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159화 (159/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59화

159화. 붉은 금안

흐드러지게 핀 불꽃이 모이며 한 점에 압축된다.

유릭의 손엔 어느새 동그란 화염의 구체가 생성되어 있었다.

‘더 작게는 안 되나.’

그의 눈에 조금 아쉬운 빛이 흘렀다.

나찰 염환은 염화신무의 비급에 적힌 무공 중 하나로, 특별히 개발된 초식은 아니고 내기 운용법 중 일부에서 파생된 기술이었다.

검강압환(劍罡壓丸)에 이르기 위한 수련법.

흔히 검환이라 불리는 그것은 무림인의 경지를 나누는 분류 중 하나라고 하였다.

내기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검기의 단계, 단단한 강철처럼 벼려지는 강기의 단계.

그 강기조차 더욱 줄이고 압축시켜 완전한 구의 형태를 만드는 검환의 단계.

아직 유릭에게는 아득한 경지다.

강기조차 환골탈태를 마친 후에 간신히 펼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상위 경지인 검환을 펼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수련은 할 수 있다.

어렴풋이 도달한 강기의 경지로 펼친 환(丸)이 이 나찰 염환이었다.

“로, 로스카 경? 정말 괜찮은 거지요? 믿어도 되는 거지요?”

필리페를 앞에 둔 경비대장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머릿수로 따지면 저쪽은 하나고 이쪽은 수십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쪽이 우위였지만, 그 하나가 마스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됐으니까 비켜 있어. 병사들이나 잘 다독이고.”

유릭이 눈을 찡그리며 경비대장을 뒤쪽으로 치웠다.

안 그래도 나찰 염환을 펼치기 위한 내기 운용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데 옆에서 쪼잘대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아칸의 앞에서 불꽃이라니. 건방진 놈…….”

필리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불의 구체를 들고 있는 유릭을 응시했다.

그가 슬쩍 시선을 돌려 유릭의 뒤쪽에 있는 성문을 바라본다.

경비대장과 병사들이 방패를 연결해 성문 앞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까짓 건 보이지도 않았다.

어차피 손짓 한 번이면 우수수 나가떨어질 날파리들.

눈앞의 유릭만 치워버리면 성문을 부수고 바로 탈출이 가능하다.

‘발터 로스카가 오기 전에 쳐부순다.’

그의 전신이 불꽃의 비늘로 뒤덮이며 갑옷을 이루었다.

<마갑(魔甲) 적화린(赤火鱗)>

어릴 때부터 익혀 그를 마스터의 자리까지 올려준 아칸의 절기 중 하나.

불꽃의 비늘이 돋으며 전신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쿵-!

그가 유릭에게 달려들었다.

유릭이 손을 휘둘러 나찰 염환을 발출했다.

원거리는 자신이 없는 그였으나 그와 필리페의 거리는 그렇게 먼 것도 아니었다.

천천히 날아오는 그 작은 구슬을, 사실 필리페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자신에게 허접한 불꽃 따위가 통할 리가 없다.

달려들던 그가 귀찮은 벌레라도 쳐내듯 손등을 휘두르는데.

쩌적!

“!”

쳐내긴커녕 비늘을 뚫고 들어오는 불구슬을 보며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직후.

콰아아아아앙!

불구슬이 폭발하며 필리페의 몸이 크게 튕겨 나갔다.

허공에서 자세를 잡은 그가 땅에 발을 박아 넣으며 날아가는 기세를 줄였다.

그곳엔 어느새 유릭이 있어 그에게 검을 휘둘렀다.

“이 새끼가!”

으득.

필리페가 이를 갈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왼손의 적화린은 방금 한 방에 거의 너덜너덜해진 탓이다.

캉-!

검이 튕기며 유릭의 몸이 크게 흔들린다.

필리페가 왼손에 불꽃을 감싸며 유릭의 명치로 어퍼를 날렸다. 쾅! 그러자 작은 폭발이 일었다.

“……!”

유릭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로 뛰어 충격을 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격을 모두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찡그리며 물러나는 그를 필리페가 맹렬히 추격했고 유릭은 놈을 견제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5중첩의 화룡검화.

