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소가주 경합(1)>
푸쉬쉭 하는 소리와 함께 당영령의 머리칼이 가닥가닥 끊어지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강한 독인 모양이었다. 당영령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당연명이 그보다 한발 빠르게 그녀의 아혈을 짚었다.
“...!”
갑자기 말소리가 나오지 않자 당황하는 당영령. 아혈이 짚인 것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당연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병을 열었다. 살짝 청아한 향이 나는 맑은 액체였다.
당연명은 당영령의 눈빛에 회심의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건 버리고.”
쪼르르 흘러나온 맑은 액체가 흙바닥에 스며든다.
“...!”
당영령은 당황했다. 그녀가 방금 뒤집어쓴 독은 부피독(腐皮毒)이라는 것이었다. 머리칼이나 짐승의 털을 삭히는 특징이 있긴 했지만, 보기보다 그리 위험한 독은 아니었다. 독의 효과로는 가벼운 발진을 동반한 간지럼증이 전부였다. 일각 안에만 해약을 먹는다면 깔끔하게 해독이 가능했다.
문제는 그 해약이 방금 사라졌다는 거다. 흙바닥 속으로.
당영령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직 일각은커녕 몇 호흡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얼굴에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다급히 옷소매로 닦아냈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미 늦었다는 것을. 부피독은 접촉 즉시 피부에 스며드는 까닭이다. 얼른 약왕당으로 가서 해약을 복용해야 했다. 발진이 생기기 전이라면 모를까, 일단 생기고 나면 없애는 게 힘들었다. 없애더라도 자잘한 흉은 남을 가능성이 컸다. 하필이면 얼굴에 부피독이 묻었으니, 소녀로서 당영령이 다급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애원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당영령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자고로 남자들은 여인의 눈물에 약하기 마련이었으니. 어설프지만 그렇게라도 자비를 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연명은 망설임 없이 다음 독병의 마개를 뽑았다. 당영령이 제법 예쁘장한 얼굴이긴 했지만 그의 정신은 완숙한 성인의 것이었다. 여아가 조금 깜찍하게 생겼다고 해서 봐줄 마음이 들 리가 없다. 게다가 지금 그의 모친이 누구인가. 한때 마광천주가 눈독을 들였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 당지혜였다. 나이가 조금 들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한 아름다움을 태어났을 때부터 일상적으로 접해온 소년의 심미안이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당연명은 소녀의 머리 위로 독을 뿌렸다. 평범한 듯 보이는 액체였지만 당영령은 그게 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창복독(脹覆毒)
흔히 음식에 섞어 쓰는 것으로, 약간 신맛이 나지만 맵거나 짠 음식에 넣으면 들킬 가능성이 적었다. 독효마저 가벼운 배탈과 설사를 유발하는 것이어서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여러 번 중독되면 꽤나 위험한 독이었다. 배탈이 멎어도 독기가 체내에 잔류하는 까닭이다. 점차 복통의 강도가 심해지며 종래에는 창자가 뒤집히는 것만 같은 고통을 겪게 된다.
‘저건 해약이 없는데.’
당영령은 쏟아지는 창복독을 맞으며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라고 해서 지니고 다니는 모든 독의 해약을 다 가지고 다니지는 않았다. 가벼운 증세를 보이거나 그녀 자신이 복용할 리 없는 독은 굳이 해약을 챙길 필요가 없으니까. 가문 내에 약왕당이 있기도 했고.
사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창복독은 원래 음식에 섞어 소량씩 희석시켜 먹이는 독이다. 지금처럼 단순히 피부에 다량이 닿았을 때는 어떤 독효를 나타낼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먼저 뒤집어쓴 부피독과 섞여 새로운 독효를 나타낼 수도 있었다.
흔히 당가십독(唐家十毒)이라 불리는 극독들도 여러 독을 배합해 만들어낸 경우가 많았으니.
아니나 다를까.
