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소가주 경합(6)>
불빛조차 희미한 밀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커다란 원탁 앞에 둘러 앉아 있었다.
흑색의 쌍검을 교차해 메고 있는 중년의 무인부터, 불꽃 모양의 무늬가 수놓아진 남색 옷을 입고 있는 여인, 목내이처럼 극도로 마른 몸을 지닌 까무잡잡한 사내, 괴상하게 생긴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노파....
제각각의 특색을 지닌 이들이 십여 명.
그들에게서 뿜어지는 기세 역시도 각양각색이었는데, 아마 사천의 무림 사정에 대해 밝은이가 밀실에 모인 자들의 면면을 보았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사천 전역에 뻗어 있는 흑사련 휘하 사파세력들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심화방, 천진방, 태을묵검파, 초붕문, 현중도문, 목영궁, 해월곡....
흑사련 휘하 방파들 중에서도 그 세가 강력한 축에 속하는 이들.
이들이 모여서 무엇을 작당하려는 것일까?
처음 입을 연 것은 쌍검을 메고 있던 중년인이었다. 태을묵검파의 장문인 막인후였다.
“우선 모여 주셔서 고맙소. 다들 공사가 다망하실 텐데 말이오.”
“다름 아닌 당가의 일이라는데, 모이지 않을 수야 있나요.”
“심화방주의 말씀이 옳소. 쇠락했다고는 하나 당가는 여전히 경계해야 할 만한 존재요. 한때 사천제일이라 불렸던 만큼 저력이 있는 가문이라 봐야겠지. 게다가 무공 수위와는 별개로 그들의 독과 암기는 몹시 위협적이오. 다름 아닌 그 마광천을 막아낼 정도였으니.”
“흥. 그래봐야 련주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없앨 수 있는 곳이지요. 지금은 나름의 쓸모 때문에 놔두시는 것이지만....”
사람이 많아서일까. 막인후가 한 마디를 하자 너도나도 입을 열어 금세 소란스러워질 기미가 보였다. 막인후는 가볍게 헛기침을 해 다시 좌중의 시선을 가져왔다.
“일단 본인의 말을 먼저 들어주시기 바라오. 근래 당가가 모종의 일을 꾸며 왔다는 건 다들 알 것이오.”
“소가주 경합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끊지 말라고 했는데 심화방주 여설련이 바로 묻는다. 막인후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얘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바로 그렇소. 세작에 의하면 며칠 전 경합의 개최를 선언했다고 하오. 직후에 참가자들... 그러니까 소가주가 될 가능성을 지닌 당가의 아해들은 마차를 타고 출발했고.”
당가라고 해서 당씨 성을 쓰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쇠락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웬만한 가문보다는 규모가 컸다.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이들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 이들 틈에 간자 몇 끼워 넣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 아이들이 당가의 미래라는 것은 명약관화요. 자칫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당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히는 것이 되겠지. 장로라는 작자들의 욕심이 과했소. 공정성을 위해 가문 외부에서 경합을 하도록 꾸렸겠지만, 이런 경우 늘 불상사가 일어나는 법 아니겠소?”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막인후.
“태을묵검파 장문의 말씀이 실로 옳소. 후후.”
원탁 앞에 둘러 앉아 있는 이들 역시 동조하는 웃음을 흘린다. 그들은 모두 사천땅에 터전을 잡은 사파세력의 주인들이었다. 당가가 자리 잡고 있는 성도(成都)를 제외하면 사천 전역은 그야말로 사도천하였다. 그들의 세상이라는 의미다.
처음에는 당가를 내버려두라는 흑사련주 유길준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 역시 세력을 확장하고 작지 않은 방파를 이끌기 시작하면서 당가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절감하고 있었다.
규모가 작을 땐 앞뒤 잴 것 없이 민초들을 착취하기만 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고혈도 적당히 빨아 먹어야 오래 지속됨을 깨달은 것이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민초들은 그들과 달리 너무나 쉽게 스러지는 존재였다. 일을 하다 다치거나, 잘 먹지 못해서, 태생적으로 병약해서....
