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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157화 (157/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57화

157화. 예감이 어떻든

안토니의 지령이 은밀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도시에 전파되었다.

성문을 내리고 도시를 걸어 잠가라.

벌레 한 마리 밖으로 내보내지 마라.

극장을 포위하고 시민들을 대피시켜라.

지시에 따라 잘 훈련된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치 도시 전체가 날카롭게 가시를 세우며 꿈틀거리는 듯했다.

“아닛! 갑자기 성문을 왜 내리는 것이오!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하는데!”

“위에서 내려온 명령입니다.”

갑자기 내려가는 성문에 수레를 끄는 상인들이 강하게 항의했지만, 그들은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했다.

병사들 역시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명령에 따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남은 인원은 극장의 포위에 모두 투입하도록! 죄인은 그곳에 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경비대장이 강한 어조로 부관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부관들이 몇 차례나 오가며 경비대장의 지시를 전달하기 바빴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지휘실의 한중간.

“이곳에서 지도를 볼 수 있다 들었는데.”

찌릿찌릿한 주변의 분위기완 전혀 다른 사내가 들어왔다.

짜증스럽게 고개를 든 경비대장이 흠칫 몸을 떨었다.

“유릭 로스카! ……경?”

“오랜만이야.”

“오, 오랜만입니다! 그땐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때? 아 신고한 다음 날에?”

“그게 실은 시장님께서 경이 수상하니 잘 경계하라고…… 위에서 그러면 저는 당연히 따라야 하는 입장이라…… 하하하. 이해하시죠?”

경비대장이 손을 비비며 은근한 눈길로 얘기했다.

이 정도로 태도전환이 뻔뻔하니 유릭은 오히려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딱히 탓하려고 온 건 아니고. 얘긴 들었지?”

“옙! 경과 최대한 협조하여 죄인을 체포하란 지시, 확실히 받았습니다!”

“협조라고 해도 뭐 병력을 빌려달란 얘긴 아니고, 그냥 지도나 보여줘. 벨파스트 지도 있지? 군용으로.”

“여기 있습니다!”

보통은 극비로 취급되는 군용 지도였으나 그걸 내미는 경비 대장의 손끝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유릭이 피식 웃고는 지도를 테이블에 펼쳤다.

넓게 펼쳐진 지도에는 모르는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각종 기호와 선이 점철되어 있었다.

유릭이 벨파스트의 지도 체계를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도를 읽는 법은 일반교양 이상으로 익혀왔다.

처음 보는 군용 지도라고 할지라도 대략적인 얼개는 파악할 수 있었다.

‘보자…… 극장이 이쪽이고…… 주변 건물과 도로 상태는…….’

사건의 현장인 극장 주변의 지리가 유릭의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지형뿐만이 아니라 필리페와 아칸의 술사들이 저항할 때 위치할 만한 장소, 도주할 때 선택할 만한 경로, 가장 가까운 성벽과의 거리 등.

작전에 필요한 정보들이 차곡차곡 쌓여나갔다.

―필라프도 문 앞에 선 존재라면서요? 잡을 수 있을까요?

메르가 같이 지도를 보며 물었다.

‘마스터라면 이쪽도 외숙이 있어. 양측에 한 명씩 마스터가 있다면 전력은 그걸로 상쇄돼.’

마스터는 흔히 비대칭 전력이라 불린다.

예를 들어 1명의 기사를 상대하기 위해선 몇 명의 병사가 필요하다든가, 100기의 기마병을 상대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든가.

그런 식의 대칭을 이룰 수 있는 종류의 병력과 다르게, 마스터는 일반적으론 가늠할 수 없다.

때문에 마스터의 숫자와 배치는 전쟁터에서 전략 수준으로 취급받는 요소였다.

‘옛날에는 그냥 너무 세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 비대칭이란 말엔 조금 다른 의미가 있었다.

언령.

상천의 문 앞에 서게 된 자들이, 신수의 바닷속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 자아낸 깨달음.

언령을 가진 마스터는 신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신수는.

‘마나의 상위 개념이라 했었지.’

마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상위 세계의 에너지라 하였다.

그 신수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언령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이 세상의 마나 따위에 흔들릴 리 없다.

마스터의 오러가 마스터가 아닌 자의 오러를 종이 썰듯 썰어버릴 수 있는 이유였다.

