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54화
154화. 언령
그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상천(上天)에 향하는 문 앞에 섰던 일.
그때의 그 장엄하고 웅장한, 거룩함마저 느껴지는 그곳에서 유릭이 느낀 감정은 단 하나였다.
두려움.
어떠한 존재에 대해 공포를 느낀 것이 아니다.
망망대해에 아무도 없이 홀로 떨어진 듯한, 자신의 존재가 더욱 거대한 무언가에 삼켜져 끝없이 확산될 것만 같은 감각.
거대한 우주에 버려진 먼지가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메르는 그것이 상천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수(神水)의 탓이라 하였다.
-신수란 건 음, 말하자면 위쪽 세상을 구성하는 에너지 같은 거예요. 그 신수가 지상에 흘러 열화된 것이 흔히 얘기하는 마나구요.
마나의 근원, 혹은 근원의 마나.
그 힘은 너무나 강대한 격을 가지고 있어 평범한 존재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고.
‘바다에 빠뜨린 잉크 방울 신세가 된다고 했던가.’
물컵에 빠뜨린 잉크는 물 전체를 검게 물들이지만, 바다에 빠뜨린 잉크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문 앞에 있던 유릭이 느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영혼이 발끝에서부터 바스러져 사라지는 감각.
다른 마스터는 어떻게 신수가 흘러나오는 문 앞에서 당당히 서 있을 수 있을까?
심지어 마스터를 넘어 문을 연 존재들은 어떻게 신수가 가득한 그곳에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가.
메르는 그것이 바로 언령이라고 하였다.
-뭐 쉽게 말하면 그릇을 만드는 거죠. 바닷물을 퍼 올려 그릇에 담는다면 잉크 방울도 사라지지 않잖아요?
그것이 바로 언령.
지상의 존재가 상천의 문 앞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그릇.
사실 획일화된 용어는 없다고 한다.
언령은 메르와 같은 드래곤이 사용하는 말이고, 다른 이들은 다르게 얘기하기도 한다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맹세라고 부르고 어떤 이들은 사명이라고 부른다.
심상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고 고유의 결계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고 들었다.
단지 유릭은 언령이라고 부를 뿐이다.
메르가 그렇게 가르쳐 줬으니까.
‘지금까지 만난 마스터들이 전부 그런 언령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과거에 만났던 여러 마스터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어떤 깨달음을 얻어 어떤 언령을 자아냈을까.
그것에서 과연 어떤 힘이 나오는 것일까.
문득, 가문의 다른 마스터들보다도 한 마스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엘가이아 로젠베르그였다.
‘왜 하필 이놈이…….’
유릭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이해는 간다.
엘가이아는 생전 처음으로 유릭이 만났던.
자신을 ‘죽이려 했던’ 마스터다.
세상 그 어떤 감정도 살의보다 적나라하고 날 것 그대로인 감정은 없으니.
수정산에서 엘가이아의 살의를 몇 차례나 받아냈던 경험이 새끼 새마냥 뇌리에 각인된 것이겠지.
그렇기에 엘가이아의 언령은 비교적 상상이 갔다.
‘베어야 할 것은 베고 지켜야 할 것은 지킨다. 그것이 기사가 검을 드는 이유일지니.’
그건 널리 퍼진 기사도의 맹세 중 세 번째 항의 말이다.
엘가이아의 참격은 그야말로 그 맹세를 유형화한 것 같은 것이었다.
‘마스터들은 하나씩 고유의 비술을 가지고 있다 들었는데, 그게 언령에서 나오는 거였군.’
그저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남들에겐 없는 특별한 비법이 있다, 그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알고 보니 더욱 깊은 의미가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었다.
스스로가 마스터에 오르는 여정에도.
또한 마스터를 상대하는 과정에도.
‘필리페 아칸.’
놈도 뭔가 하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히나 놈에겐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 필라프가 다른 형제들보다도 빨리 마스터에 올랐다고 하셨죠?
‘그래. 지금에야 전공 자체는 루카스가 압도적이지만, 마스터에 다다른 것 자체는 필리페가 더 빨랐다고 들었어.’
필리페가 전공이 낮은 이유는 알만하다.
시종일관 전쟁터를 싸돌아다니는 루카스와 달리 필리페는 사교적인 활동이 많았다.
전장에 선 경험 자체는 루카스보다 적단 얘기.
하지만 그 루카스보다도 먼저 마스터에 올랐다는 것은 충분히 주의할 일이었다.
방심할 수 없는 한 수를 숨기고 있단 얘기니까.
-근데 아칸이랑은 휴전 상태 아니에요? 이렇게 싸워도 돼요?
메르의 질문에 유릭이 피식 웃으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다시금 그의 눈이, 이제는 거의 꺼져가는 창고의 불길을 담았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는 딱히 아칸의 2공자랑 싸우려는 게 아냐.’
-네?
‘난 그저 죄 없는 도시에 마약을 푸는 마약상을 잡으려 하고 있을 뿐이야.’