민초가 없으면 지금 그들이 누리는 호사도 없다.
덩치를 키운 사파세력들은 점차 멸문한 옛 정파들이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살인이나 도둑질을 일삼는 범죄자들을 잡아 죽이고, 흉년이 들 땐 부유한 이들을 겁박해 구휼을 강제했다. 알량한 힘을 믿고 민초들을 지나치게 털어먹는 방파가 있다면 공격해서 깡그리 죽여 버리기도 했다.
사파인 그들은 정파처럼 명분에 얽매이지도, 손속에 자비를 두지도 않았다. 치안이 바로잡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거부들은 흉년의 조짐이 보이면 알아서 척척 구휼미를 풀어대곤 했다.
이렇게 되자 몇몇 양민들은 정파들이 득세할 때보다 지금이 더 살기 좋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흑사련주 유길준을 떠받드는 양민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한편.
당가는 무가였지만 특성상 웬만한 의원보다 나은 의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가문의 구성원 대다수가 얕게나마 의술에 조예가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민초들에게 의술을 크게 베풀지는 않았지만, 마광천과의 일전 후 가세가 기울고 사천의 재물이 흑사련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적극적으로 의원 일을 하면서 금전을 모으게 된 것이다.
그렇게 당가는 민초들의 삶을 지탱하는 한 기둥이 되었다.
흑사련은 몰라도 그 휘하 사파세력들의 입장에서는 당가가 딱 지금 정도의 위치에만 머물러주면 충분했다.
소가주 경합이니 뭐니 하면서 가문의 뛰어난 아이들을 모아 수련시키고, 또 그중에 가장 뛰어난 아이를 소가주로 삼아 가문의 부흥을 꾀하는 것은 그들에게 썩 달갑지 않은 일인 것이다.
그래서 태을묵검파 장문 막인후가 지금 ‘불상사’를 입에 담고 있는 것이다. 당가의 부흥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리고자.
“그래서. 결행은 언제 하는 것이 좋겠소?”
목내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른 사내가 묻는다. 초붕문주 엽인제였다. 성대에서 나오는 목소리도 억지로 쥐어짜내는 것처럼 말라비틀어진 느낌이었다.
“급하게 처리할 문제는 아니오.”
막인후가 말했다.
“여러 장문, 문주들께서도 생각해보시오. 지금 마차를 추적해 당가가 키우려는 싹들을 뽑아버리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오. 하지만 그래서는 당가에 진정으로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소?”
“하면 장문의 말씀은?”
“당가의 소가주 경합은 총 사 년간 진행된다고 하오. 모르긴 몰라도 그동안 소모되는 물자가 엄청나겠지. 경합을 준비하는 데도 적잖은 재물을 썼으리라 생각되는데, 만약 그렇게 재물을 쏟아가며 심혈을 기울여 키운 아이들이 경합 막바지에 모조리 죽는다면?”
“그야말로 회생불가의 타격을 입겠군요. 제갈가나 저기 요동의 모용가처럼.”
“그럴 것이오. 아마 재기를 위해 수십 년은 성도에서 의원 노릇을 해야 할 터.”
“과연. 태을묵검파 장문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겠소. 일단은 마차가 향하는 곳을 추적만 해두고, 사 년 뒤에 일을 벌이는 것으로 합시다.”
“추적은 이미 명해두었소. 뿐만 아니라 작은 씨앗도 하나 심어두었으니.... 어쩌면 당가가 통째로 우리의 수중에 떨어질 지도 모르지.”
“역시 막 장문이오!”
“그럼 다들 당가의 마차에는 굳이 손대지 않는 것으로 하고, 이만 파합시다. 다음 회합 때는 술이라도 한 잔 할 수 있는 자릴 만들어 보겠소.”
막인후의 말을 끝으로, 원탁 앞에 둘러앉았던 이들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을 한 채 하나둘씩 흩어졌다.
사천은 앞으로도 그들의 세상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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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은 순조로웠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조는 일곱이었지만 마차는 스무 대였다. 여러 쌍으로 갈라져 나온 마차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한 모양이었다. 가문을 나선 지 몇 시진 지나지 않아 도착한 어느 공터에서는 마차가 세 대뿐이었다. 그들이 타고 온 것을 포함해서.
