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51화
151화. 이젠 없어요
발터 정도 연륜이 있다면 대륙 곳곳에 친한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 벨파스트에도 과거에 연을 맺은 지인이 있어, 도시에 왔을 때 발터는 가장 먼저 그를 찾았다.
마약에 대한 얘기는 그때 들었던 것이다.
최근 새로 등장한 종류의 약이 있는데 쾌감과 의존성이 남달라 다른 종류의 마약들을 모두 밀어내고 있다고.
이것이 그 약이고 특징으론 풋풋한 풀 내음이 나니 혹시라도 음식이나 마실 것에 이런 냄새가 난다면 의심해 보라고.
그 지인은 발터에게 이렇게 경고해 주었다.
당시 발터는 그렇게까지 주의 깊게 듣진 않았다.
어느 누가 천하의 로스카에게 몰래 약을 먹이려 하겠는가.
거기다 마스터인 그는 약간의 독극물 정도는 앉은 자리에서 배출해 낼 수 있기에 큰 위험도 없었다.
그런 생각에 흘려듣긴 했지만, 그래도 약의 냄새만큼은 정확히 기억해 둔 그였다.
바로 그 냄새가 저 창고에서 은은히 흘러나오고 있다.
일반인들은 맡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냄새였지만 발터와 유릭의 코를 피해 가진 못했다.
“필리페가 벨파스트에서 약장사를 하고 있단 말입니까?”
“정황만 보면 그렇지 않겠느냐.”
일차적인 단서만 놓고 보자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것은.
“기회군요.”
둘에게 있어선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경매의 강력한 경쟁자 중 하나인 발터를 도시에서 아예 퇴출시켜 버릴 기회.
넥타르가 출품되는 골든 스케일의 주최자는 벨스 가문이고, 벨스 가문은 벨파스트의 지배자다.
어떤 지배자가 제 영지의 물을 흐리고 있는 미꾸라지를 좋아하겠는가.
“제대로 고발만 할 수 있다면 강력한 한 수가 되겠어.”
“그러려면 단서가 필요하겠군요.”
“그리고 현행범만큼 정확한 단서는 없지.”
아주 쿵짝이 잘 맞는 숙부와 조카였다.
서로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두 사람이 짧게 눈짓 후, 창고의 문을 쾅! 걷어찼다.
“어래? 아무도 없는데?”
“그러게요.”
그러나 창고 안은 텅 비어 있는 채였다.
찢어져 널브러진 포댓자루나 다 썩어 거뭇거뭇한 밧줄, 어디로 들어왔는지 낙엽이나 나뭇가지 같은 것들이나 널려있는 빈 창고였다.
끼이익-
두 사람이 탐색을 하던 중 뒤에서 천천히 문이 닫혔다.
유릭과 발터는 그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철컥, 문이 닫힌 직후.
“죽여!”
화르륵!
바닥을 뚫고 지하에서 불덩어리들이 치솟기 시작했다.
“…….”
유릭이 매우 당연한 듯 피해내며 검을 뽑아 휘둘렀다.
콰과과과광!
폭심공의 기운이 담긴 녹시아가 땅을 그으며 바닥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이쿠, 깜짝이야.”
발터가 너스레를 떨며 불덩어리를 피한 후, 유릭이 뚫은 바닥으로 몸을 던진다.
허벅지에서 팔꿈치만 한 단창을 빼 든 그가 지하에 있는 인영을 보이는 대로 일단 찌르고 보았다.
“아악!”
“고수다! 방심하지 마라!”
분명히 기습을 한 건 이쪽인데도 오히려 유릭과 발터가 기습을 한 모양새가 되었다.
둘의 빠른 대응은 한순간으로도 남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도망가지 않는다.
그것에 발터가 씨익 웃었다.
“확실히 뒷배가 있군.”
이 정도 실력자의 습격에도 도주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믿는 것이 있다는 뜻.
믿는 것이 있다는 건 그 정도의 뒷배가 받쳐주고 있다는 뜻.
퍽!
푹찍-!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검은 인영을 발터가 때리고 차고 찔렀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이들이 아칸의 수하임을 확신했다.
‘생각보다 만만찮은 실력에 불의 기운은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군.’
인영들의 얼굴은 대부분이 젊은 얼굴이었다.
유릭 정도는 아니고 글렌 정도 되어 보이는 또래.
그러나 놈들의 일격 하나하나엔 그 정도 연륜엔 있기 힘든 묵직함이 서려 있었다.