잡아내고 보니 아칸의 2공자더라. 하지만 너무나 죄가 커 어쩔 수 없었다.
그 정도 말이면 충분하다.
당연히 항의는 들어오겠지만 마약 같은 중범죄가 관련된 만큼 저쪽도 강한 태도를 보일 순 없을 터.
애초에 빌미를 주는 쪽이 잘못이다.
싫으면 알아서 집안 단속을 잘했어야지.
‘어찌 됐든 지금은 넥타르의 입수에 반드시 성공해야 돼.’
-하긴 그쪽이 훨씬 중요하긴 하죠.
뒷일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이 일은 가족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유릭은 가족의 일에선 단 한 걸음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 * *
쾅!
테이블을 내려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평소의 단정한 모습과 달리 잔뜩 흐트러진 필리페의 모습에 안토니가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이 테이블이 얼마짜리 물건인지 알고는 있나? 그렇게 쾅쾅 쳐대다가 부서지기라도 하면 물어줄 거냐고.”
“닥쳐!”
필리페의 일갈에 안토니가 뚱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우물거리며 욕을 하는 안토니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필리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게 말이 돼! 그놈 하나를 못 잡아서 벌써 얼마나 손해를 본 거야!”
“그러게 잘 좀 하라고 그랬잖나.”
“벨스 가주! 당신은 뭘 그렇게 남 일 보듯이 보고 있나! 결국 다 당신 손해로 이어지는 일인데!”
“나야 그 뭐냐, 나보다 더 화내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 나라도 침착하려는 거지. 자자, 일단 술 한 잔 들고 마음을 가라앉히세나.”
안토니가 능글맞게 웃으며 얼음이 담긴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진한 호박색의 그것은 향만 맡아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고급의 술이었다.
그 귀한 술을 필리페는 울분이라도 풀 듯 벌컥벌컥 한 방에 들이켜 버렸다.
“그거 진짜 비싼 건데…….”
탁!
안토니의 중얼거림은 무시한 채 그가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쳤다.
“후우…….”
필리페가 심호흡을 거듭하며 화를 가라앉힌다.
이러면 안 되지. 분노는 판단을 그르칠 뿐이다.
‘형도 아니고.’
툭하면 화를 내는 형과 자신은 다르다.
형인 루카스를 떠올리니 울컥, 거뭇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질투. 열등감. 그런 것들을 모두 합한 끈적한 부(不)의 감정.
그것은 순식간에 필리페를 냉정하게 만들었다.
보다 막대한 감정 앞에선 눈앞의 사소한 분노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안토니. 경비대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건가? 도시에 방화범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체포도 하지 않고.”
“말했잖아. 이쪽도 이리저리 노력해 보곤 있는데 저쪽이 워낙 신출귀몰해야 말이지. 현행범으로 잡기는커녕 단서조차 없는데 어떻게 체포하겠어?”
“내 말은 단서가 뭐가 필요하냔 말이다. 유릭 로스카가 체류 중인 여관은 알고 있을 텐데? 그냥 쳐들어가서 체포하면 끝 아닌가?”
침착하게 얘기하곤 있으나 강한 불만이 담긴 말이었다.
그와 안토니는 동업자, 일종의 비즈니스 파트너다.
파트너라면 파트너로서 능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텐데, 안토니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우물쭈물거리고나 있지 않은가?
“나도 그러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 로스카와의 외교 문제도 있고, 뭣보다 놈은 스카디의 훈장을 가지고 있다. 그게 있으면 골든하트의 영역에선 쉽게 다룰 수 없어. 자칫하면 스카디 쪽에서도 항의가 들어오거든.”
“그깟 훈장이 뭐라고! 그 훈장이 있으면 범죄자라도 손 놓고 놓아주어야 한단 말이냐?”
“그야 훈장이 면죄부가 되진 않지. 그런데 말이다…… 이런 말 하긴 미안한데.”
안토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필리페가 얼굴을 찡그렸다.
안토니가 저렇게 뜸을 들일 때는 항상 좋지 않은 말이 나오곤 했었는데.
“2공자. 정말 불을 지른 게 유릭 로스카가 맞아?”
“……뭐?”
아니나 다를까 안토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첫 번째 창고는 뭐 그렇다 치고 두 번째부터 말인데…… 창고가 불탈 때 유릭 로스카는 항상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단 말이지.”
“무슨 소리지?”
“두 번째 창고가 불탈 때 유릭 로스카는 운하의 보트에서 발견되었어. 제 숙부랑 같이 바람이라도 쐬러 나온 것 같다고 하더군.”
“…….”
“세 번째 창고가 불탈 때 놈은 페럿 상회의 애송이가 연 파티에 참석했다고 해. 여기도 제 숙부랑 같이 갔다던데 삼촌이랑 조카가 뭐 그리 사이가 좋은지 참. 그리고 네 번째 창고가 불탈 때 놈이 어디 있었는지 알아?”
