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33화
133화. 귀엽다 귀엽다
성녀라 함은 신의 계시를 받은 자를 말한다.
신의 선택을 받아 말을 전달할 자로 인정받은 존재.
그것만이 단 하나의 기준이며, 신력이 높다거나 신심이 깊다거나 하는 것은 사실 별 상관이 없다.
계시를 받게 되면 그 신체 어딘가에 성흔이 새겨지게 되며, 신학에선 그 성흔이야말로 신과 통하는 통로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과거의 기록 중에는 태어나 단 한 번도 교회에 가 본 적이 없던 어린아이가 성녀가 되었던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아이라도 성흔을 통해 막강한 신력을 사용한다 하였다.
성흔은 신의 말을 전달받는 통로인 동시에 신의 신력을 내려받는 통로이기도 한 것이다.
“성흔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네, 네!”
일흔 살가량의 노인이 자클린에게 정중히 얘기했다.
그 자체가 굉장한 부담인 듯 자클린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커다란 의식 때 먼발치에서나 봐왔던 이 나라의 지도자, 교황 니콜라이 4세였으니까.
자클린이 그에게 손목 안쪽의 성흔을 보여주었다.
니콜라이가 양손으로 자클린의 손바닥을 잡고는 손목을 살핀다.
이내 그의 손에서 환한 빛이 피어오르더니.
“흐음……!”
니콜라이가 신음성을 토했다.
“과연…… 진짜로군요…….”
성흔에선 정말로 신의 힘이 느껴진다.
루메나 교의 신자들이 기도와 수행을 통해 쌓아 올린 그런 신력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린 듯한 정순한 느낌의 신력이.
“흠…….”
루메나 교에 마지막으로 성녀가 태어났던 것은 족히 수십 년 전, 그가 아직 어렸을 때였다.
근 60년 이상이나 계시가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오랜 침묵을 깨고 루메나께서 말씀을 내려주셨다.
성국 전체가, 그리고 대륙에 퍼져 있는 교단 전체가 들썩거릴 소식이었다.
“흐음…….”
고뇌의 빛을 띄우며 그가 자클린의 손바닥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성흔의 확인이 끝났음에도 손을 놓아줄 기색이 없어 자클린이 조심스레 얘기했다.
“저, 저…… 손 좀…….”
“아 죄송합니다.”
니콜라이가 슬며시 웃더니 그녀의 손을 놓았다.
자클린이 움츠리며 두 손을 모아 앉았다.
“자클린 사제님. 학교의 신부에게 얘기는 들었습니다. 평소 성실히 생활하며 친우들을 배려할 줄 알고 신학에도 열심히 매진하셨다고.”
니콜라이가 그런 말을 하였으나 자클린은 무안하기만 했다.
자못 대단한 듯이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 평범하게 지냈을 뿐인데.
성실하고 배려심이 있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아이들은 기숙학교에는 널리고 널린 인간상이었다.
그런 평범한 자신이 어째서 신의 계시를?
“그냥 평범하게 지냈을 뿐인데요.”
“허허, 그 평범한 것이 가장 대단한 것이랍니다.”
“예에…….”
그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녀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스스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걸어왔다 생각했기에, 루메나께서 자신을 선택할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계시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니, 이런 곳에서 얘기하긴 조금 그렇군요. 일어납시다.”
가족들과 살고 있는 집을 이런 곳이라고 말하는 것에 잠깐 울컥하려 했으나.
‘하긴 교황님 입장에선 좁고 낡은 집일 테니까…….’
이내 그렇게 납득하곤 그에게 물었다.
“어, 어디로 가는 거죠?”
“추기경들을 소집해 놨습니다. 그곳에서 계시의 내용에 대해 알려주시지요. 내친김에 거처도 옮길 테니 짐을 챙기시지요. 중요한 물건이라도 있습니까?”
계시에 대해 얘기하러 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거처를 옮기라는 말은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제 집은 여긴데…….”
갑자기 집을 나오라니 별로 따르고 싶지 않은 말이었으나.
“뭐라고 하셨나요?”
“아, 아뇨. 알겠습니다.”
교황의 지시에 차마 거역할 배짱은 그녀에겐 없었다.
* * *
근방 일대에 성기사들이 가득했다.
만에 하나의 일 따윈 만들지 않겠다는 듯 그들의 긴장은 대단했다.
60년 만에 등장한 신의 계시에 그들 모두 사명감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릭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자신보다 심각한 이는 없을 거라고.
‘왜 갑자기 없던 성녀가 나타난 거지? 혹시 내가 모를 뿐이고 회귀 전에도 있었던 일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루메나 교가 어디 시골에 박혀 있는 작은 종교도 아니고, 전 대륙에 퍼져 있는 유명한 종교다.
수많은 교단 중 유일하게 하나의 나라까지 건국한 종교.
그런 곳에서 성녀가 탄생했다는데 소문이 퍼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회귀 전이랑 지금이랑 달라진 점이라면…….’
