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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125화 (125/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25화

125화. 흔들리는 커튼

유릭이 나간 방에선 글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육포를 하나씩 던져주고 있었다.

“옜다.”

한 장 던질 때마다 메르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육포를 채갔다.

누가 봐도 환장하는 모습에도 글렌은 별다른 반응 없이 기계적으로 육포를 던질 뿐이었다.

“다 줬나?”

유릭이 얘기한 10장을 모두 줄 때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젠 쉬기 위해 주머니를 갈무리하려 할 때.

“……?”

뭔가 섬뜩한 기분이 들어 글렌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탓!

“앗!”

순식간에 점프한 메르가 글렌의 손에서 주머니를 쳐냈다.

바닥에 떨어지며 입구가 열린 주머니에서 육포가 흘러나온다.

메르가 한달음에 달려들어 그곳에 고개를 파묻었다.

“야, 임마!”

글렌이 눈을 찌푸리며 메르를 옆으로 치우곤 떨어진 육포를 모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굽혔던 허리를 펴려는데.

슈슈슉!

벽 두 개를 밟아 점프하며 순식간에 달려든 메르가 주머니를 채갔다.

마치 사냥할 때의 맹수와 같은 눈빛으로 메르가 글렌을 응시한다.

글렌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해보자 이거냐?”

그가 마나까지 일으키며 손을 뻗어 메르에게 달려들었다.

어린 짐승 따위는 물론 웬만큼 단련한 기사라도 포착하지 못할 정도의 은밀하고 신속한 움직임.

그러나 다음 순간.

탓!

“큭!”

메르는 이미 글렌의 이마를 밟아 넘고는, 뒤쪽 테이블에 착지했다.

‘아니…….’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글렌이 멍해졌다.

그사이 메르는 주머니를 풀어헤쳐 머리를 처박곤 찹찹찹 육포를 씹고 있었다.

마경에서의 일로 범상치 않은 짐승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 정도였다고?

스으으으-

글렌이 얼굴을 씰룩이더니 그의 주변으로 그림자가 뻗어 나갔다.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붙잡고 만다.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눈으로 글렌이 메르를 응시했다.

물론.

“크르르르…….”

그를 보는 메르의 눈 역시 육포에 미쳐 정상이 아니었다.

* * *

마야의 뒤를 따라 유릭이 베르트랑의 연무장에 도착했다.

검성의 개인 연무장.

검을 휘두르는 이라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들어오고 싶을 그런 장소에 유릭이 발을 디뎠다.

‘오.’

연무장은 깔끔함과는 무척 거리가 멀었다.

바닥이고 벽이고 천장이고 온통 검의 흔적으로 가득해 너덜너덜하다.

누가 보면 폐가의 한 장소라고도 볼만한 그런 방이었지만, 유릭의 눈에는 무척 남달라 보였다.

‘흔적 하나하나가…… 대단하긴 하군.’

아무렇지 않게 그어진 흔적 하나에도 잴 수 없을 고뇌와 깊이가 담겨 있다.

이름 높은 서예가가 그은 한 획이 그냥 한 획이 아니듯, 이 연무장에도 그런 깨달음이 깃든 검흔이 한가득 있었다.

마음만 같아선 몇 날 며칠이고 머물며 차분히 감상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드디어 왔구나, 용병.”

연무장 가운데서 흉흉한 눈빛을 뿌리고 있는 검성을 보면 그런 생각 따윈 싹 가신다.

지금 당장 뒤돌아 나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다.

탁.

그 마음 탓인지 손이 저절로 움직여 연무장의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유, 유진?”

“아. 미안.”

마야가 이 무슨 실례냐며 부릅뜬 눈으로 쳐다보았고 유릭이 입맛을 다시며 다시 문을 열었다.

“배짱 하난 대단하구나.”

아니나 다를까 베르트랑 역시 잔뜩 구긴 얼굴로 유릭을 맞이했다.

“미안합니다. 반사적으로 그만.”

“……됐으니 들어오거라.”

유릭이 들어가 앉아 있는 베르트랑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행동 하나하나에 얼굴을 씰룩이는 베르트랑이었으나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얘기가 있었기에.

“이 밤에 너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다. 제안을 하나 하마.”

“거절하겠습니다.”

칼같이 나온 즉답에 베르트랑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얘기 정도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느냐?”

“보나 마나 불도마뱀의 심장에 관한 얘기겠죠.”

“……맞다.”

베르트랑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긴 해도 아까 살롱에서 정도로 분노하진 않았다.

최소한의 분별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거래하지 않겠느냐?”

“거래요?”

“불도마뱀의 심장을 돌려다오. 대신 네게는 다른 영약을 주마.”