한 명의 천재가 그 정도 실력이면 납득하겠는데, 이 자리의 수십이 모두 그런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의심스러운 정황이다.
‘심지어 아칸 놈들 중에서도 꽤 센 모양인데?’
깡!
불꽃이 타오르는 검을 막은 단창에서 묵직한 무게가 느껴진다.
이 정도면 거의 아칸의 정예급의 힘이었다.
“유릭, 조심하거라! 상당한 실력자다!”
그는 먼저 조카의 안위를 걱정하며 소리를 질렀다.
마스터인 자신이라면 몰라도 아직 7성에 불과한 유릭이 감당하기엔 쉽지 않은 적이었으니.
그러나 그때 유릭은.
‘저곳인가?’
지하 2층으로 향하는 통로를 발견한 참이었다.
지상엔 아무도 없고 바닥을 뚫고 내려온 지하 1층에도 특별한 건 보이지 않는다.
작업을 위한 도구만이 곳곳에 눈에 띌 뿐.
그렇다면 중요한 약은 더 아래에 있단 뜻이었다.
안 그래도 저 통로에선 풀 내음이 솔솔 나고 있었으니.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유릭! 앞서가지 말거라!”
발터가 외쳤지만 유릭은 통로로 뛰어들었다.
그저 젊은 혈기로 위험한 곳에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이쪽에서 발이 묶인 사이 놈들이 증거를 인멸하고 도주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아래쪽에 탈출을 위한 비밀 통로라도 있다면 코앞에서 놈들을 놓치는 셈이다.
여기서 몇 놈 잡은 정도로는 증거라 불리기엔 빈약했다.
‘지금 놓쳤다간 다신 잡을 수 없다.’
이 기회는 유릭과 발터가 면밀한 조사와 수사 끝에 얻어낸 것이 아니다.
재스민과의 우연한 접촉으로 인해 얻어낸 기회.
이런 찬스가 두 번이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유릭!”
발터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그가 통로로 뛰었다.
원을 그리며 내리뻗은 나선의 계단을 내려가자 처음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느냐!”
미리 설치되어 있던 것인 듯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한 마법진과 그걸 다루는 세 명의 술사였다.
눈에 익숙한 마법진.
-어르신, 이건!
‘사막에서 봤던 그거랑 비슷하군.’
사막의 지하, 어스웜의 둥지에 쳐들어갔을 때 유릭과 여왕을 통째로 날려버리려 했던 마법진.
아칸의 침입자 격퇴용 마법진.
다만 그때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아, 시전하는 술사를 보호하는 술식도 제대로 그려져 있었다.
“발동해라!”
아칸의 술사들이 양손으로 나선을 그리니 그 손이 불타오르더니, 동시에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안전장치는 물론이고 화력 자체도 그때보다 더욱 증가되어 있었다.
마법진이란 것이 본래 들이는 시간과 노력만큼 강해지게 마련이기에.
과거엔 그것에 엑셀레아를 뽑아 저항했던 유릭은.
콰-앙!
이번엔 속수무책으로 폭발해 버렸다.
크게 피어오른 폭발이 확산한다. 그러다 마법진에 내장되어 있던 구체의 보호벽에 막혀 그 이상은 나아가지 못했다.
붉은 폭발과 잿빛의 연기가 뒤섞인 유리구슬 같은 구체를 보며 술사들이 꽉 주먹을 쥐었다.
‘멍청한 놈!’
‘술사의 공방에 대책도 없이 뛰어들다니.’
흔히 정직한 1:1 격투는 전사 쪽이 우위에 있다 얘기한다.
하지만 각종 특수한 상황에 한해서는, 전사는 결코 술사를 따라올 수 없었다.
특히 이렇게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곳에 쳐들어오는 경우에는.
“좋아! 한 명만 남아서 마무리하고 위를 도우러 간다!”
한 사람이 척척 지시를 내렸고 위쪽의 지원을 준비했다.
이 자리의 술사는 그들 셋뿐만이 아니라 대여섯 명이 더 있었고, 그들은 모두 발터를 상대하러 올라갈 생각이었다.
그중 가장 경력이 짧은 말단이 연기에 뒤덮여 있는 유리 구체를 해제하려 다가왔다.
그때.
콰직!
“컥! 뭐, 뭐야!”
구체가 일부 깨지며 불쑥 팔이 솟아났다.
그 팔은 다가온 말단의 얼굴을 잡고 바이스마냥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끄아아아아악!”
