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작은 응징(2)>
“뭐?”
당정일이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을 때였다.
우드득!
당연명이 움켜쥔 당정일의 주먹에서 기괴한 소리가 났다. 손가락의 마디들이 박살난 것이다. 당정일은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뒤이어 밀려온 끔찍한 고통이 아니었다면 한낱 꿈으로 여겼을 지도 몰랐다.
아아악⎯!
곧장 비명이 터져 나왔다.
“쉿.”
당연명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크게 힘을 쓴 것 같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그치지 않으면 놔주지 않을 거야. 아니면 아예 손을 완전히 부러뜨려 줄까? 더는 손을 쓰지 못하도록.”
조용히, 닥치란 소리였다. 흐으으 하는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당정일은 두려운 눈빛으로 겨우 비명을 삼켰다. 아직 그의 주먹은 당연명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주먹이 멀쩡할 때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손마디가 부러진 지금은 더더욱 빠져나올 수 없다. 믿기지 않는 상황은 둘째 치고, 일단 당연명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지배했다.
“...좋아.”
당연명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간헐적으로 새어나오는 신음이 있었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그는 소란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직은 힘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까닭이다. 어른들이 개입하면 상황을 원하는 대로 이끌 수가 없다. 당연명은 변수가 생기는 걸 경계했다.
‘생각보다 진기의 효율이 좋아졌군.’
당연명은 조금 전의 일을 생각했다. 사실 당정일이 이렇게 쉽게 무너진 것은 여러 요인이 있었다. 아무리 당정일이 독요청광기로 주먹을 보호하고 있었다고는 한들, 당연명은 전생에 이미 내가공부의 극에 다다라 있었다. 게다가 독요청광기의 구결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니 진기구조를 역산해 당정일의 주먹을 보호하는 기운을 흩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동종의 내공을 익히고 있었기에 더욱 간단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세맥의 불순물을 제거했던 일.
본래 진기의 통로인 경맥과 온갖 혈맥이 깨끗할수록 유실되는 힘이 적어져 소량의 진기로도 큰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당연명의 예상 이상으로 독요청광기의 위력이 강해진 모양이었다. 적당히 손목이나 꺾을까 했는데 아예 주먹이 부러질 줄이야.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이 소악귀들을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어쭙잖게 밟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짓눌러버리는 게 나을 터다. 잠깐 아예 죽여 버릴까하고도 생각을 했었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었다. 당연명과 당지혜, 두 모자는 당가의 울타리가 필요했다.
순간 느껴진 살기에 당정일이 흠칫 몸을 떨었다. 당정일의 표정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고통과 분노, 의문, 그리고 치욕과 두려움이 다채롭게 뒤섞여 있었다.
그런 당정일의 얼굴을 보며 당연명이 입을 연다.
“꿇어.”
“...뭐?”
당정일이 되물었지만 당연명은 대답 대신 손아귀에 힘을 줬다. 아악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당정일이 냉큼 무릎을 꿇었다. 이젠 당정일이 당연명을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됐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으, 응!”
당정일은 붉어진 얼굴로 다급히 대답했다. 이제껏 장난감으로 여기던 녀석 앞에 무릎을 꿇고 있으니 치욕스러울 만했지만 어쩔 텐가, 당장 양손이 불구가 될 지도 모르는 위기인데.
“난 말야.”
당연명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
당연명 몰래 조금씩 거리를 좁히던 당문찬과 흥미로운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당영령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럼 그동안 일부러 실력을 숨겼단 말인가?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
납득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당장 눈앞에서 어떠한 꼼수도 없이 완력 하나는 발군이던 당정일을 무릎 꿇리지 않았나.
“그런데 너희들이 날 내버려두지 않았지. 어머니의 당부 때문에 그간 억지로 참아 왔는데.... 끝이 없더라. 며칠 전에야 깨달았지. 참기만 해서는 답이 없구나.... 우리 모자가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스으으.