베르트랑이 품에서 기다란 목함을 꺼내 열었다.

여는 순간 청아한 향기가 물씬 풍기며 저릿하던 연무장 내의 공기가 순식간에 화사해졌다.

작고 열매가 세 개 달려 있는 굵은 뿌리.

삼(蔘)이었다.

“꽤나 연식이 되어 보이는군요.”

“못해도 3천 년은 되었을 게다. 이 정도면 그 반쪽짜리 심장보다 훨씬 귀한 물건이지.”

“글쎄요. 이그네시아가 살아온 나이만 해도 3천은 훌쩍 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심장의 기운은 매우 탁하고 불안정하지. 거기다 절반은 손실되어 반쪽짜리가 아니더냐.”

반으로 가른 영약은 효능이 급감한다.

단순히 1/2이 아니라 1/3, 혹은 1/4 이하로 내려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이 삼은 온전한 상태로 3천 년 이상의 정기를 흡수해왔단다. 그 되다 만 영약보다는 훨씬 귀한 물건이야.”

물론 진짜 영약의 효능은 그걸 먹어본 장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다.

그러니 두 사람의 흥정은 서로가 알고 있는 지식과 각 영약의 역사를 돌아보며 추측하는 것.

그러나 유릭이 보기에 베르트랑의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적당한 금전과 보석도 얹어주마. 원한다면 베르넘의 비전 전반부까지도 건네줄 수 있다. 물론 비전은 네가 베르넘의 검사로 이름을 올려야 하지만, 내 특별히 얘기해 이름만 올리고 따로 의무는 지지 않도록 조정해 주마.”

유릭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살롱에서 봤을 땐 옹고집과 분노조절장애만 가득한 못돼먹은 노친네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나이에 걸맞은 능구렁이를 품고 있는 너구리였다.

“대단하시군요. 흥정하면서 동시에 본인만 좋을 조건도 슬쩍 끼워 넣으시고.”

비전을 미끼로 은근슬쩍 가문에 자신을 묶어두려 하다니.

그것도 비전 전부를 주는 것도 아니고 전반부만 준단다.

흡사 사기꾼들이 쓸 법한 미끼 화법이 아닌가?

“글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대답해 보거라. 거래를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

“…….”

“네게 있어서 불도마뱀의 심장은 그냥 흔한 영약 중 하나에 불과할 테지. 하지만 나에겐 다르단다. 그건 내가 평생토록 충성을 바쳤던 황가가 남긴 유품이야.”

“유품?”

“황가 클라인 가문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 가문을 사람이라 한다면 죽어 땅에 묻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클라인 가가 남긴 제국의 물건들은, 내게 있어 모두 유품이나 다름없단다.”

그러니 부디 이 거래를 받아달라고.

베르트랑의 눈빛엔 과거에 대한 추억과 그런 호소가 담겨 있었다.

거부하기 힘든 솔깃한 제안과 함께 들어오는 진한 감성팔이.

무척 효율적인 협상의 방법이었지만.

“그만하시죠.”

그런 것에 넘어갈 유릭이 아니었다.

“검성의 말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말하는데, 저는 이 심장을 놓을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무슨 말씀을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렇게 부탁해도 말이냐?”

“이렇게든 어떻게든 소용없는 건 소용없는 겁니다.”

그러자 베르트랑의 눈에서 방금과 같은 감성적인 빛이 싹 사라졌다.

그 눈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날카로운 기운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유릭의 옆에 있던 마야였다.

“유진! 할아버님의 제안을 받아주세요.”

“제가 왜요?”

“그건…….”

마야가 할 말을 잃곤 말을 더듬었다.

아니, 정확히는 말을 잃은 것이 아니다. 하고픈 말은 있었으나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너무나 무례한 말이었기에.

“마야도 알고 있는 걸 너는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베르트랑은 얘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뭘 모른단 말입니까?”

“이 거래에 올라가 있는 저울추 말이다. 네 쪽엔 불도마뱀의 심장 딱 하나가, 반대로 내 쪽엔 3천 년 묵은 삼과 각종 금은보화, 그리고 베르넘의 비전이 올라가 있지.”

“훌륭하군요. 남들이라면 선뜻 응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네 목도 같이 올라가 있다면 너도 응하지 않곤 못 배기겠지?”

훅- 하고.

뜨거운 바람이 목을 스쳐 지나는 듯했다.

그 순간 유릭의 머리에 든 생각은 이 상황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육포 잘 먹고 있으려나.’

살롱에서 불도마뱀의 심장을 얻었을 때.

그때 이미 유릭은 메르와 말을 맞춰놓았다.