5번이나 중첩된 녹시아의 불길은 이전과는 달리 보다 간결하고 정제되어 있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적화린을 감싼 오른팔로 녹시아를 막으려던 필리페는.

쩌적!

비늘이 금을 가는 것을 보곤 그 즉시 뒤로 뛰어 몸을 피했다.

왼손의 비늘에 이어 오른팔의 비늘까지.

적화린이 훼손된 것을 보곤 그의 눈이 일그러졌다.

“유릭 로스카…… 이렇게 쉽게 내 오러를 뚫다니 벌써 마스터에 오른 건가? 아니, 그렇지는 않은데…….”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유릭을 살폈다.

평범하게 부딪히면 마스터가 아닌 자의 오러는 마스터의 오러를 뚫을 수 없다.

멀리서 오러를 발출하느라 마스터 본인의 제어력이 흔들린다든가, 기타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결코 깨지지 않는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상식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유릭에게선 마스터 특유의 ‘그릇’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뭐가 어찌 된 거지?’

마스터도 아니면서 자신의 적화린을 부수다니…….

필리페가 입가를 씰룩이며 양 주먹을 부딪쳤다.

그러자 화르륵, 불길이 피어오르며 부서졌던 적화린을 빠르게 수복했다.

부서져도 마나만 남아 있다면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는 것도 이 마갑의 큰 장점 중 하나였다.

‘무슨 술수를 부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방심할 순 없겠어.’

이미 처음과 같이 유릭을 얕보는 마음은 일절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 그에겐 시간도 없다.

발터가 오기 전에 어떻게든 유릭을 치우고 퇴각해야 하는데.

-콰아아아앙!

안 그래도 뒤쪽에선 계속해서 폭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발터가 자신의 부하들을 치우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단 뜻이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끌 순 없겠군.”

필리페가 양손을 펼친다.

그러자.

화르르륵!

그의 몸을 뒤덮은 적화린이 부풀기 시작했다.

크게, 더욱더 크게.

거인과 같이 비대화된 그것은 이윽고 필리페와 분리되어, 수호상처럼 그의 뒤를 지켰다.

마인 적화린.

용을 물리치고 그 피를 취했다는 불의 거인.

그 마인과 필리페는 불꽃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피가 올라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필리페가 유릭을 바라본다.

끼기기긱-

마인이 팔을 들어 뒤로 당기더니, 유릭을 향해 쏜살같이 내질렀다.

“…….”

유릭이 말없이 자세를 낮추며, 또 한 발의 나찰 염환을 만들었다.

* * *

“쏴라! 일단 쏴!”

필리페가 마인을 펼친 직후 경비대장이 급히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슉! 슉슉!

그들이 바쁘게 화살을 메겨 활을 쏜다.

하지만 그들이 쏜 화살은 적화린의 비늘에 금 하나 줄 수 없었다.

“큭!”

이렇게 많은 병력이 있는데도 결국은 1:1의 상황이 펼쳐진다.

잘해봐야 마나나 조금 다룰 줄 아는 수준의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쌔애애애액!

적화린에 감싸인 마인의 주먹이 공기를 찢으며 쇄도했다.

그 커다란 권격 앞에 유릭이 만든 나찰 염환은 너무나 작고 미약해 보였다.

하지만 결과마저 작진 않았으니.

쿠웅-!

주먹이 닿기 직전 유릭이 쏜 나찰 염환이 착탄한다.

마인의 주먹은 놀랍게도 그 작은 구슬에 막혀 그대로 멈추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마인의 주먹이 기세를 잃고 회수되었다.

‘……젠장.’

마인을 조종하느라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필리페가 이를 갈았다.

이것마저 막아내다니!

마인을 펼치는 것은 물론 그걸 조종하는 것조차 굉장히 소모가 큰일이다.

마나가 급격히 빨리는 것은 물론이고 조종하는 것에도 신경이 타들어 갈 듯한 고통이 동반된다.

그러니 일격에 짓눌러 버리는 게 가장 최선이었지만.

