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30화
130화. 가장 불공평한 분업
도둑 길드에서 받아 온 건 그렇게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성국 루메루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도시의 구조, 최근 있었던 눈에 띌 만한 사건 등등.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있었으니.
“천신전의 내부 구조다. 반쪽짜리지만.”
“금방 다녀오셨군요.”
다른 조사로 도시를 훑어보다 돌아온 글렌에게 유릭이 천신전의 내부 지도를 펼쳐 보여주었다.
물론 전부가 세세하게 작성된 지도는 아니다.
일반인들이나 말단 사제들에게도 공개된 겉 부분만 상세히 그려져 있을 뿐이고, 그보다 안쪽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기껏해야 술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로 만들 수 있는 지도는 이 정도가 한계이리라.
“이 안쪽 어딘가에 성역이 있을 거야.”
“그래도 후보지가 꽤 좁혀졌군요.”
“몇 군데만 둘러보면 되는 거니까.”
그 정도 지도만 되어도 큰 도움이 된다.
중요한 성역의 위치는 직접 찾아야 한다는 위험이 있지만, 적어도 침입 경로와 퇴로를 짤 때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래서 월담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성기사들이 바보도 아니고 쉽지 않을 텐데요.”
몰래 침입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내부 순찰을 피하고 성역의 위치를 찾으러 다니고 이런 일들도, 결국은 침입에 성공해야 가능한 일.
그 침입부터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데 다른 일을 의논해 무엇하겠는가.
“뭐 일단 가만있어 봐. 생각해 둔 방법이 있으니까.”
글렌의 걱정을 일축하곤 유릭이 도시의 지도를 펼쳤다.
천신전 주변 일대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원을 그려본 그는, 이내 지도를 접고 일어났다.
“이것만 봐선 모르겠군. 직접 확인해 보러 가자.”
“예, 예에…….”
기운차게 나가는 그의 뒤를 글렌이 떨떠름하게 따랐다.
대체 무슨 생각이길래 이러고 있는 것인지.
글렌을 데리고 천신전의 주변을 크게 돌아본 유릭은, 이윽고 적당한 물건을 발견했다.
“여기가 좋겠어.”
“……이 잡화점이 왜요?”
잡화점을 보며 의아해하는 글렌에게 유릭이 천천히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무척 낡고 허름한 잡화점이었다.
부서진 곳을 수리하지도 않고 대충 내버려 두고, 안쪽에 진열된 물건들도 먼지가 잔뜩 쌓여 방치되어 있었다.
전혀 장사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곳.
유릭은 그곳의 주인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고.
“이 가게를 인수하고 싶습니다만.”
“오오, 그런가!”
이틀가량이 지난 후.
유릭은 주인에게 그런 말을 꺼냈다.
가게 상태로도 알 수 있듯 이 잡화점은 주인에게 한참이나 방치된 상태였고, 그는 유릭의 제안을 기꺼이 받았다.
몸이 불편한 노인이라 장사하기도 힘들고, 말년은 느긋하게 여행이나 다니며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계약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유릭은 가지고 있던 보석 몇 개와 금화를 담은 주머니를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넉넉히 챙겼으니 맛있는 것 사드시면서 관광이라도 하시지요.”
“어이구, 고맙네, 고마워.”
주머니 입구를 슬쩍 열어본 노인이 활짝 웃으며 주머니를 챙겼다.
척 봐도 이런 시원찮은 가게 하나 인수하기엔 차고 넘칠 액수였다.
“그러고 보니 일행이 하나 있지 않았나?”
“가게 내부를 좀 더 살피고 싶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지하를 보고 있을 겁니다.”
“아, 그래? 수리비가 많이 나올 텐데…….”
그런 말을 하면서도 노인은 슬쩍 주머니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 폐가 직전의 가게에 귀한 보석을 몇 개나 받은 것이 양심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돌려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유릭이 웃으며 손짓했다.
“이제 와서 깎아달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시지요. 그럼 이걸로 계약은 끝난 걸로 알겠습니다.”
가게의 서류를 챙기며 유릭이 일어났다.
