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17화
117화. 심상치 않게
전투에서 지형은 승패를 가를 정도로 중요한 요소이다.
비단 집단끼리의 전쟁뿐만이 아니라 1:1에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로 밀림은 유릭에게 나쁘지 않은 지형이었다.
검을 휘두르기 힘들 정도로 빽빽한 나무와 수풀은 모두 방해가 되었지만, 유릭보다는 카를 쪽이 훨씬 불편할 테니까.
그러나.
“흐압!”
그 크고 굵은 수풀들이 카를의 대검에 모조리 베여 나갔다.
걸리는 나뭇가지나 덩굴들도 그 무엇도 버티지 못했다.
닿는 모든 것을 박살 내며 카를이 유릭에게 돌진했다.
‘무슨 불도저도 아니고.’
그 압박감을 정면에서 받으며 유릭이 혀를 찼다.
카를의 대검이 거목림의 식생을 예초기마냥 갈아버리며 달려든다.
그러나 그보다도 위협적인 것은, 반대쪽 손에서 빛나고 있는 라엘라.
‘뭔 능력이지?’
테메레르 대왕에 관한 수많은 기록을 봐왔지만 라엘라의 정확한 능력은 알지 못한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그렇다.
테메레르 대왕의 일화는 와전된 것이 너무 많았고, 라엘라의 능력에 관한 기술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상관없어.’
스릉-
엑셀레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라엘라가 무슨 능력을 가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쓰기 전에 끝내면 그만이다.
반 뼘쯤 뽑힌 검신에 회오리치듯 바람이 모여들었고.
“……!”
충분히 거리를 좁힌 카를이 왼손의 라엘라를 휘둘렀다.
빛이 시야를 가득 메우며 유릭을 덮쳐온다.
그 빛을 향해.
콰앙-!
유릭이 엑셀레아를 발검했다.
* * *
-콰앙!
유릭과 카를이 있던 자리에서 폭음이 울려 퍼져 숲을 뒤흔든다.
그 파동을 피부로 느끼며 글렌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직은 아무도 없군.’
잠시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콰앙! 콰앙! 우지끈!
그러는 사이에도 저 한쪽에선 굉음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곳을 진원으로 땅이 흔들리고 벼락이라도 치듯 빛이 번쩍번쩍거린다.
거센 바람이 나무를 뿌리째 뽑아 분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하여간 소란스럽긴.’
그는 왜 유릭이 자신을 굳이 바깥으로 돌렸는지 알 것 같았다.
유릭의 전투 스타일은 좌우지간 시끄럽다.
기척을 숨기거나 조용히 습격하는 걸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전력을 낼 때는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만큼 화려하다.
침묵 속에서 제대로 힘을 낼 수 있는 자신과는 정반대.
“후.”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글렌이 나무의 위를 뛰었다.
카를 역시 조용한 놈으로는 보이지 않으니 둘의 전투는 꽤나 소란스럽겠지.
소란을 눈치챈 하이에나들이 먹을 게 없나 금방 몰려들 것이다.
그걸 처리하는 게 자신의 임무.
“카를 님!”
그때, 빠른 속도로 이곳으로 달려오는 인영이 보였다.
보아하니 그냥 뛰는 것이 아니라 수준 높은 주법(走法)을 사용하고 있다.
그저 그런 용병이 아닌 역사 깊은 가문의 출신이라는 뜻.
조용히 검을 꺼내 급습하려던 글렌이 가까이 온 그녀를 보곤 눈을 크게 떴다.
‘마야 베르넘.’
생각보다 더 거물이었다.
흑철검가 베르넘.
마지막까지 제국을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들려 노력하였던 충신의 가문.
‘…….’
그 이름엔 나름 생각하는 바가 있기도 했지만.
휘익-
탁!
“……!”
달려가던 마야의 눈앞을 스치며 단검이 땅에 박혔다.
급히 몸을 멈추며 마야가 크게 뒤로 뛰었다.