“……어딘데.”
필리페가 떨떠름히 묻자 안토니가 두어 번 그를 향해 턱짓했다.
필리페가 뒤로 돌아보았으나 뭐가 발견될 리 없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그는, 이내 안토니가 말하는 것을 깨닫곤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공자가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 바로 거기서 나랑 얘기를 하고 있었거든. 왜 마약 수사를 하지 않느냐고 항의를 하러 왔더군. 건방진 꼬맹이 같으니라고.”
“뭐……? 아니…… 뭐라고?”
“무슨 얘긴지 알겠지? 놈에겐 알리바이가 있어. 창고가 습격받는 모든 시간대에 놈은 다른 장소에서 놀고 있었단 말야. 필리페 아칸. 아칸의 귀하디귀한 2공자 나으리. 네놈은 대체 누굴 상대하고 있는 거지?”
“…….”
말문이 턱 하니 막혀왔다.
목구멍을 통과하는 침의 감촉이 묘하게 끈적했다.
“말 좀 해보시지.”
안토니가 재촉하지만 대꾸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간신히 쥐어짠 말은 그저 현실을 부정하는 말뿐.
“그, 그럴 리가 없잖나. 유릭 로스카다. 부하의 말론 창고를 태운 불꽃은 생전 처음 보는 특이한 불꽃이라고 했어. 아버님이 흥미를 보인 놈 말고 누가 그런 불꽃을 다룬단 말이냐?”
“불꽃이니 뭐니 그런 건 난 모르겠고, 좌우지간 녀석은 불을 지르고 다닐 수가 없어. 사람 몸이 두 개도 아닌데 어떻게 그게 가능해?”
“몸이 두 개! 그거다! 놈은 쌍둥이야! 그 쌍둥이가 놈의 행세를 하고 있는 거라고!”
필리페가 애써 정답을 찾았다는 듯 외쳤으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그것은 기어이 참고 있던 안토니를 폭발시켰다.
안토니 역시 창고가 계속 불타고 있는 것이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거기서 불타는 포댓자루 하나하나가 그에겐 황금 덩어리와도 같은 것인데.
무능한 파트너에게 열이 뻗쳐 있는 것은 필리페가 아니라 오히려 안토니였던 것이다.
“우리 쪽 정보력을 우습게 보지 마라. 대륙 주요 인사들의 행방은 일주일 단위로 체크하고 있어! 데릭 로스카는 바로 저번 주에도 겨울성에서 목격되었단 말이다!”
“저번 주?”
“고작 일주일 만에 겨울성에서 이 벨파스트까지 내려올 방법이 있다면 부디 좀 알려주시지 그래. 내 식견이 짧아 그런 방법 따윈 들어본 적도 없다만.”
없다.
그런 방법은 없다.
굳이 찾자면 드래곤 수준의 존재가 공간 마법을 펼쳐 이동시켜 주는 정돈데…….
‘그럴 리가 없잖아!’
필리페는 고개를 저었다.
북부에서 남부까지, 이 대륙을 종단하는 공간 마법이라면 그건 절대 범상한 것이 아니다.
그런 마법이 발동되었다면 그 여파만으로 아마 도시가 반쯤은 날아갔을 터.
‘그럼 대체…….’
필리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로 자신은 누굴 상대하고 있단 말인가?
검은 후드를 쓰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 부하에게 들은 인상착의는 그것뿐.
방금까지 그 가면 아래에는 당연히 유릭 로스카의 뻔뻔한 낯짝이 들어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없어졌다.
가면 아래의 얼굴은 어둠 속에 숨어 아무리 애를 써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그저, 비웃듯 올라가는 입꼬리뿐.
“……말도 안 돼.”
필리페가 가라앉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래, 말도 안 되지. 유릭 로스카가 범인이란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그러니 이제 이런 생산성 없는 논의는 관두고, 진범을 찾기 위해 같이 노력해 보자고.”
안토니가 짜증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얘기했다.
하지만 필리페는 멍하니 얘기했다.
“아니, 놈은 유릭 로스카가 맞다. 내 직감이 그리 얘기하고 있어.”
“이 개…….”
안토니가 욕설을 한 바가지쯤 먹여주려 입을 열었으나, 필리페의 얼굴을 보곤 다물었다.
그의 얼굴엔 지금까지 본 적 없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내가 직접 확인하러 가겠다. 내일 놈이 어디로 가는지 아나?”
“……오페라의 참석 명단에 있다던데.”
“오페라?”
“모래황후의 앵콜 공연. 그 왜 인기가 많아서 한 차례 더 공연한다고 그랬잖아.”
그건 필리페도 잘 알고 있는 자리였다.
애초에 한 번 더 공연을 하게 종용한 것이 그를 필두로 한 후원자들이었으니까.
그 말은 곧 재스민이 연기하는 자리라는 뜻.
“그래…… 마침 잘됐군.”
놈의 정체를 까발리기엔 최적의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