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소가주 경합(7)>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절벽 앞이었다.
‘진법이군.’
당연명은 절벽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렸다. 진법에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생에도 수련을 위해 사부가 설치해둔 것을 몇 차례인가 겪은 적이 있었다. 진법의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했는데 대개 감각을 혼란케 하는 것이 많았다. 대체로는 허상에 불과했지만, 사부가 말하길 정말로 경지에 이른 진법가들은 삼라만상을 구성하는 기운을 인위적으로 뒤틀어 원하는 현상을 실제로 구현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가 겪은 것도 그랬고.
특히나 이렇게 대놓고 이질적인 기운을 풍기고 있는데, 진법의 존재를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당연명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였고, 다른 이들이 느끼기에는 극히 미약한 차이밖에 없었다. 암왕대와 독왕대 무사들 중에서도 몇몇만이 차이를 느낄 정도.
“조금만 기다려라. 곧 쉴 수 있을 거다.”
암왕대원으로 보이는 무사 한 명이 말했다. 그 말에 경합에 참가한 소년소녀들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쉰다는 말인가?
마지막으로 칠 조까지 왔는데도 더 이동하지는 않을 것 같은 기색이다. 그렇다면 여기가 목적지라는 말인데, 사방을 둘러봐도 딱히 쉴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한쪽은 아예 높다란 절벽으로 막혀 있었고. 더군다나 노을마저 짙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네 말이 맞나 봐. 정말로 진법이 있나 본데.”
칠 조 소년 당이전이 속닥였다. 당유리가 했던 말을 떠올린 것이다. 그녀는 제갈가에도 일정 자금이 흘러 들어갔으니 어쩌면 진법이 설치돼 있을 지도 모른다고 추측한 바가 있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아닐 수도 있어.”
당유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로서도 확신이 서지 않는지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감쪽같은데, 정말로 진법이 있을까.
“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연명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여전히 창백한 안색의 당미려가 당유리에게 살짝 핀잔을 주고는 소년에게 물었다. 이동하는 동안 당연명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칠 조 소년소녀들은 그를 의지하게 됐다. 당연명에게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와 대범함이 묻어 나왔던 까닭이다. 마치 어른처럼.
“곧 열릴 거다.”
“뭐?”
단정적으로 말하는 당연명에 칠 조 소년소녀들이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열린다니, 진법이 있다는 말인가? 그걸 어떻게 감지한 거지? 곧 열릴 거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그러나 당연명에게 구체적으로 물어볼 틈도 없이 눈앞의 풍경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아아아아아⎯
변화가 일어난 것은 절벽이 있던 쪽이었다. 절벽의 형상이 난데없이 이지러지기 시작하더니, 동일한 색상의 물안개로 화한 것이다. 그 광경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던 모양인지 소년소녀들이 저마다 눈을 비비거나 볼을 꼬집곤 했다.
‘안에서만 작동시킬 수 있나 보군.’
당연명은 짐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 개의 조가 모두 도착하고서도 하릴없이 기다리기만 했을 리가 없다. 경합 참가자들의 안전을 생각하면 괜찮은 방법이긴 했다. 물론 일정 경지 이상의 강자에게는 통하지 않을 방법이었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물안개의 건너편으로 일곱 인영이 드러났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일 조는 암호를 대시오.”
“척마멸사(斥魔滅邪).”
“확인했소. 일 조는 들어오시오.”
일 조를 이끌고 온 것으로 보이는 독왕대 무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쪽 편의 안개가 걷혔다. 그 안에는 웬 서생 차림의 사내가 서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본 독왕대 무사가 고개를 끄덕이곤 일 조 소년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저자를 따라가라.”
“알겠습니다.”
일 조 소년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조심스럽게 안개 사이를 건너 서생 차림 사내에게 다가갔다. 소년들이 모두 건너온 것을 확인한 사내는 뭐라 중얼거리며 뒤돌았는데, 걷혔던 안개가 다시금 자리를 채웠다. 곧 안개너머 일 조의 인영들이 희끄무레해지더니 사라졌다.