“이 앞은 못 지나간다.”
품에서 서로 다르게 생긴 단검 두 자루를 꺼내며 글렌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지금은 일단 유릭과 합을 맞추는 것이 먼저다.
* * *
마경 거목림의 바깥.
탈락하여 나온 검사들은 심심한 위로를 받으며 베르넘 가문으로 옮겨졌다.
베르넘의 살롱에는 그들을 위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어 마음껏 먹고 마시며 쉬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간단히 요기를 하는 이는 있어도 술까지 마시는 이는 없다.
그들 모두 분한 마음으로 경기를 복기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제길, 임시 동맹 같은 것에 들 게 아니라 얌전히 숨어서 기회를 노렸어야 했는데.
-내 검 실력이 조금만 더 좋았다면…….
아무리 잘했어도 후회가 남는 것이 사람이다.
하물며 조기 탈락을 해버렸다면 모든 판단과 상황에서 아쉬움을 느끼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경험을 나누던 중 그들은 묘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탈락자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꽤나 여럿의 입에서 한 사람이 계속해서 언급된 것이다.
“검은 머리의 용병한테 졌다고?”
“굉장히 젊은 놈이었는데…… 너도?”
“너도?”
얘기를 하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그 용병 혼자는 아니고 그의 동료로 보이는 이와 함께 두 사람이 언급되었다.
유릭과 글렌.
잠시 알아본 것만으로 꽤 많은 이들이 그들의 손에 탈락했고, 심지어 흑기사 몇 명이 얘기에 끼더니 자기들도 당했다고 증언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은 신기해하고 말 뿐이었다.
생각보다 실력 있는 놈이 참가했구나, 젊어 보이던데 대단하다, 질투 난다, 그런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 정도 증언만으로 유릭이 했던 짓을 추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리라.
그래도 그들의 증언은, 전혀 다른 장소에서 누군가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저들이 얘기하는 검은 머리의 용병이 우리 엘가이아 경이 찾는 사람인가?”
“아마 그런 것 같소, 가주.”
살롱의 3층 테라스에서 조용히 차를 즐기고 있는 베르넘의 가주, 윌터 베르넘.
그리고 베르넘의 식객으로 머물고 있는 엘가이아.
“경의 관심을 살 정도이니 필시 대단한 실력자겠군. 경은 우리 동기 중에서도 최고 실력자 아니었나.”
“…….”
엘가이아가 조용히 찻잔을 입에 대었다.
아직 젊었던 시절, 견습의 신분으로 대륙을 돌며 검술 수행을 하던 때.
그는 한동안 베르넘에 머물며 수행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아직 가주가 아니었던 월터와는 그때 알게 된 관계고.
솔직한 말로 그다지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엘가이아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오로지 검술에만 빠져 있는 학생이었고 월터는 정반대.
훈련은 맨날 땡땡이치면서 도시에 내려가 여자를 만나거나 술을 마시거나, 혹은 둘을 동시에 하던 그런 학생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평범하지 않은 정도의 실력은 있었다.
베르넘의 핏줄 덕분인지 아니면 가문의 검술이 대단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범인을 간신히 벗어날 정도라…….’
엘가이아가 보기엔 제 복을 제 발로 걷어찬 남자였다.
좀 더 제대로 정신이 박혔다면 전대 베르넘의 뒤를 이어 ‘검성’의 칭호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베르넘의 전대 가주는 재능이 일천하고 불량하기까지 한 아들에게 실망하여 기대를 접었다.
하여 그는 일인전승의 비전인 <검은 별>을 아들이 아닌 손녀 마야에게 넘겼고, 아들에겐 마야가 자랄 때까지의 잠시 동안만의 가주직을 주었다.
마야가 제대로 한 사람 몫을 하게 된다면 그 즉시 월터는 은퇴 당할 테지.
“하하하, 그래도 아쉽겠구만. 이번 검술 대전의 승자는 이미 결정되어 있거든.”
