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55화
155화. 토끼를 잡으면
모래황후의 진정한 마지막 공연이 열리는 날.
극이 시작되기 전 초저녁부터 극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관광을 온 귀족이나 돈 많은 상인들, 벨파스트의 시민들 중에서도 부유한 편인 상위층 시민들이 좌석을 가득 메웠다.
이번 공연장은 일전의 수상오페라가 아닌 도시 내에 있는 극장이었는데, 이곳이 더욱 많은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였다.
“하하하, 로스카 공도 오페라의 매력이 푹 빠지셨습니다. 이번이 몇 번째 관람하시는 겁니까?”
“이번이 세 번째려나요? 이토록 훌륭한 극은 근래 들어본 적이 없어서 말이죠.”
아는 사람을 만났는지 발터는 아까부터 대화에 여념이 없었다.
데릭은 방해되지 않도록 떨어진 장소에서 가만히 대기했다.
그러던 와중.
“아저씨, 이거.”
웬 꼬마 아이 하나가 다가오더니 쪽지를 건넸다.
내밀린 쪽지를 데릭이 눈을 찡그리며 가만히 바라봤다.
“이게 뭐지?”
“몰라. 아저씨한테 전해주라고 하던데. 아무튼 줬으니까 나 간다.”
데릭이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이니 아이는 쪽지를 그냥 내려놓고 저 멀리 뛰어갔다.
멀어지는 아이를 보던 데릭이 쪽지를 주워 들었다.
펼쳐보니 별다른 것 없이 극장의 뒤쪽으로 와달라는 말만 한마디 적혀 있었다.
“…….”
데릭이 슬쩍 발터 쪽을 바라보니.
“이번에도 조카랑 같이 오신 겁니까? 일전에 파티에도 함께 참석하시더니, 사이가 무척 좋은가 봅니다.”
“흐하하하! 오랜만에 보는 거여서 그런지 이놈이 워낙 반겨주지 않습니까. 덕분에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느라 일도 못 하겠습니다.”
“기특하고 좋지 않습니까. 제 조카 놈은 머리가 크더니 용돈 필요할 때 아니면 찾아오지도 않는답니다. 어릴 때 얼마나 귀여워해 줬는데……. 친하게 지내는 비결이라도 있는 겁니까?”
“뭐 비결이랄 게 있겠습니까. 다만…….”
발터는 입이 귀에 걸린 채 지인과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얼굴에 함박웃음이 핀 것이 어지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멋대로 그런 소릴 해도 난 모릅니다, 외숙.’
지금 이 장소에서 삼촌 바라기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유릭이지 자신이 아니다.
그러니 자신은 별 상관없었지만 유릭이 나중에 들으면 무슨 소릴 할는지…….
고개를 젓던 데릭이 근처에 숨어 있던 기사를 불렀다.
“체르 경.”
“예, 공자님.”
1기사단의 소속이자 발터의 부관인 체르.
그는 임시로 데릭의 호위로 임명되어, 일반 시민인 척 분장해 데릭의 근처를 지키고 있었다.
“극장 뒤쪽에 잠시 다녀올 건데 함께해 주시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몰래 호위를 대동한 채 건물의 뒤쪽으로 향하니.
“유릭 공자. 이렇게 불러내서 죄송해요.”
커다란 로브로 온몸을 꽁꽁 싸맨 채, 얼굴도 면포로 가리고 있는 웬 수상한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필리페의 수하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데릭이 의문의 눈빛을 띄웠다.
“당신은?”
“저예요, 저. 재스민이요.”
“아, 아아. 재스민.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눈치챈 데릭이 최대한 그럴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
이번엔 재스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릭…… 공자?”
“예. 말씀하시죠.”
“정말로 공자가 맞으신가요?”
그 순간 데릭의 입이 부자연스럽게 멈추었고.
장내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아 갔다.
* * *
데릭과 헤어지고 재스민은 가벼운 충격에 빠졌다.
‘대역이라니.’
방금 만난 남자가 유릭이 아님은 몇 마디 인사만으로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유릭과 만났던 것은 무도회에서 단 한 번뿐이지만, 그 만남에서 그녀는 유릭을 상세히 관찰했다.
그가 정말로 믿을 만한 남자인지, 자신을 이 벨파스트란 우리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을지.
