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31화
131화. 이놈은 또 뭐야?
달밤의 숲속에서 유릭의 몸이 날아다녔다.
때론 풀잎을 밟으며, 때론 나뭇가지를 밟으며.
그 몸은 수면 위를 튀는 소금쟁이마냥 가볍고 날랬다.
일반적인 달리기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모습.
탁.
중간에 멈춘 유릭이 지나온 흔적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꽤 어려운데.’
이 정도 습득력이면 사실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태양천보가 천마의 보법과 그 궤를 같이하는 상승의 무공이듯, 염화신무의 비급에 적힌 경공 역시 무림에서 손에 꼽힐 수준이다.
몸을 가볍게 하고 도약력을 증폭시켜주며 외부의 그 어떤 자극에도 흔들림 없이 자세를 유지하게 해준다.
심지어 소모되는 내기까지 극미하여 아무리 오랜 시간을 달려도 검 몇 번 휘두르는 것보다도 내기의 소모가 적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상승의 무공이라 칭할 만했다.
당연히 그만큼 익히는 것조차 난해하다.
그것을 이 며칠 만에 밟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태양천보를 미리 익혀놓은 덕이 있다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유릭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경공이요? 뭐 간단한 건 원래 그 정도 걸리죠? 근데 이건 기초 중의 기초 같은 거라 지름길이 없어요. 꾸준히 하는 수밖에.”]
일단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는 것이 컸다.
유화에게 물어봐도 저런 대답만 돌아올 뿐이니 더 물어볼 곳이 있을 리 없다.
사실 유화가 얘기한 간단한 경공이란 것은 염화신무의 경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그녀가 그런 것까지 알 순 없었다.
그렇다고 유릭이 염화신무의 경공이 다른 경공에 비해 간단한지 아닌지 알 수도 없었고.
그렇기에 유릭은 더더욱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결국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그였지만.
‘흔적이 너무 많이 남는다.’
절대평가의 기준으론 결코 만족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단순히 속도나 몸놀림만 보면 그럭저럭 빠르고 날래다.
하지만 흔적이 남는 게 문제였다.
풀잎이 꺾인 모습이나 나뭇가지가 짓밟힌 모습 등.
일반인들은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작은 흔적들이긴 했지만 그건 전혀 위로 사항이 못되었다.
전문적인 추적 기술을 가진 자들은 풀잎 하나 꺾인 것으로도 도베르만처럼 쫓아온다.
그런 이들에게 이 정도 흔적은 ‘나 이쪽에 있소’하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아하하, 익힌 지 얼마 안 됐으면 어쩔 수 없어요. 원래 경공의 경지를 얘기할 때도 초상비니 답설무흔이니, 남기는 흔적을 가지고 경지를 얘기하거든요. 그만큼 흔적을 줄이는 게 힘들다는 얘기죠.”]
‘초상비?’
[“초상비는 달려도 풀잎이 꺾이지 않는 경지를 말하고, 답설무흔은 눈밭에 발자국이 남지 않는 경지를 말해요.”]
‘오…… 무림의 경지 분류는 뭔가 낭만이 있네.’
어쩐지 낭만이 있는 명칭에 유릭이 제법 흥미를 보였다.
단순히 7성이니 8성이니 하는 것보단 훨씬 그림이 되지 않은가.
‘그렇게 치면 아직 멀었네. 풀잎이 꺾이지 않기는커녕 나뭇가지도 뚝뚝 끊어지고 있는데.’
[“조바심내지 않으셔도 돼요. 원래 걷고 달리는 기본 동작만큼 훈련하기 힘든 게 없으니까.”]
오히려 검을 휘두르거나 창을 찌르거나 하는 동작은 더욱 익히기 쉽다.
일상생활에서 잘 나오지 않는 동작이기에 익힐 때 이상한 버릇을 가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걷고 달리는 것은 다르다.
자연스레 몸에 익은 버릇을 버리고 새로운 동작에 익숙해져야 하니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뭐 어쩔 수 없나. 속도도 속도지만 당분간은 흔적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훈련해 봐야겠어.’
[“그러세요. 아 참,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여기서 대회가 하나 열렸거든요?”]
‘대회?’
[“신교 내에서 자체적으로 하는 작은 대회예요.”]
‘흐음.’