신호를 보내면 곧바로 본체로 돌아가 유릭과 글렌을 데리고 도망치기로.

혹시라도 베르넘이 남들 앞에서만 주는 척을 하고 뒤에선 수작을 부릴까 봐 정해놓은 신호였다.

그게 없었다면 애초에 유릭은 이 연무장에 발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거절합니다.”

순간 목을 스쳤던 뜨거운 기운이 팔팔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런 주제에 베르트랑의 얼굴은 한층 더 차분해진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지? 살고 싶지 않나?”

“그럴 리가. 그랬다면 이렇게 열심히 영약도 얻으러 다니고 그럴 리 없잖습니까.”

“그럼 왜?”

“목숨보다 소중한 게 있다는 것. 검성이라면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사실 딱히 목숨의 위기가 아니었기에 할 수 있는 배짱이었지만,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검성이 새삼스레 유릭을 보았다.

지금껏 계속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해오고 있었지만, 어쩐지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것 같았다.

“네 녀석, 평범한 용병이 아니구나.”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후우.”

베르트랑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끓어오르던 기세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손만 대도 베일 것 같던 연무장의 공기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네 뜻은 알겠다. 더는 밀어붙이지 않으마. 거래는 받아들이지 않는 걸로 알겠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야. 그를 배웅해 주거라.”

명백한 축객령.

마야의 재촉을 받아 유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무장을 나와 문을 닫고 나니 그녀가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러고 보니 살롱에서 월터와 베르트랑이 싸울 때도 한쪽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

조부와 부친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있는 모양.

“이래저래 고생이 많군.”

그리 얘기하니 마야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뇨, 아닙니다. 방까지 배웅해 드리죠.”

그녀를 따라 유릭이 다시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던 유릭이 문득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벌써 날짜가 바뀔 정도로 깊은 밤시간이었다.

* * *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댁도 잘 자고.”

방 앞에서 마야는 본인의 침소로 돌아갔다.

유릭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큭!”

“크아앙!”

글렌의 그림자가 나뭇가지마냥 벽에 퍼져 메르를 휘감으려 하고, 메르가 벽을 박차며 모조리 피해낸다.

그사이 메르의 예상 경로에 앞서간 글렌이 손을 뻗고, 메르는 무려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경로를 트는 재주를 선보였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 조막만 한 새끼 호랑이와 웅장한 전투를 펼치는 광경이었다.

“니들 뭐 하냐……?”

“허억…… 허억…….”

-어르신!

유릭이 한마디 하자 그제야 돌아온 것을 눈치채곤 두 사람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자초지종을 듣곤 유릭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메르의 뺨을 꼬집었다.

“내가 10개까지라고 했지?”

-으아아~ 죄송해요…… 눈이 돌아가서 그만.

“글렌 너는 무슨 애를 상대로 진심을 내고 있어.”

“딱히 진심인 건…… 아니, 그보다, 대체 뭐냐 이 짐승은? 대체 어떻게 돼먹은 녀석이야?”

고작 훈련을 좀 받는다고 이런 움직임이 가능한 것인가?

의구심 가득한 눈을 한 글렌에게 고개를 저으며 유릭이 지시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짐 챙겨.”

너무나 갑작스러운 지시에 글렌이 눈을 찌푸렸다.

“짐? 하루는 자고 간다고 했잖아.”

“상황이 변했다.”

유릭의 말에 글렌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회수하러 온 건가? 가주의 인상을 보니 꽤나 음흉한 자 같던데 역시 그랬군.”

“아니, 가주는 문제없어. 그보단 전대가 문제야.”

“전대라면 검성 말인가?”

“그 노인이 좀 그렇더라고. 낌새가 좋지 않다.”

마지막에 베르트랑은 유릭의 말에 감명을 받아 거래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릭은 말 몇 마디로 그가 마음을 바꿨다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않았다.

본디 사람은, 특히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생각이 굳고 고집이 강해지는 법이다.

수십 년을 살아온 삶의 방식이 말 몇 마디 따위에 휙휙 바뀔 리가 없는 것이다.

“도망친다. 마침 새벽이기도 하니 몰래 떠나긴 좋겠어.”

“하아.”

글렌이 몸을 일으키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째 우리 계속 도망만 치는 것 같지 않나? 좀 정상적으로 떠나고 싶은데.”

지당한 말이었다.

“나도 그럴 수 있으면 그러고 싶지. 됐으니까 얼른 짐이나 챙겨. 가자, 메르.”

메르가 폴짝 뛰어 유릭의 앞섬에 파고들었고, 이내 짐을 챙긴 그들이 창문을 통해 저택 아래로 뛰어내렸다.

방에는 열린 창문에서 흔들리는 커튼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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