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22화
122화. 마무리
이곳에 제단을 세우고 이그네시아의 사체를 가져다 놓은 존재가 있다.
300년 전 밤하늘을 산책 중인 메르를 갑자기 습격하여 낫지 않는 상처를 남긴 녀석.
누군지는 몰라도 결코 선한 존재는 아닐 터이다.
그런 존재가 애써 만들어 놓은 제단과 반시룡을 없애버린 자신을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그런 놈의 추적까지 받게 된다면 굉장히 일이 꼬인다.
꼬이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이 위험하다.
아무리 메르가 항상 곁에 있다지만, 어쩌면 녀석은 메르보다 강할지도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시선을 돌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거짓 정보를 흘려야 한다.
되는대로 숨기거나 앞뒤가 안 맞는 거짓이 아닌, 보다 그럴싸한 진실을 섞은 거짓말을.
그걸 위해서 메르에게 연기를 부탁한 것이다.
‘내가 말하는 대로만 말하면 돼.’
-네, 네에…….
메르는 썩 내키지 않아 했지만 부탁을 들어주었다.
유릭의 설명을 듣고 본인도 이 연극의 필요성을 납득한 것이다.
“으, 아으…….”
태양을 등지고 날고 있는 메르를 보며 유릭을 제외한 전원이 사색이 되었다.
그나마 천생 마법사인 빌헤인만이 드래곤을 만났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나 죽음의 위기에 절망해야 하나 복잡한 표정이었지, 그 외에는 모두가 새파란 얼굴.
“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이 자리의 책임자인 마야가 어찌어찌 정신을 붙잡으며 메르에게 물었다.
그 말투가 최대한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것은 착각이 아닐 터였다.
‘내가 누군지보다 그대의 소개를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더냐.’
유릭이 적당한 대사를 말해주었고 메르가 그대로 얘기했다.
-내가 누군지보다 그대의 소개를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더냐.
“죄, 죄송합니다. 베르넘 가의 가주 월터 베르넘의 여식인 마야 베르넘입니다. 바깥의 마경에 일이 있어 왔다가 균열을 발견하여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정중한 아이로군.
지금 이 순간에도 메르의 대사는 유릭이 모두 정해주고 있었다.
최대한 드래곤의 위엄을 유지하며 메르가 얘기했다.
-베르넘이라면 대륙에선 무척 유명한 가문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너희도 알고 있었느냐?
“알고 있다니 무엇을 말이지요?”
-이 심층에 동족의 사체를 모욕하는 불길한 제단이 있었단 사실을.
“도, 동족의 사체 말입니까?”
마야는 대략적인 맥락은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심층에 같은 드래곤의 사체가 놓여 있었고, 그 사체에 장난질을 치는 무언가가 있었단 뜻.
당연히 전혀 몰랐던 일이었기에 그녀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물론 본 가문도 그런 사안은 일절 알지 못합니다! 저와 제 아버님의, 그리고 할아버님인 검성의 이름을 걸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조부의 이름을 멋대로 거는 것이었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다.
자칫 저 용이 착각을 해 베르넘을 의심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리 10대 가문이라지만 용을 적으로 돌렸다간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흐음…….
메르가 짐짓 고민하는 척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에 마야와 흑기사들이 절로 몸을 떨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앞에서 벌벌 떠는 이들을 보며 우월감에 잠길 수도 있지만, 메르에게 그런 마음은 일절 없었다.
-어르신, 다음에는 뭐라고 할까요?
그냥 빨리 연기를 끝내고 새끼 호랑이로 돌아가 웅크리고 싶을 뿐.
‘그거 물어봐. 나비 문양.’
메르가 유릭에게만 보이도록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허공에 마나의 빛을 발했다.
그 빛이 움직이더니 제단에 새겨져 있던 나비 문양을 그대로 그려냈다.
-이 문양을 알고 있느냐?
마야가 허공에 그려진 나비 문양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눈에 핏발이 서도록 집중하고 머릿속 기억을 몇 차례나 뒤져본다.
그러나 짐작 가는 것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본가의 서고는 거의 독파한 저입니다만 처음 보는 문양입니다.”
-믿도록 하지. 혹시 괜찮다면 부탁을 해도 되겠느냐?
“그 문양에 대해 알아봐 달란 말씀이십니까?”
-이야기가 빨라 좋구나. 만약 들어준다면 내 소중히 보관 중인 보물 중 하나를 내어주도록 하마.
이야기가 잘 풀리는 느낌에 마야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다른 흑기사들도 용의 보물이란 말에 반사적으로 귀를 쫑긋거렸다.