유릭이 갸우뚱하며 유화가 말하는 대회를 상상했다.
사내 체육대회 같은 그런 느낌인 걸까?
아니지, 유화가 몸담고 있는 신교의 규모를 생각하면 사내 대회보단 국가에서 하는 선발 대회 같은 느낌이려나?
유릭이 생각하는 신교의 대회란 겨우 그 정도의 느낌이었다.
실상은 사망자는 물론 출전하기도 전에 적대 세력에게 암살당하는 경우도 속출하는, 전쟁이나 다름없는 대회였지만 유화가 그런 얘긴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아저씨한테 배운 마법을 썼었는데요, 글쎄, 상대가 사술이다! 비겁하다! 이런 소릴 하는 거예요.”]
사술은 사이한 술법이라는 뜻이라고 했던가.
[“어이가 없더라구요. 지가 무슨 정파 무림인인 줄 아나 봐. 사이하든 뭐든 이기기만 하면 그만인데. 그쵸?”]
‘뭐 그렇긴 하지.’
[“다행히 심사위원들도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들이라 제 승리를 선언해 줬지만요.”]
‘다행이었네.’
[“다행이죠. 하도 어이없는 소리라서 순간 상대가 심사위원을 매수해 둔 건가? 그런 생각도 했었거든요.”]
얘기를 나누던 유릭이 문득 생각했다.
최근……은 아니고 좀 전부터 생각한 것이긴 하지만, 유화의 말 속에 불온한 단어가 종종 등장하고 있었다.
심사위원을 매수했냐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고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말도 하고.
후자는 유릭도 동의하긴 했지만, 적어도 옛날의 유화였다면 그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그래도 목소리 톤이 어두워진 낌새는 없는데.’
아마 천마가 다스리는 신교라는 특수한 곳에서 성장하면서 조금 거칠어진 것뿐이 아닐까.
유화도 한창 사춘기를 겪고 성장할 나이이니 어릴 때에 비해 거칠어져도 이상할 건 없긴 했다.
그 천마가 무슨 요조숙녀 교육을 시킬 것 같지도 않고.
‘오늘은 이쯤 하자.’
여하튼, 이런 식으로 숲에서 경공의 수련을 한 후.
밤이 깊어서야 유릭은 가게로 돌아온다.
그 뒤에 유릭은 지하로 향한다.
글렌은 이미 자러 갔고, 그제야 유릭은 삽과 곡괭이를 쥔다.
한동안 남아서 두어 시간 작업을 진행하고, 새벽 느지막이 돼서야 그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시간에 일어나 가게 문을 여는 매일.
그런 일과가 한동안 꾸준히 이어졌다.
* * *
그날도 유릭은 평소대로 일어나 가게 문을 열었다.
책을 펼쳐놓아 독서를 하는 척하며 몸속의 기운을 가다듬는다.
동시에 어젯밤 수련했던 경공에 대해서도 머릿속으로 꾸준히 이미지를 하고 있었다.
꾸준한 이미지 트레이닝은 실제 훈련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 유릭의 지론이었다.
그러던 중.
-딸랑.
입구에 걸어놓은 종이 울렸다.
손님이 들어왔다는 뜻.
“어라? 할아버지, 드디어 청소하셨네요.”
익숙한 듯 가게 안으로 들어온 손님이 카운터에 앉아 있는 유릭을 보곤 눈을 깜빡였다.
“어…… 새로운 직원분이신가요?”
“새로운 주인입니다만.”
“주인이요? 설마 여길 사신 거예요?”
손님은 전 주인과 아는 사이였던지, 유릭이 가게를 샀다는 사실에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로 하진 않았지만 표정엔 다 드러난다.
이 낡고 허름한, 장사도 안 되는 가게를 돈 주고 샀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겠지.
그렇게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이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제 소개가 아직이었네요. 저는 자클린이라고, 이 옆집에 살고 있어요. 옆이라곤 해도 거리가 좀 있지만요. 아하하.”
“…….”
-어르신, 저 옷이요…….
메르의 말을 들으며 유릭이 살짝 찌푸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유릭에게서도 소개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던 자클린은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움찔거렸다.
그러다 이내 유릭의 시선이 자신의 옷에 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곤 옷자락을 펼쳐 보여줬다.