길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하나뿐이다.
자신이 이 땅에 있다는 것.
회귀 전 이 시기에, 유릭은 본래 아칸 쪽의 아케인 아카데미에 유학생 신분으로 재적하고 있었다.
당연히 성국엔 발도 들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이 땅을 밟고 있다.
심지어 성역에 불법 침입을 하기 위해 땅굴을 파고 있기까지.
그 계획은 마무리 단계만 남아 있는 상태라, 예정대로라면 내일모레쯤에는 성역을 찾아 침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브레이크가 들어온 것이다.
‘정말 나 때문인가?’
자신 때문인 것일까? 혹시 그냥 자의식 과잉이 아닐까?
자신 하나 때문에, 성역 한번 밟아보겠다는 침입자 하나 때문에 신이 몸소 나서서 계시를 내릴 정도일까?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당장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어떤 가설을 세우더라도 추측의 영역을 지나지 않는다.
그때, 옆집이 열리고 자클린과 교황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몸에 손을 대고 있진 않았지만 미묘하게 거리가 가까웠다.
그게 부담스러운지 자클린의 발걸음은 무척 불안정했고, 기어코 돌부리에 발을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교황이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를 잡아 부축해 주었다.
그때.
“어이! 멈춰!”
“이, 이거 놔! 자클린!”
근처에서 소란이 들려온다.
돌아보니 얼굴이 잔뜩 붉어진 멜딘이 두 명의 성기사에게 엎드린 모습으로 제압당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클린과 교황에게 달려들다 붙잡힌 모양이다.
멜딘의 목소리에 자클린이 그쪽을 돌아보았으나.
―빨리 가시지요. 열두 추기경이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시간을 더 뺏을 생각이십니까?
―아, 아뇨. 갈게요.
자클린이 미련이 남은 듯 멜딘 쪽을 보았으나 교황의 재촉에 결국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신전을 향했다.
멜딘은 두 성기사에게 ―아마 그의 선배일― 붙잡혀 이만 갈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자클린과 교황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멜딘도 풀려났다.
복잡한 얼굴로 찡그리고 있던 그는 유릭을 발견하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보고 있었냐.”
그는 조금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린 채 흙먼지를 털었다.
자클린이 사라진 천신전 쪽을 힐긋 보며 유릭이 물었다.
“교황에 대한 소문이 좋진 않은가 보지?”
“쳇…….”
멜딘은 차마 상관을 욕할 순 없었는지 혀만 찰 뿐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유릭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도둑 길드에서 받은 정보 중엔 교황에 대한 인식도 있었으니까.
평범한 국민들이야 잘 모르고 추앙하고 있지만, 신전 내부 사람들 사이에선 결코 좋은 소문이 돌고 있지 않았다.
‘혓바닥이 두 개인 뱀 같은 자라고 했던가.’
가장 인식을 나쁘게 한 일화는 그것이었다.
교황 자리는 추기경들의 투표로 선출되는데, 현 교황인 니콜라이 4세는 과거 상대 후보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음모를 수없이 꾸몄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서 다른 추기경들을 매수하기까지 해서 교황에 선출되었다는 소문이 가득했다.
이미 수십 년은 된 일이라 진위를 아는 이는 적었지만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는 나지 않는 법이다.
“자클린이 성녀라…….”
“…….”
유릭이 중얼거리자 멜딘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소꿉친구가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를 얻었다는 데도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이야? 교황 때문에?”
“아니, 그것도 그건데…….”
“그런데 뭐.”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도 꽤나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만큼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소꿉친구가 알고 봤더니 왕의 핏줄이라 하루아침에 공주가 되어 있는 걸 목격한, 대충 그런 느낌이 아닐까.
‘그나저나 어쩐다.’
뭐 그는 어찌 됐든 유릭은 본인의 일로 머릿속이 한가득이었다.
본래 계획은 천신전의 경비가 빈 시간에 성역을 찾아 파고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힘들어졌다.
성녀가 탄생했으니 한동안은 비상시국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24시간 철저히 경비할 텐데.’
그렇게 되면 도저히 성역을 찾아다닐 수는 없어진다.
물론 그런 경비 상태를 몇 개월씩 유지할 순 없을 테니 기다리면 되겠지만…….
―큼큼!
한창 유릭이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일대를 포위한 성기사 중 하나가 헛기침을 하여 주목을 끌었다.
무슨 말을 하려 하나 봤더니.
―잠시 이 일대의 검문이 있겠다! 성녀님의 안전을 위한 것이니 자발적으로 협조해 주길 바란다!
“!”
유릭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 검문 말인가.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걸 테니까.”
멜딘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지만.
‘젠장.’
유릭에겐 그렇게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 * *
검문은 한쪽부터 차근차근 진행되었고, 마침내 유릭의 잡화점에게까지 그 마수가 뻗쳤다.
“흠…… 외지인인가?”
“소르닐 왕국 아드레이 자작가의 유안 아드레이입니다. 작위는 없습니다.”