-어르신, 저 보물 같은 거 없는데요……? 이런 약속 해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 뭐하면 내가 알아서 구해다 줄 테니까.’
물론 지금까지의 얘기는 모두 유릭이 지시한 일이다.
그는 딱히 베르넘이 정말로 메르를 공격한 존재를 알아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메르를 상처 입히고, 이그네시아의 사체를 빼돌리고, 그런 일을 저지르면서도 세상의 바깥에 전혀 드러나지 않은 녀석이다.
이제 와서 베르넘이 조금 움직인 정도로는 꼬리도 잡히지 않겠지.
하지만.
‘누가 찾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활동폭이 줄어들 테니까.’
베르넘이 용의 의뢰를 받아 모종의 문양의 주인을 찾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놈의 움직임은 크게 위축될 것이다.
동기도 마침 적절하다.
300년 전의 드래곤이 복수를 위해 자신을 찾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납득하겠지.
만약 놈이 역습을 가하기 위해 메르를 찾아다닌다 해도 소용없다.
그때쯤 메르는 새끼 호랑이로 폴리모프한 채 유유자적 육포나 뜯고 있을 테니까.
“만약 찾게 된다면 어떻게 연락을 드리면 될까요?”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알아서 찾아올 테니.
적당히 하는 말이었지만 마야나 흑기사들은 그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신비(神祕)인 드래곤이 그렇다고 하는데 의심할 리가.
-그럼 잘 부탁하지.
그 말을 끝으로 메르의 몸이 빛에 휩싸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공에 남은 빛의 잔향에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사이 몰래 새끼 호랑이로 돌아온 메르가 유릭에게 달려와 안겼다.
‘수고했다.’
-하아아아~ 어르신은 매번 저한테 너무 많이 시켜요. 고행은 혼자 알아서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가끔은 같이하는 것도 좋지 뭘 그래. 매번 고독하게 혼자 있는 것도 힘들잖아.’
-…….
투덜거리던 메르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 표정.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궁금하긴 하였지만 유릭은 굳이 묻지 않았다.
‘이 정도면 잘 마무리한 것 같네.’
-제 덕분이죠?
‘그래그래. 돌아가면 육포 줄게.’
기분 좋은 듯 살랑살랑 꼬리를 움직이는 메르를 앞섬에 넣고는 유릭이 허리를 폈다.
하나가 끝나긴 했지만 모든 일이 끝나진 않았다.
‘경기는 어떻게 됐지?’
아직 검술 대전의 마무리가 남아 있었다.
* * *
피이이이이잉-
이번에 치솟아 오른 것은 녹색의 연기였다.
경기 재개를 뜻하는 신호.
만약 유릭의 실종이 이틀만 더 이어졌어도 완전 중단을 뜻하는 적색 연기가 피어올랐겠지만, 24시간도 되지 않았던 덕에 곧바로 재개하게 된 것이다.
한번 탈락했던 마야는 지금은 데려온 흑기사들을 부려 경기를 치를 범위를 제한하고 있었다.
이제 충분히 숫자가 줄어들었으니 서서히 경기장을 좁혀 전투를 유도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간 평생토록 경기가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회색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기점으로 경기장이 정해졌고, 유릭과 글렌은 눈대중으로 그 범위를 가늠했다.
“용이라니 별일도 다 있군.”
글렌이 이번만은 정말 놀랐다는 듯 말을 꺼냈다.
유릭과 함께 다니며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만 용과 조우한 것은 정말로 기겁할 일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 용이 사실은 네가 돼지 고양이니 뭐니 불렀던 녀석이라고 알려주면 어떤 반응이려나.
문득 궁금해져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보다 베르넘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말인데.”
“아직 경기도 안 끝났는데 벌써 마무리를 생각하나?”
“미리미리 생각해 놔야지.”
유릭이 말을 이었다.
“용병 신분도 이제 버릴 때가 된 것 같다. 베르넘을 떠나는 즉시 사용할 새로운 신분을 준비해 놔.”
“어느 걸로 할까. 몰락 귀족 정도면 적당한가? 아니면 방랑기사도 괜찮을 것 같은데.”
신분을 바꾸는 일이야 글렌도 예상했던 바이다.
예정대로라면 이번 일로 유릭은 불도마뱀의 심장을 얻게 된다.
그런 보물을 가진 채 신분 세탁도 없이 유유자적 여행을 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었다.
“몰락 귀족 쪽이 좋아 보이는군. 한동안 용병으로 활동했으니 변화를 줄 때가 됐어.”