계속해서 말을 잇는 당연명의 기세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독요청광기를 끌어올린 까닭만은 아니었다.
고도로 정제된 살기(殺氣).
전생에서 검신의 영역에 닿았던 당연명이다. 소악귀라 하나 아직 어린 아이들이 지려버릴 정도의 살기를 뿜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렇게나 뿜어대는 살기와는 격이 달랐다. 정제된 살기는 사람의 심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검도 고수들 중 극히 일부만이 구현 가능한 심상 공부이기도 했다.
아직 내공이 제대로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발현하는 것이라 살기의 권역이 고작 삼 장 남짓이긴 했지만 충분했다. 녀석들은 아마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공포를 느끼고 있을 터였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특히나 바로 앞에서 당연명의 살기를 접한 당정일의 얼굴은 완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심혼에 제대로 타격을 입은 것이다. 아마 그는 당분간 당연명의 얼굴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터였다.
“경고하건대.”
비로소 당정일의 주먹을 놓아주며 당연명이 말했다.
“다시는 날 건들지 마. 다음에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간의 빚이 있긴 하지만 여기서 끝내자.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참, 애들 사이에서 우리 어머니를 욕하는 말도 나오지 않게 해. 만약 그런 소리가 들린다면 내가 너희를 찾을 거야.”
“알겠어. 연명아.”
살짝 두려운 눈빛으로 당영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조금 뒤. 그녀의 눈빛이 교활하게 바뀌었다.
“...그런데 어쩌지? 이미 하독해버렸는 걸.”
하독(下毒). 은밀하게 독을 뿌리는 것을 뜻한다. 확실히 용독술의 고수를 할아비로 두었다는 게 맞는 말인 듯했다. 당연명은 그녀가 독을 뿌리는 낌새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었다. 아직 기감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서 감각에 사각이 있었다.
“내가 만든 칠보산(七步散)이야. 산공독의 단점을 개량해봤지. 오늘 쓸 생각은 없었는데 가지고 오길 잘했어.”
산공독의 단점은 분명했다. 효력이 나타나는 데 꽤나 시간이 걸린다는 것. 특히나 심후한 내공을 지닌 이들에게는 거의 소용이 없었다. 두텁게 쌓인 내공은 독으로 어찌해볼 틈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일정 경지 이하의 무림인들을 상대할 때는 산공독만큼 효과적인 게 드물었다. 기본적으로 무색무취인 산공독은 은밀하기까지 해서 중독시키는 데도 용이했다. 독효가 도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칠보산은 산공독의 그러한 점을 개선한 것이었다. 어차피 고수들에게는 효과가 없으니, 산공(散功)되는 정도를 약하게 하고 효력이 나타나는 시간을 앞당긴다⎯
‘과연 대처할 수 있을까?’
당영령은 흥미로운 눈길로 당연명을 바라봤다.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소년이 두렵고도 신기했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만든 독으로 소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제압할 수 있다면?
아주 짜릿한 유혹이었다.
자고로 용독술의 묘미는 은밀함으로 자신보다 강한 자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당영령은 공포를 이겨내고 하독을 시도했다. 소년이 살기의 권역을 형성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하독의 결과는 성공. 당연명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내공을 끌어올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면 독효가 더 빨리 도니까. 제 목을 스스로 조르는 꼴이었다.
당영령은 당문찬에게 눈짓했다. 마무리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이 정도면 거의 숟가락에 밥을 떠서 먹여주는 거잖니.
“...정말 중독된 거겠지?”
소녀의 시선을 느낀 당문찬이 미심쩍은 듯 말했다. 조금 전 그가 느낀 공포의 잔재가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저걸 봐. 기세가 사그라지고 있잖아. 칠보산의 효력이야.”
확실히 당영령의 말대로였다.
스산한 눈빛으로 서 있는 당연명에게서는 더 이상 직전의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자신이 생긴 당문찬은 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야, 당연명. 아까는 잘도 입을 나불거리더라...?”
