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50화
150화. 우리
환한 샹들리에가 사위를 비춘다.
첼리스트의 연주 소리가 회장에 어우러지며 여러 남녀들의 춤사위가 이어졌다.
그 한중간에 유릭과 재스민이 있었다.
“클레어한테 들었다고?”
“네. 정혼자시라면서요?”
“아니, 그건 취소됐는데.”
주변 남녀들이 밝고 활기찬, 때론 간드러지는 담소를 나누고 있는 데 반해 유독 이쪽만 취조 분위기다.
“그 녀석이랑은 무슨 관계지?”
“응…… 그냥 아는 사이?”
“누가 모르는 사이냐고 물었나?”
“아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그래서 뭔 사인데?”
“사막에서 만났어요. 보시다시피 전 사막 출신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꽤 전에 들었던 소식이 떠올랐다.
클레어가 샤니스에게서 독립해 자신만의 세력을 꾸렸고, 사막 왕국 카자르가 가장 먼저 그곳에 합류했다고.
카자르 왕국은 루카스에게 물을 먹은 일이 있으니 다른 형제를 지지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필리페나 샤니스가 아닌 클레어를 지지하게 된 것이 의아했을 뿐.
“카자르가 클레어 아가씨를 지지하겠다고 나서긴 했는데,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렇겠지. 클레어는 아칸 내에서도 가장 약소 세력일 테니까.”
“그래도 어찌어찌 협약은 잘 이루어졌다고 해요.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클레어와는 그때 만났다는 건가?”
“절 주워주셨죠. 그 시기 저는 술집이나 여관 같은 데서 노래하면서 하루하루 먹고살고 있었거든요.”
재스민이 과거를 회상하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 과정에도 여러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정과 사연이 있게 마련이니까.
어찌 됐든 대강은 알 수 있었다.
그녀와 클레어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끈끈한지도 대략적으로나마.
-은인이라도 떠올리는 느낌인데요?
‘내가 보기에도 그렇긴 한데, 방심은 하지 마.’
무대에 오르는 배우인 만큼 연기일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때쯤 회장 내에 울려 퍼지는 곡조는 클라이맥스에 치닫고 있었다.
연주 소리가 크게 울리고 모두가 그에 심취한 한순간.
춤을 추던 유릭과 재스민은 지금까지 중 가장 가까이 붙게 되었다.
그 한순간에, 그녀가 유릭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절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
대답할 틈도 없이 둘은 다시 떨어지게 되었고 음악도 천천히 끝을 향했다.
“저, 돌아가고 싶어요.”
“돌아가? 사막에?”
“아뇨, 아가씨 곁에요. 지금은 아칸의 본가에 계실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다소 빨라졌다.
음악이 끝나기 전까지가 마지막 기회라는 듯.
지금 이 순간 전하고 싶은 모든 말을 전해야 한다는 듯.
“여기서 배우 일을 하고 있는 건 네 의지가 아니란 말인가?”
“이곳에 온 건 제 의지가 맞아요. 단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게 문제죠.”
유릭이 잠시 눈을 찌푸렸다.
“그건 빚이나 계약 같은 종류의 얘기는 아니겠지?”
끄덕끄덕, 재스민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다. 그런 얘기라면 굳이 자신에게, 그것도 이 한 번의 기회가 마지막인 것마냥 다급할 리 없었으니까.
“필리페로군.”
“……네.”
“그냥 잠깐 보내 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자는 제가 아가씨와 아는 사이란 걸 몰라요. 알아서도 안 되구요. 그래서 아가씨랑은 연락도 제대로 못 하고 있어요.”
……과연.
-뭔 소리예요?
‘쉿. 나중에 얘기해 줄게.’
갸웃거리는 메르를 달래며 유릭이 재스민과의 대화를 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음악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젠 정말 한마디 정도밖에 나눌 시간이 없다.
“어째서 나지? 나는 로스카다. 네 아가씨와는 적대 관계인데.”
“무슨 소리세요? 로스카랑 아칸은 동맹 관계잖아요?”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유릭이 피식 웃었다.
동맹이 아니라 휴전이고, 그 둘은 정말로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녀가 굳이 동맹이라고 말한 이유는 알겠다.
“차라리 바깥의 적인 내가 내부의 적인 필리페보다는 믿을 수 있다 이거군.”
“아가씨의 정혼자분이시기도 하구요.”
아니라니까 그러네.
천천히 여운을 남기며 연주가 끝이 났다.
춤을 추던 남녀들이 한 걸음씩 물러난다.
그들이 예를 차리며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 무렵 유릭은 자신의 앞 포켓에 들어 있는 못 보던 쪽지를 발견했다.
그걸 굳이 열어보는 실수를 범하진 않은 채, 그가 재스민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다시 추고 싶습니다만, 바쁘신 분에게 너무 그러는 것도 실례겠죠.”
더는 이런 건 사양이란 뜻이었다.
“어머, 아니에요. 춤이라면 언제든 신청해 주세요.”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뭇 남성들의 시선이 따가워 더 이상은 못 있겠군요.”
“아하하.”