아가씨에게 들을 때의 인상으론 능력 있고 충분히 책임감도 있는 듯 보이긴 했다. 단지 굉장히 짜증 나고 사람의 신경을 긁는 남자라고.
후자는 전혀 모르겠지만 전자는 확실히 그녀도 느낀 바가 있었다.
‘창고 주소를 건넨 그 날 밤 바로 불탔었으니…….’
그것엔 과연 그녀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를 건넨 지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창고는 불타고 필리페의 수하들은 모두 잡혀 들어갔지 않은가.
심지어 그 뒤로도 몇몇 창고가 더 불타올랐다.
뒤에 탄 것들은 그녀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창고들.
유릭은 하나의 주소를 받았을 뿐인데, 그것에서 시작해 다른 창고들까지 모조리 찾아낸 것이다.
‘행동력이 너무 대단해.’
단서 하나를 건넸을 뿐인데 사태가 번갯불처럼 진행되고 있었다.
사건에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조차 얼떨떨할 정돈데, 직접 당하는 필리페는 얼마나 초조한 기분일까.
그걸 상상하니 그동안 쌓인 울적함도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역시 유릭 공자가 정답이었어.’
그동안 이 벨파스트에 거주하며 그녀는 많은 사람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도 아칸의 이름 앞에선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기 바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남부 대륙에서 아칸에게 밉보였다간 어느 가문이라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니.
그녀가 유릭에게 접근했던 건 비단 아가씨의 말뿐만 아니라 이 때문도 있었다.
로스카라면 아칸의 이름에 구애받지 않을 터이니.
그런데 막상 얘기해보니 생각보다도 훨씬 더 필리페를 압박하고 있지 않은가?
‘돌아가자. 무대 준비해야지.’
이제 슬슬 시작할 시간이다.
자신의 출연은 막이 조금 진행된 후이기에 너무 급할 필요도 없지만, 주역으로서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옷자락을 잘 여미며 그녀가 극장의 대기실로 향했다.
그때.
“어머, 재스민. 그분이 또 오셨어.”
극단의 친한 직원이 히히 미소 지으며 재스민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재스민이 움찔했다.
“그분이라니 누구요?”
“어휴, 다 알면서. 너한테 푹~ 빠져 있는 아칸의 공자님 말이야. 빨리 가봐. 기다리신다.”
내막을 모르는 직원이 좋을 때라며 눈웃음을 짓고는 재스민의 등을 떠밀었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없었다.
바로 방금 필리페가 한 방 먹은 것을 생각하며 히죽거리던 직후인데, 이 타이밍에 자신을 찾아오다니.
그야 공연 때는 항상 찾아오긴 했었지만, 이번에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들킨 건가?’
자신이 유릭에게 정보를 건넨 것이?
들켰다면 큰일이다. 이대로 어슬렁어슬렁 찾아갔다간 큰 곤욕을 치르게 될 터.
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도망치면 그야말로 자신이 범인이라 외치는 꼴이었으니까.
꿀꺽.
그녀가 침을 삼키곤 필리페가 기다리는 대기실로 향했다.
“오셨군요, 재스민.”
“아, 공자님…… 많이 기다리셨나요?”
“아니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훈훈하게 웃는 필리페의 모습은 평소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저열한 본성을 때깔 좋은 가면으로 감춘 채 남들을 깔보는.
너무나도 평소와 똑같아 재스민은 오히려 방심할 수 없었다.
애초에 필리페와 있을 때 그녀가 방심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곧 무대가 시작하니 본론만 전하겠습니다.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부탁이요? 드무네요, 공자님이 부탁을 다 하시고.”
“그만큼 급한 일이라 말입니다.”
필리페가 쓰게 웃더니 그 부탁이란 것을 얘기했다.
“유릭 로스카. 기억나시죠?”
“예, 예에…… 며칠 전에 무도회에서 만났었죠.”
“오늘도 그가 공연을 보러 왔다고 합니다.”
“…….”
순간 재스민은 엄청나게 갈등했다.
혹시 방금 데릭 로스카와 함께 있던 장면을 본 걸까?
그래서 일부러 떠보는 것일까?
“그런가 보더라구요. 그게 왜요?”
결국 그녀가 한 대답은 얼마든지 발뺌할 수 있는 애매모호한 답이었다.
다행히 필리페의 모습에 큰 변화는 없다.
떠보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
“알고 계시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실은 말이죠, 유릭 로스카에겐 쌍둥이 동생이 있답니다. 데릭 로스카란 이름이죠.”
