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소가주 경합(3)>
반 각만에 대강의 절차가 마무리 됐다. 경합을 주관하는 것은 암왕대와 독왕대의 각 대주였는데, 독왕대주 당지혁은 급한 전갈을 받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따라서 당연명의 경합 참가는 전적으로 암왕대주 당적휘가 담당하게 되었다.
당적휘는 독왕대주가 사라진 후부터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당연명에게 말했다.
“명부에 네 이름을 기재해 두었다. 이제 너는 예비 소가주의 신분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경합에 참가해야만 한다.”
“감사합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경합의 참가자들은 웬만한 중죄를 저질러도 면책 처분을 받게 된다. 원할 경우에는 신변을 상시 보호받을 수도 있다. 경합이 시작될 때까지 암왕대와 독왕대의 무사들이 호위를 해줄 거다.”
“예. 그럼 지금 이 순간부터 호위를 부탁드립니다.”
“그래.... 뭐?”
당연명의 말에 암왕대주 당적휘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소가주 경합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신변보호를 요청한다? 무슨 중죄라도 지은 것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당적휘가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쾅!
“이 맹랑한 놈!”
“...무슨 일입니까. 독왕대주.”
“잘도 문찬이를...! 비키게. 암왕대주. 보통 사안이 아닐세. 어린놈의 손속이 보통 잔인한 게 아냐. 내 친히 엄벌을 내려야겠네.”
“진정하시죠.”
당적휘는 곁눈질로 소년을 훑으며 당지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지혁의 아들인 당문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 명백히 살의를 품고 있었다. 순간, 당적휘는 왠지 뒤의 소년이 웃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진 않았다.
당적휘가 슬쩍 기세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무슨 일로 이렇게 노기를 터뜨리시는지 침착하게 말씀해 보시죠.”
“저놈이 내 아들 당문찬과 부총관의 아들인 당정일을 공격했네. 둘 모두 팔과 손이 완전히 으스러졌다더군. 간악한 심계로 내공을 익힌 것을 숨겨오다, 기습을 한 것이 분명하네. 뿐인가? 삼장로의 외손녀인 당영령. 그 아이는 자네도 익히 알 걸세.”
모를 리가 없었다. 장로들 중에서도 실세인 삼장로 아닌가. 삼장로 당석형이 하나뿐인 외손녀를 애지중지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아이의 얼굴이 지금 어떤 꼴이 됐는지 아는가? 온갖 독으로 범벅이 되어 피부가 몹시 흉측해졌더군! 여러 독이 섞인 탓에 약왕당에서도 해독에 애를 먹고 있네. 이런 사실을 삼장로께서 알게 된다면....”
“그러니까.”
당적휘가 당지혁의 말을 끊었다. 상황을 대충 파악한 것이다.
“경합에 참가한 아이 셋을, 당연명 이 아이 혼자서 감당했다는 거군요. 기습을 했건 뭐건. 게다가 독왕대주께서는 연명이가 내공을 익힐 수 없는 것으로 알고 계셨고. 그럼에도 경합에 참가토록 하셨고 말이죠.”
“그건....”
당지혁은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당장에라도 당적휘의 뒤에 숨어 입꼬리를 끌어당기고 있는 소년을 응징하겠다는 생각이 앞서 냉정함을 잃었다.
“대주께 검은 속내가 있었음을 짐작합니다. 그리고 그걸 떠나 이미 당연명은 경합 참가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아시다시피 돌이킬 수 없는 일이죠.”
“적휘. 사안이 사안임을 생각하게! 저 교활한 놈이 면책을 위해 소가주 경합에 참가하겠다고 한 거란 말이네. 정녕 모르겠나!”
“예외는 없습니다.”
당적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어떤 통쾌함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당지혁을 비롯해 장로원에 제대로 한 방 먹인 기분.
“경합 참가자 당연명의 현재 신분은 예비 소가주입니다. 따라서 가문 내에서 발생한 어떤 중죄에 대해서도 면책의 특권을 가지며, 현 시간부로 그의 신변은 암왕대에서 보호토록 하겠습니다. 대주를 보아하니 독왕대에는 절대 맡길 수 없겠군요.”
“당적휘!”
“더 다가오면 이쪽도 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경합 참가자에게 위협을 느끼게 하지 마시죠.”