소위 말하는 격이 다른 것이다.

‘마스터의 상대는 마스터가 하는 것이 철칙.’

다행히 상대 쪽에 있는 마스터는 필리페 하나뿐이고, 이쪽에는 발터가 있다.

마스터끼리의 전력은 동등하다는 뜻이다.

단지 이전부터 유릭에겐 다른 예감이 들긴 했지만…….

‘……내 예감이 어떻든 외숙부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게 제일 깔끔해.’

안전하게 작전을 마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마스터가 마음먹고 도주에만 전념하면 잡기 힘들지 않아요? 이쪽도 한 명뿐이면.

‘그건 어쩔 수 없지. 그것만 해도 이쪽의 승리나 마찬가지야. 놈 혼자는 도망갈 수 있어도 부하랑 다른 기반까지 모조리 가지고 도주할 순 없을 테니까.’

필리페가 도망가도 부하들은 남는다.

남은 창고에 보관 중인 렉사나와 가져온 물자들도 모조리 도시에 남는다.

그 모든 기반을 잃게 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승리라 부를 만했다.

‘지금쯤이면 데릭이 시간을 끌고 있으려나.’

그쪽에선 그쪽의 일을 하고 있겠지.

거긴 맡기고 자신은 자신의 일을 하면 된다.

탁.

유릭은 지도를 접고선 지휘실을 나갔다.

“휴우…….”

그가 떠나자 경비대장이 남몰래 안도하는 소리가 지휘실 내에 울려 퍼졌다.

* * *

오페라의 한중간.

재스민과 몇 명의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장면에서, 데릭은 조용히 관람석에서 나왔다.

극장의 화장실에 들른 그가 손을 닦고 바깥으로 나왔다.

‘……왔군.’

그러자 대번에 시선이 느껴진다.

아니 시선 자체는 아까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일부러 나온 것 자체가 이 시선 탓이었으니까.

“처음 보는군. 데릭 로스카 맞나?”

“……응?”

데릭이 적당히 의아한 티를 내며 뒤로 돌았다.

그곳에는 시선의 주인, 필리페 아칸이 서 있었다.

“데릭은 내 동생의 이름이다만.”

“아 그랬던가? 미안하군. 쌍둥이라 들었다 보니 헷갈렸나 봐.”

필리페가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일부러 데릭이라 부르는 허튼수작은 가벼운 인사 차원인 모양이었다.

잠시 그의 손을 본 데릭이 이내 맞잡고 악수를 나눴다.

웃는 낯인 필리페의 눈동자가 남몰래 가늘어졌다.

‘재스민한테만 맡겨 놓을 순 없지.’

이제 한 발자국, 조금만 있으면 넥타르가 손에 들어온다.

그럴 때 들어온 유릭 로스카의 방해.

그것은 필리페를 무척이나 초조하게 만들었다.

넥타르의 입수는 그에겐 정말로 사활이 걸려 있는 일이었다.

“난 필리페 아칸이다. 알고 있나?”

“대충은.”

“듣던 대로 까칠하구만. 아니면 내가 아칸이라 그런가?”

“…….”

데릭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상대가 유릭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 만큼 쓸데없는 단서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이렇게 만나서 반갑군. 유릭 로스카의 이름은 우리 쪽에서도 유명해서 말이야. 형이랑 샤니스와는 한 번씩 만났던 모양인데 나만 못 만나봐서 섭섭했었거든.”

“섭섭할 게 뭐 있나. 결국 적인데.”

“너무 그러지 말라고. 일단은 휴전 상태지 않나.”

필리페가 하하 웃으면서 은근히 데릭을 살폈다.

상대가 당장 떠나갈 듯한 낌새는 없는 것이 조금 거슬리긴 했다.

‘이놈이 유릭 로스카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라면 나랑 대화하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을 텐데.’

그런데 공연을 보러 돌아가지도 않고 떠나갈 낌새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오히려 데릭이 필리페의 발을 묶기 위해 나와 있던 것이지만, 그 사실을 그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조금 걸리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이 단서를 캐낼 기회다.

“듣자 하니 우리 아버지가 네 불꽃에 그렇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던데…… 잠시만 보여줄 수 있나?”

“…….”

데릭이 침묵했다.

그는 불꽃을 보일 수 없으니 당연히 응하지 못할 부탁이었다.