간드러지는 말과는 달리 덤덤하기만 한 유릭의 모습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배우 하셔도 되겠어요.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그런 말씀을 하시고.”
“칭찬으로 듣죠. 그럼 이만.”
들을 건 다 들었고 나름의 수확도 있다.
유릭이 재스민에게서 멀어져 다시 무도회 구석으로 향했다.
도중에 힐긋 돌아보니 그녀가 이쪽을 향해 살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 때문에 자신에게 한층 더 남자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굳이 구석으로 가는 의미를 좀 헤아려 줬으면 좋겠는데.’
그가 한숨을 쉬며 아예 회장의 출구로 향했다.
지금이라면 시선의 압박에 못 이겨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
그러던 중.
“…….”
시선 속에서 유독 하나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누구의 것인지는 뻔했다.
‘필리페 아칸.’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만 자신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유릭도 놈의 얼굴은 회귀 전에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로스카와 아칸.
휴전 중인 관계.
그리고 휴전은 절대 동맹이 아니다.
“…….”
“!”
유릭이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주자 놈의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픽 웃으니 놈의 눈에서 살기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오로지 유릭 한 사람을 향해서.
‘마스터라는 놈이 이런 일로 살기나 피우고 있고.’
지금까지 유릭이 만난 마스터 중에 가장 폼 떨어지는 놈이다.
아니, 어쩌면 성국에서 이룬 환골탈태 덕에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놈을 한 번 도발해 준 유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도회장을 나왔다.
* * *
무도회에서 나온 유릭은 곧바로 여관으로 돌아왔다.
단단히 묶인 타이를 풀며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던 발터와 만날 수 있었다.
“오, 어떻게 됐니, 유릭?”
“그게요.”
유릭이 찬찬히 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남녀 관계를 상상하며 실실 웃던 발터는,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가자 점점 웃음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말이 사실이냐?”
“그 여자가 연기를 한 게 아니라면요.”
“끄응…… 골치가 아파지는데.”
“그래도 우리 쪽에 이득이냐 손해냐 골라보라면-”
“이득인 쪽 같기는 한데.”
그때 유릭의 품에서 나온 메르가 유릭의 소매를 쭉쭉 잡아당겼다.
그 행위는 유릭뿐만 아니라 발터의 이목까지 끌었다.
“어이구, 우쭈쭈~ 우리 고양이 귀엽기도 하지.”
발터는 한껏 풀린 얼굴로 으흐흐 미소를 지으며 메르를 쓰다듬으려 했다.
메르는 귀찮은 듯 손을 피해 다녔지만 발터의 눈엔 그것조차 귀엽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아예 발터를 피해 유릭의 어깨에 올라탄 메르가 유릭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무슨 얘긴데요. 왜 어르신들만 아는 얘기해요!
유릭이 대답했다.
‘딱히 드문 얘기는 아니고, 재스민 그 여자 아마 스파이일 거다.’
-아, 스파이…… 네? 스파이요? 첩자?
‘어.’
그녀는 클레어에게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필리페에겐 비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클레어 측의 정보원이란 얘기지.’
가문의 정보원이란 것은 비단 어둠 속에 사는 그림자 같은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밝은 세상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일개 시민들도 모두 정보원일 수 있다.
대낮에 과일을 파는 중년의 청과상이라든가, 상단에서 사무 일을 보는 전도유망한 청년이라든가.
혹은 근래 들어 유명해진 오페라 배우일 수도 있겠지.
-아항. 일부러 필라프인가 뭔가 하는 걔한테 접근해서 정보를 캐내고 있다는 거군요? 자기가 모시는 아가씨의 정적이니까.
‘응. 그리고 필라프가 아니라 필리페.’
-근데 필라프한테 정보를 빼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걸 가지고 귀환할 길이 요원하다, 뭐 이런 얘기겠지.’
아무리 라이벌 기업의 산업 기술을 빼낸 USB를 들고 있다고 해도, 그걸 들고 귀환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지금 재스민의 상태가 딱 그런 상태일 터.
단지 돌아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연락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필리페가 더 질척거리는 모양인데?’
-흠, 확실히. 아까 나올 때 어르신을 죽어라 노려보긴 했죠. 필라프 주제에.
‘춤 한번 춘 게 다인데 속 좁은 녀석 같으니라고.’
사실 그 정도로 노려본 것은 유릭이 일부러 도발했기 때문도 있었지만, 둘은 그런 사소한 일 따윈 잊은 채 쯧쯔 혀를 찼다.
이미 둘의 마음속에서 필리페는 싫다는 여자에게 집착하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뭐 사실과 크게 다른 얘기도 아니었다.
“결국 얘기는 둘로 좁혀지는군.”
발터가 팔짱을 끼며 정리하듯 입을 열었다.
“길 잃은 정보원이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든가.”
“혹은 함정이든가.”
간단한 이야기다.
이야기가 사실이면 재스민은 아군이고, 거짓이면 적이라는 이야기.
문제는 그 참ㆍ거짓을 어떻게 판별하냐는 건데…….
“유릭. 그녀에게 받았다는 쪽지는 열어봤니?”
“예. 이겁니다.”