“그랬나요? 쌍둥이라니 신기하네요. 유릭 공자와 똑같이 생긴 분이신가요?”
“아주 똑 닮았다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닮았다는 걸 이용해 장난질을 치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장난질?”
“금품을 털다 도주를 하였는데, 그에 대해 추궁하니 자기는 그 시각에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하지 뭡니까? 그래서 조사해 보니 정말로 다른 곳에서 유릭 로스카의 목격 정보가 있었습니다.”
“아…… 그게 그 쌍둥이인 것을 이용했다는?”
“예.”
금품을 털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아마 창고를 불태운 그것의 얘기겠지.
그녀가 배를 단단히 조이며 평정을 유지했다.
“그런데 그게 저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죠?”
“재스민, 이런 것이 특기 아닙니까. 사람이 연기하는 거나 거짓말하는 걸 잡아내는 일이요. 그 능력을 조금 빌려줬으면 합니다.”
정보를 건넨 것이 들킨 건 아니라는 생각에 그녀가 조금 안도했다.
이런 부탁이야 쉬운 일이다.
그냥 거절하면 그만.
“으음…… 공자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드리곤 싶지만 그런 행위는 조금…….”
“이렇게 부탁드려도 안 되겠습니까?”
“죄송해요. 조금 무서워서……. 그분이 갑자기 화가 나서 절 찌르거나 하면 어떻게 해요?”
자연스러운 이유였다.
그녀는 일반인이고 로스카는 온 대륙에 유명한 명문가다.
그런 남자의 정체를 캐라는 식의 부탁은 거절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필리페가 지금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란 것을.
“로스카는 무섭고 아칸은 무섭지 않은가 보군요.”
“예?”
재스민이 눈을 깜빡였다.
필리페가, 처음 보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 * *
“이거 참,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응?”
“정 꿈같으면 볼이라도 꼬집어보시든가, 가주.”
“허 참. 어처구니가 없구만. 어처구니가 없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여기가 어디라고 와?”
안토니가 찡그린 눈으로 자신의 앞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피식 웃으며 무릎에 웅크린 하얀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적진에 들어와 있으면서 애완동물이나 쓰다듬고 있는 여유라니.
흥, 안토니가 코웃음 치며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내가 알기로 자네는 지금 오페라를 보고 있을 때인데. 안 그런가, 유릭 로스카?”
“지금 시간이면 한창 시작할 때겠군. 보러 가지 못해서 유감이야.”
안토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극장에 유릭 로스카가 입장했음은 그의 부하가 확인했다.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실시간으로 감시 중이다.
특별한 일이 있으면 보고하라 일러놓았는데 지금까지 어떤 보고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 말은 유릭 로스카는 아직도 얌전히 극장에 앉아 있다는 말.
‘놀랍군, 필리페 아칸. 당신 말이 사실이었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필리페의 예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마법으로 데릭 로스카를 벨파스트까지 이동시킨 거지?
설마 저번 주에 겨울성에서 목격된 그 데릭 로스카조차 또 다른 대역이었나?
‘대역이 몇 명이 있는 거야, 이놈들?’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하며 안토니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어느 쪽이 형이지?”
“나.”
스릉-!
그가 즉시 손을 들었다.
그러자 방 곳곳의 틈새에서 검이 솟아나 유릭을 빼곡히 포위했다.
얇은 벽 너머에서 검을 겨누고 있는 검사들.
하나같이 마나가 가득 흐르고 있는 게, 어느 것 하나 가벼운 검이 없었다.
살벌한 날붙이 사이에서 유릭이 피식 웃었다.
“필리페는 지금 극장에 있겠지?”
“……그렇겠지. 자네 정체를 캐니 마니 의욕이 넘치더군. 정작 본인은 이곳에 와 있는데.”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데릭을 재스민이 있는 곳에 보내면 필리페가 딸려 오리란 것을.
그곳에서 놈은 데릭을 붙들고 끙끙 입씨름하고 있겠지.
그때를 노려, 그는 이곳에 찾아왔다.
필리페 아칸의 위치가 특정되어 있고, 심지어 놈이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린 이 순간.
“가주. 혹시 이런 말 들어본 적 있나?”
“어떤 말.”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말.”
“…….”
안토니가 침묵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지만, 그 의미만큼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도시에 마약을 푼 범인의 위치를 신고하러 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
안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