쿵, 쿵, 쿵!

거대한 주먹이 유릭을 난타한다.

그걸 모조리 피하며, 정 피할 수 없는 일격은 나찰 염환을 만들어 상쇄하며 유릭이 권격을 받아내었다.

그 과정이 길어질수록 필리페의 눈이 점점 충혈되었으나.

“후우…….”

‘역시 쉽지 않군.’

생각만큼 유릭도 여유가 있진 않았다.

마인의 주먹에는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불타오를 듯한 열기가 담겨 있다.

아무리 피한다고 해도 그런 용암 덩어리 같은 것이 근처를 지나가는데 소모가 없을 수 없었다.

심지어 몇 번은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나찰 염환을 펼쳐 막아냈는데,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의 유릭으로선 아직 하나를 만드는 데도 많은 정신력과 내기가 깎여 나가는 상태인데.

쿵!

주먹이 떨어져 땅에 박힌다.

바로 그때 놈의 움직임에 아주 작은 틈이 생겼다.

‘지금.’

유릭이 눈을 번뜩이며 마인의 팔뚝에 검을 내질렀다.

녹시아에서 휘둘러진 검기가 두터운 기둥과도 같은 팔뚝에 작렬한다.

적화린의 비늘에 막히나 싶던 검기는, 기이하게도 마갑을 투과해 안쪽에 있는 마인을 베었다.

화륵!

불로 이루어진 마인이 베이며 적화린의 비늘 사이로 놈의 불꽃이 새어 나왔다.

“아닛!”

듣도 보도 못한 기현상에 필리페가 경악성을 질렀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들어본 적은 있다.

분명 스카디 왕국의 마스터인 엘가이아가 펼치는 검이 이것과 비슷하다 들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스카디의 훈장!’

그러고 보니 유릭은 스카디 왕국의 훈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떠올린 필리페가 이를 갈았다.

사실 그 훈장은 엘가이아와 정적 관계인 왕비가 내린 것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필리페에겐 유릭과 엘가이아의 친분의 표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엘가이아의 검술은 꽤 알려져 있는 만큼 공략 방법도 고안되어 있다.

마나를 얇게 조형해 갑주에 두른다. 그리고 그 마나의 성질을 지속적으로 바꿔주어 상대가 파악하지 못하도록 한다.

엘가이아의 검이 갑주를 투과하기 위해서는 그 성질을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는 제약이 있다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캉!

유릭의 검이 막혔다.

유릭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곤 필리페가 씩 웃었다.

당황해 멈칫한 놈을 마인의 주먹이 덮쳤다.

콰앙!

“큽!”

쿠구구구구!

유릭의 몸이 날아가 근처의 건물에 처박혔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쿨럭, 피를 토했다.

‘젠장.’

-약점을 눈치챈 거 같은데요?

메르의 말대로였다.

엘가이아의 검기를 보고 습득한 화령격은 확실히 신묘한 성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약점도 명확했다.

오러를 투과시킬 매질의 성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맥없이 막힌다.

그것이 평범한 돌과 강철이면 상관없지만, 지금처럼 적의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을 땐 문제가 되었다.

기운의 성질을 지속적으로 바꿔주는 것만으로 화령격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니까.

‘결국 강약약강의 검술이란 건가?’

마나를 조형할 줄 모르는 약한 이에게만 잘 통하고, 그 이상의 강자에겐 먹히지 않는?

콰앙!

그 뒤로 유릭은 속절없이 밀리기만 했다.

마인의 권격이 쏟아져 내렸고 유릭은 그걸 피하는 것만도 급급했다.

어떻게든 틈을 보아 반격을 해보지만 적화린의 비늘 몇 장을 부수고 끝날 뿐.

그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금세 수복되는 수준의 데미지였다.

틈틈이 유릭은 화령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처음 이후론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릭은 마인의, 정확히는 적화린의 관찰을 멈추지 않았다.

필리페가 바꾸는 불의 성질을 파악해 단 한 번만 제대로 찌를 수 있다면.

그것만이 저 불꽃의 갑주의 유일한 공략법이었다.

카앙!