잡화점 주인도, 아니, 주인이었던 노인도 흡족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눈 후, 노인은 가게를 떠나갔다.
‘신분은 몰락 귀족이고 직업은 잡화점 주인인가.’
뭔가 굉장히 중구 난방한 신원이었지만 뭐 상관없다.
누구를 적극적으로 만나고 다닐 것도 아니니.
유릭이 가게 문을 닫고는 지하로 내려가는 바닥 문을 열었다.
쌓여 있던 먼지가 안개마냥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콜록, 콜록.”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아래로 내려가자 잔뜩 몸을 낮추고 지하실 바닥을 살피는 글렌이 보였다.
그는 아예 바닥의 판자를 뜯어내 흙바닥을 만지며 살피는 중이었다.
“어때, 그 정도면 할 만하지?”
“그렇긴 합니다만…… 그런데 진심이십니까?”
“진심이지, 그럼.”
그렇게 대답하자 글렌이 무슨 미친놈 보듯 유릭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땅굴을 파 신전 지하에 침입하겠다니, 정신 나가셨습니까?”
눈뿐만 아니라 말로 뱉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글렌이었다.
땅굴.
유릭이 그에게 얘기한 신전에의 침입 경로는 바로 땅속이었다.
글렌의 말에 유릭이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당연히 제정신이지 왜?”
땅굴은 들키지 않고 파는 것이 힘들 뿐이지, 제대로 파내기만 한다면 아주 큰 효력을 발휘하는 작전 중 하나다.
실제로 현대에서도 여러 시대의 여러 형태의 땅굴에 대해 들어왔었고, 현대뿐만 아니라 이 세계도 마찬가지다.
당장 카자르 사막에서의 일을 생각해 보라.
그때 아칸의 비사대는 어스웜을 조종하여 땅굴을 파 그 안에 기지를 만들었다.
메르가 어스웜의 둥지를 감지해낼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메르가 아니었다면 그 기지는 결코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굴착을 위한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는 전문적으로 땅을 파는 사람도 아닙니다. 파낸 흙을 버려야 할 곳도 문제고, 당장 파다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고, 문제가 산적한데 그렇게 쉽게 되겠습니까?”
“너 땅 파는 기술 없어?”
“……그야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만.”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글렌을 보며 유릭이 그럼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장소에 숨어들어 첩보 활동을 하며, 때론 위험한 잠입이나 암살 임무까지 수행하는 13기사단이다.
글렌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유망하여 레오폴딘이 신경 써서 자신에게 붙여준 섀도우.
땅의 상태를 보는 지식이나 땅굴을 파는 기술 정도는 당연히 갖추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가 무슨 군사 목적의 넓고 긴 땅굴을 파는 것도 아니고, 신전까지 그렇게 멀지도 않잖아? 이 정도도 안 되나?”
글렌은 대답하길 주저했다.
된다 안 된다 둘 중 하나로 얘기하라면 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좀 더 살펴본다면 어쩌면…….”
그래도 차마 거짓말을 할 순 없었기에 솔직히 얘기한 그였다만.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유릭이 씨익 웃었다.
결정이다.
“잘 부탁한다, 글렌. 네 손에 작전의 성패가 걸렸어.”
“…….”
글렌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럴 줄 알았다. 역시 힘들여 땅을 파는 건 자신이 아닌가!
“난 따로 할 일이 있잖아. 의심받지 않으려면 잡화점 주인 노릇도 빼놓을 수 없고. 안 그래?”
“그……렇죠.”
글렌이 이를 갈며 수긍했다.
땅굴은 성공했을 시 매우 유용한 작전이나, 반대로 들키게 된다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로 변하는 위험한 작전이기도 하다.
상대에게 들키는 것 하나만으로 그동안 들인 막대한 수고를 모두 버리게 되고, 심할 경우 역공을 당할 수도 있는 작전.
당연히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바깥에서 낌새를 살피고 위장 공작을 해줄 동료 역은 필수 불가결이었다.