당영령은 문득 정수리 부근이 휑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두피 위에서 부글거리며 기포가 끓어오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부피독과 창복독이 서로 어떠한 작용을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거기까지만 이어졌다.
당연명이 그녀의 수혈을 짚은 까닭이다. 그는 처음으로 살짝 당황한 눈빛을 내보였다.
‘너무 심했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당영령의 몰골은 처참했다. 정수리를 중심으로 주먹 크기의 반원 범위에서는 머리칼이 힘없이 우수수 빠지고 있었고, 이마와 광대, 코에서는 발진이 쉼 없이 일고 있었다. 깜찍한 소녀의 얼굴은 이제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멈출 생각은 없는 소년이었다. 당연명은 의식을 잃은 당영령의 피부 위로 이런저런 액체와 가루를 모조리 쏟아냈다. 모두가 독은 아니었다. 개중엔 해독약도 있었기에, 당영령의 피부에서는 다양한 독효가 나타났다 사라졌다하기를 반복했다.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진 당영령의 호흡은 여전히 골랐다. 자면서도 가려움을 느끼는 것인지, 손톱으로 발진이 가득한 얼굴을 벅벅 긁어 진물이 흐르긴 했지만. 목숨이 위중해보이지는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의 수중에 극독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당연명은 그녀의 허벅지에 박힌 수리검을 쑥 빼들었다. 출혈로 목숨을 잃진 않도록 혈도를 짚어 적당히 지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맛이 꽤 괜찮았단 말이지.’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당영령의 옷자락에 슥슥 문질러 피를 닦아낸 다음 품에 챙긴다. 던져보니 알 수 있었다. 무게중심이 잘 잡혀 있는 게 꽤나 잘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전생에서는 늘 장검만 썼더랬다. 이런 수리검처럼 암기에 가까운 단검은 써본 적이 없었다. 하나 당연명은 전생에서 검신의 영역에 다다랐었다. 검신(劍身)의 길이 따위에는 구애받지 않는 경지였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니 눈에 띄는 장검 대신 이렇게 수리검이나 비도 따위를 품에 가지고 다니는 것도 좋을 듯했다. 실력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여차하면 검처럼 사용할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당가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한 이상 가급적 장검을 들 일이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
‘여벌로 여러 개를 장만하는 것도 괜찮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당연명이 말했다.
“야.”
누굴 부르는지는 뻔했다. 소악귀 셋 중 둘은 의식을 잃었다. 소년의 부름에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당정일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한다. 당연명이 당영령에게 하는 짓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차였다.
“으, 응!”
“얘네. 내버려두든, 데려가서 치료를 하든지 뒤처리는 네가 알아서 해. 그나마 맨정신... 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눈을 뜨고 있는 건 너뿐이니까. 오래 지체하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아, 알겠어!”
“또.”
당정일이 다가서며 슬쩍 살기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당정일이 헛숨을 들이켜며 딸꾹질을 시작했다. 극도로 공포스러운 무언가를 눈앞에 두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보 같긴. 그러게 피차 조용히 살았으면 좋았잖아? 뭐. 어쨌건, 오늘 일은 조용히 마무리하도록 하자. 그게 싫다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이....”
“아, 아냐! 어른들에겐 내가 잘 말할게! 다시는 괴롭히지 않을게...!”
“괴롭히지 않는다고...?”
픽 웃음을 흘린 당연명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너흰 더 이상 날 어쩌지 못해. 이젠 나도 참지 않을 생각이니까. 오늘은 그나마 봐주는 건줄 알아. 다음에 또 내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 있으면....”
스윽 당정일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가져간 당연명이 그의 귓전에 속삭였다.
“가차 없이 죽여 버릴 거야.”
당정일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당연명의 숨결이 멀어질 때까지.
그의 뇌리엔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염원만이 가득했다. 후일을 도모해 당연명을 어찌해보겠다는 미친 생각 따위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악귀야.... 그래. 소악귀임에 틀림없어. 연명이의 탈을 쓴.’