그렇게 말하면서 당적휘는 확신했다. 당지혁은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경합 참가자들을 보호하는 조치는 장로원에서 만든 것이다. 그걸 스스로 깨뜨려서야, 명분이 서지 않는다. 한 무력대의 대주 자리는 단순히 무력만으로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당한 처세술을 겸비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약간의 침묵 뒤 표정을 없앤 당지혁이 천천히 말했다.
“...그래. 인정하지. 설마하니 아직 아이에 불과한 녀석의 꾀에 당할 줄이야. 설령 삼장로라 해도 네게 직접 손을 쓰진 못하시겠지. 나 역시 널 건들지 않겠다. 네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암왕대와 독왕대 모두의 체면이 망가지는 걸 테니.”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선 당지혁은 걸어 나가면서 짓씹듯 몇 마디를 더 뱉었다.
“하나 그래봐야 사 년이다. 소가주가 되지 못한다면 너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테지. 독봉 역시 마찬가지다. 자식 간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죗값을 치러야 할 거다.”
아니, 어쩌면 사 년이 걸리지 않을 지도⎯ 나직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당지혁은 사라졌다.
‘착각을 하고 있군.’
당연명은 당지혁이 남긴 경고 비슷한 것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사 년? 이미 독요청광심법을 대성한 그였다. 보통의 심법이라면 세월에 비례한 크기의 내공을 갖추게 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독요청광심법은 다르다. 독을 먹어치워 몸집을 불린다. 그 말인즉슨, 내공을 쌓는 데 필요한 세월을 아주 짧게 단축시킬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일단 내공만 갖춰진다면, 전생의 무위를 되찾는 것은 여반장이었다. 검에 관한 깨달음이 여전히 선명한 까닭이다. 과연 사 년 뒤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은 누구일까.
“너.”
당연명의 상념을 깨뜨린 것은 당적휘였다.
“굳이 발뺌을 하지 않더구나. 독왕대주의 말대로 네가 저지른 일이 맞느냐?”
“예.”
당연명은 가볍게 긍정했다. 발뺌? 거짓을 고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소가주 경합 기간 동안만 신변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독왕대주 따위는 일수에 죽일 수 있는 무력을 손에 넣을 텐데.
“그렇다면, 일을 저지르고 곧장 여기로 온 것도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구나. 경합 참가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알고서.”
“.......”
당연명은 잠시 침묵했다. 암왕대주 당적휘. 앞으로 그의 안전을 지켜줄 무력대의 수장이었다. 독왕대주 당지혁과는 이미 척을 졌으니 말이다. 대충 봐서는 장로원 쪽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인물인 듯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당연명에게도 호의적일 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명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고 심기가 상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왜 그랬지?”
“무얼 말하시는지.”
“녀석들 말이다. 당문찬인가 하는 놈이랑, 부총관의 아들놈이랑, 또 당영령까지. 듣자하니 어지간히 독하게 손을 쓴 듯한데.”
당적휘는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눈빛으로 소년을 응시했다. 심계가 깊고,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는 것쯤은 당적휘 역시 눈치 챘다. 그러니 이번 일도 단순한 애들 싸움일 리는 없었다. 필시 어떤 사정이 있었을 터.
하지만 당적휘가 궁금한 것은 그러한 속사정이 아니었다. 어차피 독봉이 가문 내에서 경원시 당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눈을 감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궁금했다. 소가주 경합은 차기 당가를 이끌어갈 인물을 뽑는 행사다. 당적휘는 소년 당연명에게 가문을 이끌어갈 자질이 있는지 이번 대답에서 읽어내고자 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의 눈을 바라보던 소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당가의 사람입니다.”
“...그래. 당씨 성을 쓰고 있으니 나도, 너도 당가의 사람이 맞다.”
뜬금없는 얘기였지만 당적휘는 일단 맞장구를 쳐줬다.
“은혜는 두 배로.”
“응?”
“원한은 열 배로.”
“.......”
“놈들은 제게 원한을 샀고, 저는 당씨 성을 쓰는 사내로서 가규에 따라 협을 실천했을 뿐입니다.”
구구절절한 사정 따위는 말하지 않는다. 굳이 자신의 행위가 정당한 것이었음을 피력하지도 않는다.