심지어 주인이 하루마다 바뀌고 교대되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기에, 역할은 한 명으로 고정하는 쪽이 합당하다.
그것은 즉 땅을 파는 역할 또한 글렌 하나로 고정이란 얘기였다.
“당분간 서로 잘 해보자고.”
“하아……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부가.”
썩은 표정의 글렌의 어깨를 유릭이 피식 웃으며 두드렸다.
한 명은 장사도 안되는 가게를 지키기만 하는 세상 편한 일, 다른 한 명은 땅을 파고 흙을 퍼다 나르는 고되기 짝이 없는 일.
세상에서 가장 불공평한 분업 작업의 시작이었다.
* * *
잡화점을 구입한 날부터 며칠이 흘렀다.
땅을 파고 흙을 버리기 위한 도구, 나침반, 도둑 길드에서 사 온 천신전 내부의 간략한 지도.
이런 것들을 구비하고 면밀한 계산을 마치고서야 글렌은 비로소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사이 유릭은 잡화점을 가게다운 가게답게 만들어 놓았다.
무너진 곳을 대충이나마 수리해 놓고 잔뜩 쌓인 먼지를 털어내 청소했다.
바닥에 물걸레질까지 해놓으니 낡긴 했어도 평범한 가게처럼은 보이게 되었다.
물론 그래 봤자 큰 소용은 없었다.
오랫동안 외면받던 가게가 청소 좀 했다고 갑자기 주목받거나 하진 않는다.
‘오히려 좋지.’
손님이 별로 없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청소를 한 것도 손님을 끌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먼지 쌓인 곳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한가한 가게 안에서 유릭은 카운터에 앉아 책 한 권을 펼쳤다.
그러나 책 쪽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는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혹시 모르니 집중력의 반 정도는 바깥에 내놓은 채, 남은 절반으로 최대한 몸속의 내기를 갈무리했다.
불도마뱀의 심장을 먹기 전에 몸의 상태를 최적의 상태로 조정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씨앗을 뿌리기 전엔 밭을 갈아놔야 하니.’
미리 몸속의 기운을 정돈시킨 후에 영약을 복용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갑자기 삼키는 것의 차이는 크다.
영약이란 것이 보통 흡수율이 100%에 달하진 않는다.
일정 이상은 반드시 손실이 발생하게 마련.
복용 전 몸속의 기운을 정돈하는 작업은 조금이나마 그 손실률을 줄여주는 작업이었다.
‘사막에서 불의 단약을 먹었을 땐 흡수율이 상당히 좋았던 것 같은데.’
분명 염화신무가 흡수율이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염화신무의 공능 중 하나인지, 아니면 불의 단약이 초대가 준비해 둔 것이라 상성이 좋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도 느낌이 좋아.’
왠지 불도마뱀의 심장도 흡수율이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그걸 먹고 몸이 버텨내는가는 별개의 문제긴 했지만…….
좌우지간 유릭은 몸속을 정돈하며 명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온 정신을 매몰시켜 운기조식을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불쑥 손님이 찾아와도 문제없었다.
그렇게 가게를 보는 하루 종일 유릭은 몸속의 내기를 가다듬는 작업에 몰두했고.
해가 질 때쯤 되면 일찍 문을 닫았다.
그러면 그때부터라도 글렌과 교대를 해주느냐?
아니었다.
일찍 문을 닫고서 유릭은 도시 바깥으로 나가 근처의 숲으로 향하곤 했다.
‘땅굴을 다 팔 때까진 시간이 꽤 있으니까.’
이 비는 시간을 유용하게 쓰지 않을 수는 없다.
거기다 이번 일은 지난 검술 대전과 다르게 정면에서 전투를 벌일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히려 들켜서 전투가 일어난다면 그 즉시 작전은 실패다.
중요시되는 능력은 직접적인 전투력이 아닌, 보다 은밀하고 빠른 기동력.
툭툭.
발끝을 흙바닥에 툭툭 두드리며 발목을 풀어준 그가 가볍게 땅을 박찼다.
탓!
이 숲에서 그는 미뤄두었던 경신법, 즉 경공을 수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