“마경을 나가면 바로 준비하지. 그나저나 불도마뱀의 심장은 확실히 얻을 수 있는 거겠지?”
“글쎄…….”
유릭이 말끝을 흐리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스산한 소리와 함께 검이 뽑힌다.
그러자 저 앞의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며 거구의 사내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한 손에 대검을 들고 있는 잿빛 머리의 사내.
“이곳에 있었구나, 유진. 마야와의 볼일은 모두 끝났나?”
“그래.”
“잘됐군.”
카를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눈을 부릅뜨며 땅을 박찼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잿빛 오러를 두른 카를이 돌진했다.
앞뒤 가리기 전에 몸부터 들이밀고 보는 저돌적인 모습에는 꽤나 위압감을 느낄 법했지만.
‘……가볍군.’
유릭은 오히려 여유로움을 느낄 정도였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바로 직전에 겪었던 반시룡과의 전투.
눈이 돌아간 용이 앞뒤 안 가리고 돌진하던 광경에 비하면 카를 따위는 애들 장난과 같은 것이었다.
카앙-!
녹시아가 물 흐르듯 움직여 카를의 대검을 막았다.
카를이 눈을 크게 떴다.
그냥 적당히 흘리기 위해 막았던 이전까지와 전혀 달랐다.
카를이 모든 힘과 추진력을 모아 응축한 일점(一點)을 녹시아가 정확히 막아냈다.
흡사 무술의 달인이 손가락 하나로 거구를 막아내는 것처럼.
‘이 짧은 사이에?’
유릭의 힘과 움직임 자체는 일전에 싸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무언가가 달랐다.
보다 침착하며, 무엇보다도 일순간의 관찰력이 좋아졌다.
그것이 숨겼던 힘을 드러낸 것인지, 아니면 심층 안에서의 어떠한 경험으로 그새 발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이거 지겠구만.’
이 일합(一合)에서 카를은 패배를 직감했다.
아직 마스터에 이르진 못했더라도 그 역시 뛰어난 수준의 검사다.
첫 합을 나눠보면 대략적인 승부의 향방이 보이게 마련.
하지만.
‘결과가 전부는 아니지.’
카를은 기죽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닌 검을 나누는 과정이다.
그는 언제나 그것을 소중히 하는 사내였으니.
“크하아아아압!”
카를의 대검이 떨어져 내렸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주변이 둘의 전투로 마구 휩쓸려 나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글렌은 전투하는 두 사람에게서 한 발짝 멀리 떨어졌다.
‘나는 나머지 놈들이나 처리하고 올까.’
카를 클라인은 유릭이 상대할 테고 마야 베르넘은 탈락했다.
나머지 참가자 중에 그들 이상의 강자는 없을 터.
유릭이 카를을 상대하는 동안 자신이 나머지 전부를 처리하면 그걸로 검술 대전은 끝이다.
그렇게 유릭과 글렌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완벽히 역할 분담을 하여 흩어졌다.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피이이이잉!
거목림의 하늘 높이 흑색의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검술 대전의 종료를 뜻하는 신호탄이었다.
* * *
베르넘의 살롱에는 수백의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이번 검술 대전에 참가했던 참가자들, 그들 사이에서 시중을 들고 다니는 시종과 시녀들, 행사를 주관하는 베르넘의 사람들.
탈락한 탓에 먼저 마경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카를과 마야.
베르넘의 가주인 월터 베르넘과 그의 손님인 엘가이아까지.
“세상에나 경, 보게나. 정말로 경이 주목한 용병이 이겨버렸다네. 아버지가 점찍은 카를 클라인을 말이야!”
“…….”
엘가이아는 변함없이 묵묵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알고 있나? 아버지는 말일세, 이렇게 단언했다네. ‘마스터가 아니고서야 카를 공자를 쓰러뜨릴 검사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이야. 크크크, 정확히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이렇게 말했다니깐?”
“그 얘긴 일전에 들었소.”
“아 그랬나? 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경도 이해하지?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내가 아니라 지나가던 개가 봐도 알겠소.”
“그 정돈가? 이거 표정 관리 좀 해야겠는데, 하하하하!”
크게 웃는 월터의 너머로 살롱의 입구가 끼이익 열리는 것이 보였다.
엘가이아가 그곳에 주목했다.
-금년도 검술 대전의 우승자, 퀘른 왕국 출신의 A급 용병 유진이 입장하겠습니다!
입구를 지키던 시종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만인의 주목을 받으며 주인공이 등장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용병.
유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