소년은 협(俠)을 입에 담았다. 협이란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 다른 이의 잣대는 필요 없다. 그저 협을 실행하기에 충분한 힘이 있느냐, 없느냐만이 문제일 뿐.
소년의 말은 당적휘에게 묘한 감흥을 주었다. 쇠락한 당가는 이제 예전처럼 정(正)이니, 협(俠)이니 하는 기치를 내세우지 못한다. 사천무림에서의 생존이 달려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더욱 소년이 빛나 보였다. 아직 협을 잊지 않은, 그래서 더욱 힘의 중요성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크하하하핫!
암왕대주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진다. 흡족한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거, 소가주 경합에 대어가 걸려든 것 같군. 아니, 어쩌면 이무기일 지도.
“당연명, 네가 마음에 든다! 암, 본가의 소가주가 될 재목이라면 응당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벌써부터 사 년 뒤가 기대되는구나. 나 당적휘가 암왕대주로서 약조하마. 경합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 그러니 너는....”
말끝을 흐린 당적휘는 거짓말처럼 뚝 웃음을 그치고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꼭 소가주가 되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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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들었나? 부총관네 아드님이 크게 다쳐서 돌아왔다는군. 양 손이 완전히 부서졌다는 얘기가 있어.’
‘당정일, 당 공자를 말하는 건가? 소가주 경합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 들었는데.’
‘그래. 당정일 공자뿐만 아니라 독왕대주의 아들 당문찬 공자도 한쪽 팔을 거의 못 쓰게 됐다는군. 그보다 심각한 건 둘의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네. 완전히 겁에 질려 작은 소란만 일어도 흠칫 놀란다는군.’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독왕대라면 암왕대와 함께 본가 가주전을 지키는 정예 무력대일진대. 후환이 두렵지 않단 말인가?’
‘이걸로 끝이 아닐세.’
‘무어? 그게 무슨.’
‘당영령 아가씨를 알 걸세.’
‘모를 리가 있나. 그 삼장로 어르신의 금지옥엽이신데.... 아니, 설마?’
‘그래. 영령 아가씨도 크게 당했다고 하더군. 지니고 계시던 독을 모조리 흉수에게 빼앗기고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으셨다지.’
‘정말 미쳤군. 그래서 그 흉수가....’
‘들어보게. 그것도 모자라 흉수는 빼앗은 독을 전부 아가씨의 얼굴을 비롯한 피부 여기저기에 끼얹었다고 하네. 여러 독이 뒤섞여 약왕당에서도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더군.’
‘.......’
‘그런데 그 흉수가 누군지 아나? 그건 바로....’
당가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가문 내에서도 영명한 것으로 알려진 소년 소녀들이 처참하게 당했다. 각각 양 주먹이 으스러지고, 외팔이가 되고, 흉측한 피부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당연명, 독봉의 아들이었으니.
쉽사리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당문찬, 당정일, 당영령은 소가주 경합에 참가할 정도로 뛰어난 아이들이었다. 단순히 또래 셋을 때려눕힌 것과는 결을 달리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소문을 접한 이들은 삼장로나 부총관, 독왕대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독봉도 이제 끝이라 얘기했다. 더 이상 가문에 발붙이고 있을 수 없을 거라면서.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헛소문이 돌았던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그러나 당영령이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았다. 언뜻 드러나는 피부가 두꺼비 같았다는 얘기도 비밀스럽게 나돌았다. 적어도 당영령에 대한 것은 없는 얘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당연명이 무사한 걸까.
가솔들의 의문은 곧 풀렸다.
어느새 암왕대주 당적휘를 비롯한 무인들이 당연명을 지근거리에서 호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법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이들은 금세 이유를 알아차렸다. 또한 왜 삼장로나 부총관, 독왕대주 같은 이들이 당연명에게 손을 쓰지 못했는지도.
⎯경합의 참가자 명단에 새로운 이름이 추가되었소.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암독전에서 공식적인 선언이 있었다.
⎯새로이 이름을 올린 것은 당연명. 독봉 당지혜의 아들이오. 그에게 예비 소가주의 자격을 부여할 것인즉. 행여 경합이 시작되기 전에 위해를 가하려는 이가 있다면, 암독전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 여길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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