남은 것은 여섯 인영.
“이 조는 암호를 대시오.”
“삼 조는 암호를....”
“사 조는....”.......
일 조와 같은 방식.
그렇게 한 조씩 암호를 대고 걷힌 안개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꽤나 머리를 썼군.’
당연명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생각했다. 펼쳐진 진법은 단순히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진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는데, 각각의 진법을 안개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이 하나씩 담당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 진법이 무너진다거나 하는 변수가 생기더라도 몇몇 조는 빠져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각 조마다 분리된 별개의 수련 공간이 주어지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인영이 말했다.
“칠 조는 암호를 대시오.”
“암독지왕(暗毒之王).”
“확인했소. 칠 조는 들어오시길.”
역시 같은 방식으로 안개가 걷힌다. 모습을 보인 것은 섭선을 들고 있는 중년의 사내.
“건승해라.”
칠 조를 이곳까지 데려온 암왕대원이 덕담을 던졌다. 당연명은 담담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당이전, 당유리, 당미려는 손을 모아 인사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가시죠.”
섭선을 든 사내가 앞장서며 뭐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곧 당연명을 비롯한 칠 조 인원들의 뒤를 다시금 안개가 메꾸더니 순간적으로 암흑이 찾아왔다.
당연명은 완전히 진법 안에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느낌.
“궁금한 게 많을 겁니다.”
암흑 속에서, 앞장서서 걷고 있는 사내만이 뚜렷했다.
“제 뒤만 잘 따라오시면 됩니다. 당가의 영식들이여. 본인은 경합 칠 조를 담당하게 된 제갈창신이라 합니다.”
“제갈세가...!”
당이전이 살짝 놀란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당유리의 추측이 맞았다. 제갈가의 진법이 설치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직 세가라 불러주다니. 고맙군요. 일단은 제갈가의 사람인 제가 왜 당가의 소가주 경합에 간여하게 되었는지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본가는 귀가와 달리 재물을 모으기가 여의치 않습니다. 당장 영역을 지키는 것만도 버거운 상황이죠.”
제갈창신의 말대로 제갈가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마광천과의 일전 이후, 핵심 고수들이 모조리 죽어버린 탓에 제갈가 역시 쇠락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특히 가문의 부흥을 위해 가산을 털어가면서까지 영약을 구입하고 후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이미 핵심요결이 실전된 까닭에 판세를 뒤집을 만한 고수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제갈가의 무학은 대체로 진법과 관련이 있었는데, 관련 심득이 담겼다고 할 만한 자료들 역시 마광천 고수들에 의해 불타거나 도둑맞은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만만해진 제갈가를 건드는 사도와 마도의 문파들이 하나둘씩 늘어갔고 제갈가는 터전인 호북 융중산 인근의 양양(襄陽)을 지키는 것만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본가는 귀 가문으로부터 수년에 걸쳐 적잖은 금전을 지원받았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만약 그게 없었다면 본가는 진즉에 무너졌을 겁니다.”
제갈창신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혈족들로 이루어진 가문이라 해도 무가를 유지하는 데는 엄청난 재물이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한 사람이 온종일 무공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의 생계를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였으므로. 제갈가의 기반이 하루하루 살라먹히는 와중에 당가의 지원은 가뭄의 단비 같았으리라.
“그래서 이번 귀가의 행사에, 보답의 의미로 본가는 저를 포함한 일곱을 지원하게 됐습니다. 가문의 절진인 칠쇄환궁진(七鎖幻穹陣)을 동원해 여러분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또 외인으로서 공정하게 평가를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진법을 이용한 수련도 도울 것입니다.”