그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월터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카를 클라인이라는 남자 말이오?”
“그래, 그자. 무려 아버지의 보증이 붙은 남자라고? 내 안목은 경도 못 믿겠지만 아버지의 안목은 믿을 수 있겠지?”
“검성의 보증이라면 확실히 실력자겠군. 거기에 신검까지 들고 있다면…….”
“아쉽지만 경 같은 마스터가 아니라면 그 남자를 이길 자는 없을걸세.”
7성 이하의 수준이라면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월터는 그렇게 자신했다.
그 자신감은 본인의 판단이 아닌 아버지인 검성의 판단에서 온 것이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는 더 당당했다.
오랜 세월 아버지에게 열등감이 있던 그지만, 그렇기에 아버지의 대단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딱히 그 용병이 우승하는 걸 보러 온 게 아니오. 그냥 얘기나 좀 나눠보고 싶어서 온 거지.”
아무리 엘가이아라도 검성의 보증에 토를 달 수는 없었다.
대륙의 모든 검사들의 정신적 지주이며, 한때나마 잠시 그의 검을 봐주기도 하였던 은사.
그런 이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카를 클라인의 우승은 정말로 확실한 것이겠지.
“흐흐, 경이 하고 싶은 대화는 말이 아니라 이것으로 하는 대화가 아닌가?”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월터가 능글맞게 웃으며 허리춤의 검을 툭툭 두드렸다.
엘가이아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엘가이아의 반응을 즐기며 월터가 등받이 깊이 등을 기댔다.
“경이 그리도 주목하는 검사라……. 만약 그 남자가 카를을 꺾는다면 아버지의 안목이 틀리게 되는 거로군?”
그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검성이 틀리길 바라오?”
“그럴 리가 있나. 반항기 같은 건 한참 전에 졸업했네. 지금은 마야가 가주직을 물려받을 때까지 조용히 보내고픈 마음이야.”
그래야 내 말년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게 아닌가?
라고 말하며 월터가 재밌는 농담이라도 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
그 미소를 보며 엘가이아는 오랜만에 옛날의 월터를 떠올렸다.
한창 엇나가고 아비에게 반항하던 시절의 월터.
그의 미소는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 보였다.
* * *
세로로 그어진 빛줄기가 불꽃을 가른다.
반 토막 난 불덩어리가 흩어지더니 주변 밀림을 불태웠다.
이미 그들의 주변은 화마(火魔)로 가득했다.
갈라진 불꽃의 길 사이로 카를이 달려들어 대검을 휘둘렀다.
-서걱!
“……!”
하지만 그가 벤 것은 유릭의 잔상에 불과했다.
피어오른 열기와 아지랑이가 카를의 눈을 어지럽힌다.
대검을 피해낸 유릭이 엑셀레아를 뽑아 ‘선’을 그었다.
카아앙!
모조리 찢어발길 듯 날아간 선의 바람이 라엘라의 빛에 휘감겨 사라진다.
유릭이 혀를 찼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엑셀레아를 뽑으며 공격하고 있으나 라엘라의 빛이 그 모두를 튕겨냈다.
“과연. 이런 느낌이로군.”
카를도 라엘라의 취급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평상시엔 대검을 휘두르며 검을 나누다 유릭이 엑셀레아 같은 큰 기술을 쓰는 때마다 라엘라를 뽑는다.
라엘라의 빛은 엑셀레아의 바람을 모조리 휘감아 없었던 것처럼 흩어 놓는 공능이 있었다.
그나마 라엘라의 빛을 살짝 뚫는 정도까진 가긴 했지만…….
“그 검도 보통 검은 아니군. 그것도 신검인가?”
카를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마검인데.”
“오호라. 마검이 좀 더 공격적인 느낌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던 건가.”
알려지기를 신검은 지키는 것에, 마검은 뚫는 것에 보다 특화되었다 하였다.