“이 옷 말인가요? 제가 루메나 교의 사제거든요. 아직 공부 중인 몸이지만요.”
그래, 사제복.
그녀는 루메나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원래는 신전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방학이어서 집에 온 거예요.”
몰랐다. 설마 이 잡화점의 이웃이 사제가 사는 집이었다니.
찡그려지려는 얼굴을 유릭이 애써 관리하며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안입니다.”
“아! 잘 부탁드려요!”
자클린이 기뻐하며 그 손을 맞잡았다.
그 손을 통해서 신전 특유의 그 엄숙한, 목재의 향과 비슷한 향기가 올라왔다.
활짝 웃는 그녀와 마주 웃으며 악수를 나누는 유릭.
그러나 속으론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하필 옆집이 사제 집이라니.’
-재수 옴 붙은 거 아니에요?
메르가 속닥거리는 것처럼, 좋은 징조는 절대 아니었다.
* * *
천신전에는 전 대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이를 모아 신학을 가르치는 곳이 있다 하였다.
일종의 기숙학교 비슷한 것인데, 당연히 루메루스에 사는 이들도 합격만 한다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전원 기숙사제인 곳이기에 자클린은 이 루메루스가 고향임에도 기숙사에 들어가 있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조사할 땐 몰랐던 건가.’
몰래 땅굴을 파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가진 가게를 조사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웃이 기숙학교 학생인지까지는 조사하지 못했다.
‘뭐…… 그냥 이웃일 뿐이니 상관없으려나.’
이웃이란 건 가깝게 지낸다면 얼마든지 가까워질 수 있지만, 반대로 멀게 지낸다면 한없이 멀어지는 존재다.
유릭에게 친해질 생각 따윈 없었으니 머지않아 알아서 멀어지리라.
라고 생각했으나.
“유안. 이거 저희 집에서 구운 빵인데요. 엄마가 전해주고 오래요. 식사하셨어요?”
“유안. 이번 주 미사 가실 거죠? 혼자시면 저희 가족이랑 같이 가실래요?”
“유안. 내일 말인데…….”
자클린은 시시때때로 가게로 찾아오곤 했다.
집에 붙어 있는 것이 심심한 건지, 아니면 원체 오지랖이 넓은 건지.
방학이라더니 친구들과 놀러 갈 약속이라든지 없는 것일까?
“친구들이요? 제 친구들은 다 다른 나라 사람이라 귀국했어요.”
“아 그래?”
웃으며 맞장구치는 유릭이었지만 속으론 한숨이 나왔다.
한번은 글렌에게도 얘기를 하였다.
매일 찾아오는 여자가 있으니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고.
“제 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책임지고 잘 파고 있을 테니.”
한창 곡괭이질을 하던 글렌은 옷자락으로 땀범벅이 된 이마를 닦으며 대답했다.
“그러니 그쪽은 주인님께서 책임지고 잘 해주시지요.”
“알고 있어. 그냥 부주의하게 가게로 올라오다 들키거나 하지 않게 조심하란 얘기였다.”
딱히 글렌에게 상담 같은 것을 하러 온 건 아니었다.
글렌은 땅굴 쪽에 집중해 주었으면 했기에 가게의 일은 온전히 유릭의 몫이다.
‘그래도 조금 귀찮은 것 빼고는 별문제 없을 것 같군.’
다행히도 자클린이 매일 찾아오는 것이 큰 문제로 번질 기색은 없었다.
그녀가 막무가내로 지하까지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글렌이 땅을 파는 소리가 위쪽에까지 들리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주의 깊게 대응만 잘한다면 들킬 일은 없으리라.
그렇게 매일 자클린이 찾아오는 나날에도 점차 적응해 가던 유릭이었으나.
“당신, 이 가게 새 주인이야?”
어느 날 가게 문을 열러 밖에 나가보니 웬 젊은 남자가 인상을 찌푸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길이가 같고 끝부분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하얀 갑옷.
‘성기사는 또 왜…….’
유릭이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그를 맞았다.
“손님이십니까? 기사님께 필요한 그런 물건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들어오시죠.”
“아니, 손님이 아니라.”
젊은 성기사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확 유릭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러곤 얼굴을 가까이 대며 으르렁거렸다.
“당신, 자클린이랑 무슨 사이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유릭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이놈은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