“그 먼 데서 이곳까진 어째서?”
“가문이 망해서요. 이리저리 떠돌다 오게 되었습니다.”
“흐으음…….”
다른 집은 적당히 넘어갔던 성기사들이 유릭에게만은 꽤나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야 다른 집은 모두 오랫동안 이 땅에 살았던 이웃들이었지만 유릭만은 달랐기 때문이다.
외지인이 경원시 되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듣기로 성녀님께서 최근 이곳에 많이 방문했다던데. 무슨 일이 있었지?”
“빵을 나눠준다던가 그런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냥 이웃 간의 평범한 교류예요.”
“듣던 대로군.”
그럼 왜 물어본 거야.
이미 주변에서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 굳이 물어보는 꼴이 무척 짜증 났지만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한 명이 그렇게 물어보는 사이 다른 두엇의 성기사가 잡화점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괜히 어지럽히고 있지만 그래 봤자 수상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
“어? 이곳에 지하로 가는 문이 있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지하의 입구에 성기사들이 모여들었다.
‘글렌, 제대로 해놨겠지?’
성기사들이 다른 집을 검문하는 동안 유릭은 글렌과 함께 급히 흔적을 치웠다.
그러나 중간에 성기사들이 도착하는 바람에 미처 다 치우지 못하고 그 혼자 올라온 것이다.
글렌이 마무리를 잘 해줬으면 좋겠지만…….
“내려가 봐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문을 열고 성기사들이 우르르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가장 뒤에서 따라가며.
화륵.
유릭이 손에 기운을 모았다.
전신의 세포가 활성화되며 몸이 전투태세로 돌입한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앞에서 내려가는 성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만약 글렌이 다 치우지 못해서 들키게 된다면…….
이윽고.
벌컥!
지하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동시에 유릭의 손 역시 움찔거렸고.
“별건 없군. 그냥 창고인가.”
다행히 휘두르는 일 없이 그가 손을 내렸다.
여기서 들켰다면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납치 감금 계획을 실행했어야 했을 텐데.
글렌이 잘 치워놨는지 지하실 내부는 잡다한 잡동사니가 쌓여 있을 뿐이었다.
판자를 뜯어냈던 바닥도 어떻게 잘 맞춰놨고, 그 위엔 곡물 포대가 몇 자루 쌓여있다.
안에 든 것은 곡물이 아니라 땅을 파고 나온 흙이었지만 겉으로 봐선 구분할 수 없다.
“수고 많았다. 여러모로 의심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는데요.”
“이해해 줘서 고맙다. 그럼 우린 이만 가지.”
지금껏 취조하듯 몰아붙였던 성기사들도 마지막에는 사과를 하며 떠나갔다.
일단 한고비는 넘겼지만.
‘……앞으로가 문젠데.’
정작 중요한 문제는 아직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유릭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어떻게 할까요.”
“글쎄.”
성기사들이 모두 떠나간 후 유릭은 곧바로 가게를 닫았다.
이 비상사태에 느긋하게 가게나 보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이만한 일이 있었으니 가게 문을 닫는 것이 부자연스럽진 않았다.
똑. 똑.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반대쪽 손은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린다.
신의 계시.
미처 상상도 못 했던 말도 안 되는 장애물이 나타났다.
그 탓에 당장 신전의 경비는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고, 무엇보다 계시의 내용도 문제다.
만약 땅굴의 존재를 콕 집어 언급하는 내용이라면, 그것으로 이미 자신들은 체크 메이트인 것이다.
‘뭘 훔치려는 것도 아니고 잠깐 좀 들어갔다 나온다는데 쪼잔하게.’
괜히 계시를 내린 신이라는 작자에게 투덜거려 보았지만 대답이 나올 리 없다.
이 꽉 막힌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까.
성역의 위치도 찾고 계시의 내용도 확인할 좋은 방법이…….
똑.
그러던 중 유릭의 손가락이 멈췄다.
“좋은 생각이라도?”
글렌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지금껏 찡그리고만 있던 유릭의 표정은 지금은 달라져 있었다.
오히려 해볼 만하다는 표정.
“계시의 내용은 자클린이 알고 있잖아.”
“그야 그녀가 계시를 받은 장본인이니까요.”
“그리고 성녀가 되었으니 성역에도 한 번은 찾아가겠지?”
“아마 그렇겠죠. 오히려 방문하지 않는 쪽이 이상할 겁니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할 열쇠는 자클린이란 소리.
“자클린에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만사 해결이잖아.”
“어떻게요? 이번엔 그녀가 있는 쪽으로 땅굴이라도 판답니까?”
“아니.”
유릭이 품에서 육포 주머니를 꺼냈다.
그러자 가게 안 진열장 구석의 쿠션에서 웅크리고 있던 메르가 벌떡 일어났다.
“메르. 자클린이 너 볼 때마다 귀엽다 귀엽다 하면서 마구 쓰다듬었었지?”
접근할 빌미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