물론 어디든 예외는 있다.
데릭의 이솔렛 같은 건 공격에도 수비에도 모두 능한 무기였으니.
‘라엘라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신검이군.’
실제로 카를이 몇 번이나 공격적으로 써보려 하다가 잘되지 않는 것을 보았다.
나름 성능은 나오지만 카를이 직접 잿빛 오러를 일으켜 대검을 내려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반면 방어적인 성능은 남달라서, 유릭의 회심의 기술을 몇 번이나 모조리 흘려 버리곤 했다.
‘엑셀레아는 쓰기 힘들겠어.’
반드시 발검(拔劍)을 해야 하는 특성상 준비 동작이 길고 상대가 눈치채기 쉽다.
그만큼 위력이 강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라엘라 앞에선 그것도 별 의미가 없다.
필요한 건 라엘라를 뽑을 틈도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일격.
결국 정공법이 답이라는 뜻이었다.
“…….”
유릭이 엑셀레아를 집어넣고 녹시아를 잡으니 카를의 눈빛이 더욱 환해졌다.
그 역시 라엘라를 넣고 대검을 든다.
방금보다도 활짝 핀 얼굴을 보니 신검과 마검으로 치렀던 공방은 영 그의 취향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흠!”
잿빛의 오러를 두른 대검이 유릭을 덮쳤다.
키이이이잉!
거칠게 진동하며 그의 검이 유릭을 노린다.
아니, 정확히는 유릭의 검을 노리고 있었다.
‘검을 부술 생각인가?’
상대가 아닌 상대의 무기에 타점을 두는 검술.
그가 가진 괴력과 검의 무게, 진동하는 오러의 파동까지.
그것은 무구를 파괴하는 검술이었다.
그러나.
-카앙!
“……!”
정면으로 부딪쳐도 파괴는커녕 이 하나 빠지지 않는 녹시아를 보며 카를이 살짝 놀랐다.
상대의 불꽃이 검을 보호하고 있나?
아니다. 그것만으론 이 정도로 검이 멀쩡할 순 없다.
검 자체가 상당한 내구를 가졌단 뜻이다.
“상대가 좋지 않았어.”
캉!
유릭이 피식 웃으며 손목을 비틀어 대검을 쳐냈다.
카를의 검술과 오러가 무기를 파괴하기 위한 것임은 한눈에 알아챘다.
하지만 녹시아는 그 단단함을 특색으로 가진 보검.
그렇게 쉽게 부서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
캉!
여전히 카를은 녹시아를 노리며 대검을 휘두른다.
녹시아보다도 훨씬 크고 두꺼운 대검은 녹시아 정도는 나뭇가지마냥 단숨에 집어삼킬 것 같았지만.
그러나 녹시아는 굳건했다.
“곤란하군. 아주 곤란해.”
곤란하다는 말과는 반대로 표정은 즐거워 보이기만 했다.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상대와 검을 맞대는 것이 얼마 만인지.
상성이 좋지 않음을 알아챈 그였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에너지가 솟아올랐다.
캉! 카카카캉!
몇 번이나 부딪치며 손속을 나누지만 승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짐승처럼 달려드는 카를의 검을 쳐내던 중.
-어르신!
메르가 유릭을 불렀다.
-어르신, 잠시만요!
‘바쁜데 왜!’
아무리 상성이 좋다지만 손을 놓고 있을 상대도 아니다.
급박히 돌아가는 검합의 와중에 자꾸 말을 거니 거친 응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 이거, 상태가 좀 이상해요.
유릭이 크게 한 번 검을 물리치고 거리를 벌렸다.
카를도 다소 숨을 고르려는지 순순히 떨어졌다.
그사이 유릭이 메르를 내려다보았다.
‘뭔데 그래?’
-이거요, 이거.
꾸물꾸물 움직이며 메르가 보여준 것은 안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던 달빛 펜던트.
‘……뭐야?’
그 펜던트가 심상치 않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