견디기 힘든 머리의 고통에 말단이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팔뚝은 말단을 한 손으로 그대로 들어 올리더니, 다른 술사들을 향해 강하게 내동댕이쳤다.
“억!”
“아직 살아 있다!”
술사들이 기겁하며 황급히 대형을 갖추었다.
콰직! 콰지직!
구체가 산산이 부서지며 연기가 흩어진다.
그 속에서 유릭은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채 걸어 나왔다.
“나도 강해지긴 했나 봐?”
유릭이 히죽 웃으며 다소 뻐근해진 몸을 풀었다.
과거엔 죽음의 위기를 느꼈던 마법진인데도 지금은 상처 하나 없다.
마법진에서 폭발이 이는 순간, 유릭의 몸이 반응하며 얇은 강기막을 둘렀다.
과거에도 비슷한 재주가 불가능하진 않았다.
하지만 자세한 형태를 상상하는 것이 어렵고, 내기의 배분이 고르지 않으며, 소모도 극심했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의념을 행할 필요도 없이 공격을 감지하는 것만으로 몸이 자연스레 반응한다.
내기의 배분과 소모 역시 완벽하게 육체에 맞춰 최적화되어 있었다.
‘무공을 익히기 가장 좋은 몸으로 탈바꿈된다 하더니.’
신체의 스펙 자체가 달라진 것이 크게 체감이 되었다.
마스터들은 모두 이런 몸으로 싸운다고 생각하니 새삼 치사하게 느껴졌다.
자기들만 이런 치트키 같은 육체로 싸우고 말야.
물론 유릭도 이젠 그 치사한 쪽의 사람이었다.
“대, 대체 어떻게……!”
“저 폭발 속에서 저리 멀쩡하다고!?”
술사들이 입을 벌리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실력은 좋을지 몰라도 각오는 떨어지는군.”
마법진의 전체적인 완성도만 보자면 사막에서 봤던 것이 훨씬 뒤떨어진다.
하지만 사막의 술사들이 방어 술식을 넣을 줄 몰라서 넣지 않은 것이 아닐 것이다.
한정된 자원과 시간. 그 안에서 방어 술식보다 오로지 화력만을 높이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군의 비밀을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여기도 방어 술식을 넣을 바에 화력만 높였으면 증거 인멸도 되고 좋았을 텐데 말야.”
“뭐야!?”
“지랄 마! 그딴 미친 짓을 누가 한단 말이냐!”
“뭐 그게 정상이긴 해.”
사실 사막 때 놈들이 비정상이고 이쪽이 정상적인 경우긴 했다.
충분히 이해하며 유릭이 한 발자국 다가갔다.
“헉!”
그러자 놈들이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무의식중에 행한 몸의 솔직한 반응은 더욱더 그들의 공포심을 부채질했다.
“사, 살려…….”
“걱정 마. 죽이진 않을 테니까.”
놈들에겐 물어볼 것이 아주 많다.
다행히 유릭은 단기간 내에 사람을 대답 자판기로 만들 기술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죽여 달라고 애걸복걸해도 안 죽일 거니까 그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걸.”
스릉-
유릭이 녹시아를 치켜들었다.
* * *
아칸놈들의 숫자는 많았지만 아무리 많아봐야 한 명의 마스터를 어찌할 수는 없다.
발터에게 한창 달려들던 놈들은 절반 이상이 쓰러지고 나자 전략을 바꿔 건물 밖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젠장! 포위됐다!”
“뚫어!”
그곳엔 이미 발터가 신호를 보내 놓은 제1기사단의 기사들이 포위망을 완성한 후였다.
이제는 숫자마저 저쪽이 우위인데, 심지어 이쪽은 발터에게 한 대씩은 얻어맞아 빌빌대고 있는 상태.
도저히 포위를 뚫을 길이 없었다.
“유릭!”
상황이 본인의 손을 떠나자 발터는 즉시 통로로 뛰어들었다.
영리하고 강한 아이니 불리하면 알아서 도망 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건 그쪽도 어떻게 잘하고 있다는 뜻이라 생각한다.
그는 조카를 믿었다.
하지만 믿고 있다 하여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달음에 지하 2층으로 뛰어든 그가 외쳤다.
“유릭! 적은 더 없느냐!”
“아, 외숙. 적이요?”
그곳에서 발터가 목격한 것은 생각 이상으로 멀쩡한 유릭과.
“이젠 없어요.”
“흐으으으읍! 흐읍! 흐으으으으읍!”
재갈이 물린 채 애절할 정도로 울부짖고 있는 남정네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