“이쪽 마차로 갈아타라.”
마부 역할을 한 암왕대원의 말에 당연명을 비롯한 칠 조 전원은 그가 가리킨 마차로 옮겨탔다. 마차는 비어 있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한 건가.’
칠 조가 타고 왔던 마차는 소년소녀들이 내리자마자 그대로 서쪽으로 내달렸고, 비어 있는 다른 마차 하나는 동쪽으로 출발했다. 당연명이 탄 마차는 북쪽으로 가닥을 잡는 듯했다.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처럼, 마차가 들르는 마을마다 마부 역할을 하는 이가 교체되었다. 지친 말들 역시 새로운 놈들로 바뀌었다.
쌩쌩한 마부와 말들은 마차를 밤낮으로 거의 쉬지 않고 몰았다. 칠 조 소년소녀들은 몇날 며칠을 꼼짝없이 마차 안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해야 했으며, 하루에 단 세 차례 잠시 마차가 설 때마다 빠르게 요의를 해결해야 했으니 불평불만이 나올 법도 했지만 소년소녀들은 조용했다.
가문이 위치해 있던 성도를 벗어났음을 아는 까닭이다. 사천은 지금 사도천하였다. 사천땅에서 정파라 불릴 만한 방파들은 모조리 몰락하거나 멸문했다. 온 천지 사방이 사파의 세력권이다. 사천에서 거의 유일한 정파랄 수 있는 당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아직 어린 소년소녀들이지만 경합에 참가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들이었으니 사리분별은 할 줄 알았다. 불필요한 마찰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것이다.
다행히도 불미스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천을 거의 벗어나기 직전에서야 웬 도적들이 마차를 노리고 급습하려 했지만, 말을 몰던 암왕대원이 독이 발린 우모침(牛毛針) 몇 개를 쏘아내자 그대로 쓰러져 죽었다. 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달리는 속도를 유지했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이동한다.”
“예.”
암왕대원의 말에 칠 조 소년소녀들은 마차에서 내렸다. 맑은 공기가 폐로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산세가 눈에 박힌다.
“공동산이다.”
무심하게 한 마디를 툭 던지고는 앞장서는 암왕대원.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소년소녀들의 눈이 반짝였다. 공동산. 당유리의 추측이 맞았다. 당유리는 그것 보라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한편 당연명은 맨 뒤에서 따라가며 생각했다.
‘꼬리가 붙었었군.’
마차에 있을 때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지만 두 발로 땅을 딛자마자 기감을 확장하니 걸려드는 인기척이 있었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양민일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당가에서 딸려 보낸 호위일 것 같지도 않았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들을 추적해 온 자들이라 보는 것이 마땅했다. 밤낮없이 달려왔는데도 이렇게 따라잡힌 것을 보면 상대는 평상시에도 당가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지켜보기만 할 셈인가.’
점차 추적자들과의 거리가 멀어진다. 더 다가오지는 않을 듯했다. 공동산이 목적지임을 확인했으니 돌아가는 것일까. 아직 내공이 그리 많지 않은 탓에 기감의 범위가 넓지 않았다. 곧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얘. 왜 자꾸 뒤처지니? 힘들어 보이지는 않는데.”
“...생각을 좀 하느라.”
“얼른 와. 거의 다 온 것 같아.”
창백한 안색의 소녀 당미려가 소년을 재촉했다. 약간의 찜찜함이 남았지만 당연명은 고개를 끄덕이곤 발길을 옮겼다. 좀 더 빨리 힘을 갖추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암왕대원은 무슨 표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수풀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갈림길을 몇 차례나 지나쳤을까.
거짓말같이 시야가 트이면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칠 조가 왔군.”
“다행이야. 모든 조가 무탈하게 도착하다니.”
“마차를 바꾸고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렸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꼬리가 붙지도 않았을 걸세.”
그들은 먼저 도착한 경합 참가자들과 암왕대, 독왕대 무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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