그러나 몇 번이나 시도한 화령격은 또 한 번 실패했고.

콰앙!

그 대가로 유릭은 마인의 주먹에 휩쓸린다.

회심의 일격이 실패하면 얻어맞는 것이 당연.

그걸 알고 있을 텐데도, 그럼에도 유릭은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멍청한 놈.’

그걸 보며 필리페가 비웃었다.

그가 볼 때 유릭이 하고 있는 일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놈이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은 저렇게 불나방처럼 달려들 것이 아니라, 몸을 사리며 최대한 시간만 끄는 일이다.

자신의 발만 묶어두면 머지않아 발터 로스카가 도착할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마인의 조종은 그렇게 길게 할 수 없다.

안 그래도 이미 마나가 절반 이상 소모된 데다, 통증 탓에 정신력도 적지 않게 깎여 나간 상태.

술법의 규모를 보고 소모가 막심함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보는 눈이 없는 것이고, 알면서도 저러는 것이라면 멍청하다.

어느 쪽이든 자신에겐 좋은 일이었다.

‘놈도 그렇게 오래 버티진 못한다.’

엘가이아의 검을 시도할 때마다 유릭은 크게 데미지를 입고 있다.

맷집 하난 훌륭해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앞으로 한두 번이다.

그거면 유릭은 쓰러지고 자신은 무사히 도주할 수 있다.

기절한 데릭 로스카와, 잘하면 기절한 유릭 로스카까지 가지고 갈 수 있겠지.

그렇게만 되면 최상의 결과였다.

‘데릭과 유릭. 직계가 둘이나 있다면 넥타르의 협상 재료론 충분하지.’

그 정도 인질이라면 어떻게든 다시 넥타르를 얻어낼 방법을 강구할 수 있다.

그렇게 그가 눈을 빛내고 있을 때.

화르륵-!

“……어?”

적화린의 틈새를 뚫고 새어 나오는 불꽃을 보며 필리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유릭의 화령격이 다시 한번 마인을 베어 그 불꽃을 도려낸 것이다.

‘내가 너무 방심했나? 좀 더 패턴을 빠르게 변화해야겠군.’

방심한 탓에 패턴이 읽힌 것이라 생각해 그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화르륵-!

그런 보람도 없이, 유릭의 다음 일격도 마인의 불꽃을 베어냈다.

‘어떻게……!’

필리페가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 * *

보인다.

적화린의 비늘을 이룬 마나 원소 하나하나의 성질이 적나라하게 유릭의 눈에 비쳤다.

그것은 오묘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붉기만 한 불꽃 속에 오색찬란한 마나가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혹시 마나를 볼 수 있게 해준다는 렉사나를 먹으면 이런 광경이 보이는 것일까?

물론 유릭이 참지 못해 마약 따위를 복용한 것은 아니었다.

-어르신! 언령이!

누구보다 유릭의 가까이서 변화를 감지한 메르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천 년을 산 드래곤에게도 생전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유릭의 몸에 언령이 깃들고 있다.

그것뿐이라면 평범히 깨달음을 얻어 마스터가 되었구나 하겠지만.

그 언령은 유릭의 것이 아니었다.

‘베어야 할 것을 베고 베지 말아야 할 것을 베지 않는 것.’

기사도의 맹세 제3항.

유릭은 지금까지 그것이 엘가이아의 언령의 정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적의 갑옷을 투과해 직접 베는 기술 따위 그저 그럴듯한 잔재주에 불과하다.

그의 언령은 보다 근본적인.

[그것은 곧 세상을 보는 힘일지니.]

보는 힘.

눈으로 보아 구분하고 판단하는 힘.

검을 휘둘러

잔재주를 부리는 일 따위 3살배기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물의 본질을 구분하는 것은 80년을 수련한 수도승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화령금안(火靈金眼).

일렁이는 불꽃을 담은 금빛 눈동자.

추하게 충혈된 필리페의 눈에 비해 유릭의 붉은 금안은 고고하고 아름다웠다.

‘이게…….’

그의 몸에 엘가이아의 진짜 언령이 깃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