이제는 당정일이 당연명을 소악귀로 생각한다. 입장이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처신 잘 해. 지켜본다.”
마지막으로 섬뜩한 한 마디를 남긴 채, 당연명은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
발소리가 제법 멀어지고 나서야 당정일은 겨우 멈췄던 숨을 쉴 수 있었다.
때마침 당연명이 멀어져가는 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헤친다. 하지만 그는 시원함은커녕 등골이 쭈뼛해지는 오싹함을 느꼈다.
마치 당연명이 가문에 어떤 풍운을 몰고 올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던 탓에.
****
당연명은 걸었다. 모친이 기다리는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당정일을 비롯한 놈들에게 구두로 경고를 남기긴 했지만, 그런 말뿐인 조치로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까닭이다. 당연명은 자신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 줄 수단을 취할 셈이었다.
즉 대책 없이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이쪽인가.’
성세는 쇠락했다고 하나, 한때 이름 높았던 만큼 가문의 내부는 제법 넓고 복잡했다. 하지만 소년의 기억을 흡수한 당연명은 큰 어려움 없이 길을 찾았다.
길을 걷는 와중에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당가의 가솔들. 그들 중 극히 일부는 당연명에게 동정어린 눈길을 보냈으며, 또 일부는 혐오와 멸시의 시선을 보냈다. 아예 소년을 모르는 듯한 이들도 있었다. 원래의 소년이었다면 괜히 움츠러들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뭐.’
되레 당당하게 눈을 마주친다. 당신네들 얼굴을 모조리 기억해두겠다는 듯이.
“무슨 어린놈의 눈빛이...”
“허. 과연 핏줄은 못 속인다는 건가. 기개가 있군.”
“독봉도 젊은 시절 그 미모만큼이나 패기가 있었지.”
“아, 저 아이가...? 워낙에 두문불출하여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네요.”
“그래봤자야. 저 녀석.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라더군. 폐인이나 다름없어.”
“신경 쓸 것 없다. 제깟 놈이 눈을 부라려봐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인즉.”
가솔들은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들어댔다. 소년이 듣건 말건 상관없다는 태도로.
당연명은 고개를 치켜들고 그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다 들리게 떠들던 이들도 막상 소년이 아주 가까이 다가오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정적을 만들어낸 당연명은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역시. 힘이 있어야 해.’
당가는 무가다. 평범하게 살려면 그래도 사람취급은 받을 수 있어야 했다. 일신의 무력을 획득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지만, 그보다도 확실한 힘이 필요했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조심하는 그런 힘. 선을 넘는 자들에게 일일이 응징을 가하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니까. 쉽게 말해 가문 내에서의 뚜렷한 지위 같은 것 말이다.
‘여기로군.’
당연명은 한 전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암독지왕 사천제일(暗毒之王 四川第一)
현판에 적힌 용사비등한 필체가 눈에 들어온다. 한때 가주전으로 쓰였던 전각이었다. 달리 암독전(暗毒殿)이라 불리기도 했다. 원래 가주가 거처하는 곳이자, 가문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장소였지만 가주의 자리가 오랜 기간 공석으로 있으면서,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곳이기도 했다. 가문의 일은 대부분 장로원의 선에서 결정이 났으니까.
그러다 최근 들어 암독전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 역시 소년의 기억에 의존한 정보였다. 소년은 유약했었지만, 가문의 일에 관심이 많았다.
끼이이⎯
당연명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는데, 기름칠이 잘 되지 않았는지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마자 꽂히는 수십의 시선. 하나같이 상당한 수준의 실력자인 듯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대고 있었다.
그중 한 사내가 당연명을 알아보고는 물었다.
“넌 독봉 누님의 아들이 아니냐? 이름이 분명....”
“연명입니다.”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한데 네가 여길 왜...?”
이곳이 무얼 하는 곳인지 알고 찾아온 것이냐는 눈빛에 당연명은 분명한 어조로 힘주어 말했다.
“소생 당연명. 본가의 소가주 경합에 참가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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