“.......”
“말이 없는 걸 보니 제대로 당했나본데. 응?”
당문찬은 확신했다. 놈은 칠보산에 중독되어 더 이상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상태라고. 대답할 정신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
한순간에 득의양양해진 당문찬은 욕설을 뱉으며 바닥을 찼다.
“넌 이제 뒈졌어. 새끼야...!”
한편.
당연명은 당문찬의 말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묘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무인들이 흔히 몰아(沒我)라고 칭하는 상태다. 현실과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다르다. 당연명은 천천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독이라.’
전생에서는 독에 대해서 염려할 일이 없었다. 내가공부가 경지에 달해, 환골탈태는 물론이고 만독불침에까지 이른 육신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지금의 나약한 육신은 이러한 종류의 공격에 취약했다. 물론 상대가 독을 쓸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칠보산과 같은 무색무취의 독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좀 더 감각을 벼려야 했다.
어쨌거나 이미 중독은 진행된 상태였다. 체내에 퍼진 칠보산이 시시각각 당연명의 독요청광기를 흩어놓고 있었다. 아직 그의 내공 성취가 낮은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요청광기의 밀도가 독기에 밀릴 정도로 옅었다.
이런 경우 보통의 대응 방법은 하나였다. 독기를 한 곳으로, 예를 들면 손가락 중 한둘로 밀어 넣은 채 혈맥을 폐쇄하는 것. 사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신에 돌고 있는 독기를 한 곳으로 몰아넣는 것을 적이 가만히 기다려줄 리도 없는데다가 섬세한 진기 도인 능력이 필요한 때문이었다.
물론 당연명에게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검에 미쳤었던 전생, 내가공부 역시 극을 보았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 산공독의 기운을 새끼손가락 하나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당문찬과 당영령의 생각과는 달리 전혀 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면을 관조하던 당연명은 불현듯 어떤 화두를 떠올렸다.
‘독요청광기가 산공독에 흩어지는 것이 말이 되나...?’
사천당가.
한때 독과 암기의 조종으로 추앙받던 사천의 명문.
독요청광심법은 그러한 당가의 가전 심법이다.
즉, 독과 암기를 잘 다룰 수 있는 기운을 쌓는 호흡법일 터였다. 세밀한 운용이 가능한 성질은 암기를 다루는 데 적합할 것으로 보였다.
그렇담 독은?
독요청광심법(毒要靑洸心法)
무공의 명칭은, 대개 핵심요결에 이르는 심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근래는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덧붙여 작명하곤 했지만, 당연명이 전생에서 기억하는 바로는 그랬다.
독요(毒要)⎯
독을 구한다.
독을 바란다.
독을 원한다.
이름에 담긴 뜻을 궁구하다, 당연명은 깨달았다. ‘독요’라는 글자 자체가 심법의 핵심요결이었음을. 전화위복이라 해야 할까. 아직 제대로 된 힘을 갖추기 전이라서 산공독, 칠보산에 당한 것이 도리어 기연이 된 것이다.
번쩍!
찰나지간 당연명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하늘빛 번개가 쳤다. 경지에 이른 무인이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나 발현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안광이 워낙에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 터라, 당문찬과 당영령은 보고서도 제대로 인지를 하지 못했다.
‘대성했다.’
당연명은 자연스레 자각했다. 지금 이 순간, 독요청광심법을 완전무결하게 익혀냈음을.
자각하자마자 독요청광기의 기질이 바뀌기 시작했다. 칠보산에 의해 흩어지던 독요청광기가 끈적이는 느낌으로 다시 뭉치더니 독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숫제 잡아먹는 모양새. 형세역전이었다. 당연명의 독요청광기는 순식간에 덩치를 불렸다. 칠보산에 의해 흩어지기 전보다 더 크고 진해진 듯했다.
독을 잡아먹고 자라는 기운.
그게 독요청광기 본연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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