아까 춤이 끝난 후 그의 포켓 속에 들어 있던 것.
재스민이 은밀히 넣어놓은 쪽지였다.
“뭐라고 적혀 있던?”
유릭이 쪽지를 펼쳐 발터에게 보여주었다.
“제7번 상업지구 레이크거리 31번지…… 이거 주소 아니냐?”
“벨파스트에서 쓰는 주소인 것 같아요.”
그곳에 적혀 있는 건 정체 모를 하나의 주소였다.
* * *
“오늘은 즐거웠습니다, 재스민.”
“저도요.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어요.”
무도회가 끝나고 하나둘 마차가 돌아가는 와중, 필리페와 재스민은 이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좋게 헤어지고 있나 싶었지만 재스민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필리페의 웃음이 정말로 웃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아까부터 그의 기분은 심히 좋지 않았다.
“그런데…… 실례가 아니라면 로스카와 무슨 사이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올 것이 왔다.
재스민은 살짝 긴장하였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필리페와 같은 명성이나 전투 능력 같은 건 없었지만, 연기에 한해서만은 프로였다.
“오늘 처음 뵙는 건데요?”
“그런 것치곤 꽤나 친밀해 보이시던데…….”
“아하하, 아니에요. 그냥 예전에 키웠던 고양이가 생각나서요.”
“고양이요?”
“하얀 털에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를 가진 고양이였는데…… 지금은 수명이 다해 죽어버렸지만요.”
“아. 미안합니다.”
필리페가 사과를 한다.
그럴 필욘 없다. 전부 거짓말이니까.
하얀 털과 보석 같은 눈동자를 가진 비싼 고양이 따위, 그녀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길러본 적이 없었다.
사막의 고아 출신인 그녀는 하루 벌어 산 빵 한 조각으로 하루를 버텨내던 거렁뱅이였으니까.
부모가 물려준 미모가 있던 그녀에겐 더 쉽고 간단한 돈벌이가 있었지만, 그런 유혹이 들 때마다 그녀는 노래했다.
그것만으로 버티길 하루하루.
그러나 그것도 기어이 한계에 치달았다.
아무리 그녀가 거부한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때, 그녀가 만난 것이 클레어였다.
‘유릭 공자. 제발 부탁드려요.’
그렇기에 돌아가고 싶다.
또 한 대 떠나가는 마차를 보며 재스민은 아가씨의 정혼자라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참가자 명단에서 유릭 로스카란 이름을 보았을 땐, 이것만이 유일한 기회라 생각했다.
무도회가 시작하고 내내 그녀는 유릭을 찾았다.
필리페의 손에 이끌려 명사들과 인사를 나눌 때도, 팬이라며 다가오는 남자들의 신청을 받아 춤을 출 때도, 시선의 한쪽은 유릭의 새하얀 머리칼을 찾았다.
드디어 구석에 숨듯이 서 있는 유릭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가 먼저 다가가면 의심받을 줄은 알았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에 띌 것은 분명히 알았지만 유일한 동아줄을 놓칠 수 없었다.
이대로 유릭과 대화할 기회도 없이 무도회가 끝나 버린다면, 다시는 그와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전할 건 모두 전했어.’
자신의 처지와 필리페의 약점이 될 수 있는 단서까지.
남은 건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일뿐이다.
다그닥-
그때, 익숙한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마부석에 앉은 이는 특이하게도 여성인 마부였는데, 그녀는 필리페가 일부러 데려온 부하였다.
“가시는 길 제 부하가 모셔다드릴 겁니다. 요새 밤길이 워낙 흉흉하지 않습니까.”
“고마워요, 공자님.”
“살펴 가십시오.”
살포시 미소를 지은 후 그녀가 필리페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필리페와 인사를 나눈 후 마차 문을 닫는다.
그때 이미 그녀의 미소는 싹 사라져 있었다.
필리페와 같은 남자는 그녀의 인생에서 수도 없이 봐왔다.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으며 그녀가 달리는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거대하고 찬란한 도시는 그녀에겐 맹수와 함께 있는 우리에 불과했다.
* * *
유릭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다.
이 주소에 있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시가 급한 일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는 발터와 함께 당장 주소지를 찾았다.
물론 발터의 부하들도 부르면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거리에 대기시킨 채였다.
“여긴가?”
“주소는 맞는 것 같은데요.”
유릭과 발터가 발견한 것은 도시의 구석에 위치한 낡고 허름한 창고였다.
한때 곡물 창고 따위로 쓰인 것인지 크기만은 거대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것처럼 낡고 해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폐허 같은 창고.
“응?”
그때 유릭의 감각에 묘한 냄새가 잡혔다.
창고에서부터 은은히 풍기는 그것은 맡아본 적 없는 풋풋한 풀 내음이었다.
“이건…….”
같은 것을 맡고 있는지 발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는 냄샙니까?”
“그래. 벨파스트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이런 게 돌고 있으니 주의하라며 가져온 이가 있었어.”
“독초인가요?”
“마약이다.”
“…….”
유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재스민이 건네준 주소는, 벨파스트에 돌고 있다는 마약의 보관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