“왜 그래? 설마 못 하는 건가?”

“내가 왜 너 좋으라고 내 힘을 보여줘야 하지?”

“뭘 그렇게 재고 그래. 잠깐 불 좀 피워보는 게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잖아? 자, 내 것도 보여주마. 자, 자.”

필리페가 손을 펴니 주먹만 한 불꽃이 솟아올랐다.

“자, 나도 보여줬으니 너도 한번 피워봐. 어렵지도 않잖아? 한 번만 보여주면 나도 귀찮게 안 굴고 그만 돌아가마. 응?”

“어이, 이봐…….”

조급함에 집착 섞인 눈빛마저 내비치며 필리페가 다가왔다.

평정을 유지하던 데릭조차 당혹스럽게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공자님.”

한 사내가 급히 다가와 필리페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처음엔 방해를 받았다며 얼굴을 찡그린 필리페였으나, 얘기를 들으며 점차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게 정말이냐?”

“예. 낌새가 수상합니다. 병력의 움직임이 마치 외적을 막기보단 내부의 적을 내보내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부의 적이라…….”

안토니가 이렇게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일 정도로 위험시하는 존재는 이 도시에 둘밖에 없다.

로스카와 아칸.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로스카를 잡기 위함이겠지만, 그렇다 하기엔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어쩌면 벨스 가주가 변절했을 가능성도…….”

부하의 조심스러운 의견에 필리페의 얼굴이 굳었다.

안토니가 배신을 해?

그럴 리가 없다. 이 대륙에 누가 감히 대 아칸을 배신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만약 배신을 한다면.

그건 아칸과 맞먹을 정도의 거대한 존재가 엮였을 때뿐이다.

“유릭 로스카.”

그가 다시 데릭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그 손엔 불꽃은 피어 있지 않았다.

“뭐지? 심각한 얼굴로.”

“지금 상황을 알고 있나?”

“상황?”

데릭은 생각보다 연기를 잘 해주었다.

재스민을 속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평범한 수준의 연기는 되었다.

의아한 듯 갸웃거리는 모습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렇군…… 난 함정에 빠진 거로군.”

필리페는 로스카의 짓임을 확신했다.

그가 픽 웃는다.

도시가 봉쇄되고 있다.

이 정도로 대대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유릭 로스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관계가 없다 할지라도 최소한 보고는 들어와야 정상이다.

“큭, 큭큭큭.”

필리페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배신을 당해? 함정에 빠져?

그 말은 넥타르도 날아갔고, 뿐만 아니라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것 아닌가?

“공자님. 일단 이곳을 이탈하셔야 합니다.”

부하가 초조한 얼굴로 진언한다.

본래 기습을 당했을 때의 철칙은 당장 자리를 이탈해 체제를 재정비하는 것이다.

상대는 이미 전력 분석을 마치고 들어오는데 대책 없이 저항했다간 피해만 더 커질 뿐이다.

“좋아. 퇴각한다. 목적지는 도시 바깥.”

결단은 빨랐다.

이 하나의 결단에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넥타르도, 지금까지 쌓아온 기반도, 거기에 쏟은 시간도 모두 버리는.

하지만 필리페의 결단에 흔들림은 없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고, 중요한 건 앞으로의 대처였으니.

이 빠른 결단력이 그를 가주 후보의 자리까지 올려준 것이었다.

“다만.”

당하고만 있을 그는 아니다.

“너도 같이 와줘야겠다. 유릭 로스카. 아니 데릭 로스카인가? 뭐 어느 쪽이든.”

필리페의 몸이 살짝 앞으로 쏠리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데릭의 눈앞에 나타났다.

데릭이 움찔하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지만.

퍽!

그가 이솔렛을 뽑는 것보다 필리페의 주먹이 빨랐다.

명치에 꽂힌 주먹에 데릭은 눈앞이 아찔해져 왔다.

“컥…….”

시야가 흐려지며 정신이 급속도로 가라앉는다.

눈을 감고 쓰러지는 데릭을 필리페가 둘러메었다.

“가자. 너무 시간 끌면 발터 로스카가 눈치챈다.”

“예.”

빠르게 인질을 확보한 필리페가 부하와 함께 도주하려는 그 순간.

“이놈드으으으으을!”

분노한 발터 로스카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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