력을 지침으로 자신들을 찾을 수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새끼 호랑이의 모습이라곤 하나 그 본신은 최강의 생물이라는 드래곤이다.
이 정도 마경에서 메르가 위험할 일은 없으리라.
그런데도 이렇게 소식이 없다는 건 뭔가 변수가 생겼단 소리겠지.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애도 아니니까.’
당장은 눈앞의 적들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간 만나는 모든 이들의 인식표를 부수고 다니던 중.
“……이건?”
지도에 나타난 새로운 신호를 보고 유릭이 눈을 찌푸렸다.
“고양이한테 별걸 다 가르쳤군.”
옆에서 고개를 내밀어 훔쳐본 글렌도 헛웃음을 토했다.
[ HELP!! ( ºㅁº)/ ]
지도에는 기존의 빨갛고 검은 점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단어 하나와 자그마한 그림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아니, 그야 점을 찍을 수 있으면 글자를 쓰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뭔 일이야 대체?’
유릭이 미간을 짚으며 눈을 찡그렸다.
도와달라는 것치곤 옆에 그림까지 그려놓은 것을 보니 전혀 위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뭐 구덩이에라도 빠진 거 아냐?
‘위치는…… 여긴가?’
지도에는 글자와 그림 외에 따로 떨어져 있는 점 하나가 있었는데 유릭은 그것에 주목했다.
아마 지금 메르가 있는 장소를 표시한 것이리라.
“거리가 좀 되는데.”
“일단 가보지. 그 정도로 훈련받은 짐승은 귀하니 버리긴 아깝잖아.”
귀하다면야 귀하긴 하다.
어디 가서 폴리모프한 드래곤을 또 주울 수 있겠는가.
헬프를 무시할 수도 없어서, 유릭과 글렌은 동떨어져 있는 점의 위치로 향했다.
정확한 위치를 알고 직선거리로 따라붙으니 생각보다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해가 지기 직전 도착한 그곳에선.
“오, 다음은 너희인가?”
대여섯의 검사들이 쓰러져 끙끙거리는 가운데 당당히 서 있는, 잿빛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카를 클라인.
도착지에 그가 있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유릭은 그보다도 더 황당한 곳에 시선이 꽂혀 있었다.
‘……너 거기서 뭐 해?’
-어르신! 구해주러 오셨네요!
카를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메르가 유릭을 보며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 * *
유릭이 나타나자마자 메르가 마구 버둥거리니 카를도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다.
“네가 주인이냐?”
“그렇다만.”
카를이 메르를 땅바닥에 내려주었다.
메르가 이때라는 듯 쏜살같이 달려와 유릭의 앞섶에 뛰어들었다.
“다음엔 안 잃어버리게 주의해라. 마물에게 물려가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어?”
“……반성하지.”
괜히 신경전을 벌일 일도 아니어서 유릭이 적당히 대답했다.
카를도 굳이 잔소리하려는 생각은 없어서 메르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다.
그의 관심은 현재 검을 들고 나타난 유릭과 글렌에게 있었다.
“그나저나 너희들…… 호오…… 과연.”
나이로 따지자면 검술 대전의 참가자 300명 중에 가장 어린 편인 것 같다.
한 명은 자신과 비슷한 30살 전후 정도로 보이지만 한 명은 명백히 어리다.
이제 20살이나 됐으려나?
그럼에도 지금까지 중 어느 참가자보다도 몸가짐이 완성되어 있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빈틈이 없는.
그러면서도 딱딱하게 경직된 느낌은 전혀 없어 마치 갈대처럼 유연하게 느껴진다.
“정말로 참가한 보람이 있구나, 마야.”
이 자리엔 없는 그녀에게 감사를 전하며 카를이 두 손으로 대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지금까지 한 손으로만 휘둘렀지만 메르를 놔준 덕에 손이 비었다.
쿠웅!
땅이 울리며 카를의 거구가 유릭을 덮쳤다.
양팔의 근육이 요동치며 대검이 하늘을 덮을 듯 떨어져 내렸다.
“쯧.”
유릭이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리며 카를의 대검을 빗겨냈다.
녹시아를 스치며 사선으로 떨어진 대검이 콰앙! 땅에 박히며 흙먼지를 피어 올렸다.
‘벌써 이놈이랑 싸우는 건 상정 밖인데.’
굳이 일찍부터 싸워서 위험을 무릎 쓸 필요가 없다.
카를의 성격상 만나는 모든 이와 전투를 벌이려 할 테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알아서 체력과 마나를 소모할 터.
그러니 최대한 나중에 싸우고 싶었지만.
“어딜 가려고!”
슬쩍 몸을 빼려는 유릭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는 카를이 다시 붙어왔다.
몇 번이나 떨쳐내고 거리를 벌리려 하지만 끝없이 따라온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승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질척거릴 정도로 강하게 전해졌다.
……어쩔 수 없지.
“글렌.”
유릭이 나직이 글렌을 불렀다.
“주변을 살펴. 소리를 듣고 하이에나들이 몰려올지 모르니까.”
“괜찮겠냐?”
유릭이 강한 것은 알고 있지만 카를의 실력은 미지수다.
특히 놈의 허리에 매여 있는 빛의 신검 라엘라.
그 검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만큼 둘이서 안전하게 협공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런 의미를 담아 물어본 것이지만.
“괜찮아.”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옆에 누가 있으면 방해되거든.”
유릭이 엑셀레아의 손잡이를 쥐고 살짝 뽑았다.
엑셀레아의 검신이 드러나며 검과 검집의 틈 사이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감지한 카를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이내 한쪽 손으로 라엘라를 뽑아 들었다.
상대의 검에서 풍기는 마력이 상상 이상이다.
취향이 아니니 뭐니 하는 말로 고집부릴 때가 아니었다.
한 손에는 애용하는 대검이, 다른 손에는 빛을 발하는 신검이.
“조심해라.”
있어봤자 큰 도움은 안 되겠다 생각한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경계하러 떠났다.
그의 눈이 마지막으로 힐긋 라엘라를 보았고.
우웅-
마치 그에 반응하듯 라엘라의 빛이 잠시 깜빡였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온 신경을 집중 중인 유릭과 카를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은 오로지 글렌뿐.
“…….”
그럼에도 그는 매정히 등을 돌려 밀림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