제갈창신의 얘기를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완전히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웬 아담한 장원이 눈앞에 생겨난 것이다. 당연명을 제외한 칠 조 소년소녀들은 순간 환영인가 생각했지만 가까이 다가설수록 장원의 존재감이 워낙 사실적이라 결국 실존하는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짐작하시겠지만 일곱 개의 조는 각각 같은 조건, 다른 공간에서 수련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조마다 별개의 수련 공간이 주어지는 이유는, 서로의 성취를 확인할 수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재밌군.’
당연명은 단번에 그 의도를 간파했다. 삼 년간의 수련 기간. 그동안 다른 조의 성취를 확인할 수 없으니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실제로 성취가 가장 뛰어난 조도, 가장 떨어지는 조도 삼 년이라는 기간 동안은 부단히 수련할 수밖에 없으리라.
“고단했을 텐데 우선은 푹 쉬시지요. 자세한 것은 다른 분들이 설명해주실 겁니다.”
그 말과 동시에 장원에서 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흑의를 입은 열 명의 무인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제갈창신에게 가볍게 포권을 해 보였다. 나름대로 존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수고하셨소. 제갈 무인.”
“아닙니다. 그냥 산보 삼아 걸어갔다 온 것뿐인걸요. 그나저나 당가의 미래가 기대됩니다. 일곱 조 스물여덟 명의 인원들이 모두 비범하더군요. 창창한 후기지수들이 이토록 많다니 본가로서는 부러운 일입니다.”
“...과찬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는지 포권을 한 사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제갈창신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이고는 가볍게 부채질을 하며 어디론가 사라졌고, 사내가 칠 조를 바라보며 말했다.
“따라와라. 쉴 곳을 안내해주마.”
당연명을 비롯한 당이전, 당유리, 당미려는 그의 뒤를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흑의 사내들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대고 있었는데, 당연명이 느끼기에 하나하나가 독왕대주 당지혁에 비견되는 실력자인 것 같았다. 물론 당가 무인의 실력은 단순 기세만으로 측정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칠 조 인원들은 각각 방 하나씩을 배정받았다. 제법 크고 안락했다. 예비 소가주 신분이기에 그만한 대접을 해주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소년소녀들에게 안내해준 사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하루만큼은 제대로 쉬어두는 것이 좋을 거다. 내일부터는 다른 곳에서 묵어야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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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지났다.
묘시(05~07시)에 기상한 칠 조 소년소녀들은 제공된 식사를 마치자마자 한곳에 집합해야 했다.
“푹 쉬었는지 모르겠군.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본가 소가주 경합이 시작되는 거라 생각하면 된다.”
흑의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칠 조 소년소녀들을 바라봤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소년 하나만 표정에 여유가 묻어났다. 가문을 벗어나 생소한 환경에 던져진 것은 처음일 텐데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두고 보면 알겠지. 여유를 보일만한 실력이 있는지.’
사내는 이내 당연명에게서 눈을 떼고는 말을 이었다.
“우선 너희들의 호칭부터 정하도록 하지.”
“...호칭이라니요?”
당이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버젓이 이름이 있는데 굳이?
“공정함을 기하기 위해서다. 너희들 중에는 분명 가문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자의 혈육도 있을 거고, 연줄이라곤 하나 없는 녀석도 있을 거다. 게다가 우리 역시 당가의 인물. 관계를 따지다보면 너희와도 어떤 연결고리가 있겠지. 그걸 배제하기 위함이다.”
납득할 수 없는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삼장로 당석형의 외손녀인 당영령이나 당문찬, 당정일 같은 녀석들이 이번 소가주 경합에 참가해 있었으니까. 장로들끼리의 신경전 때문인지는 몰라도 경합의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여기저기서 엿보였다. 당연명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너는 25호, 너는 26호, 너는 27호, 너는.... 28호다.”
사내는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번호를 매겼다. 당유리와 당미려가 각각 25, 26호였고 당이전이 27호, 마지막으로 당연명이 28호가 되었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누군지를 알아야겠지.”
흑의 사내의 말에 도열해 있던 다른 사내들이 성큼 한 걸음 다가왔다. 당이전, 당유리, 당미려가 눈을 반짝였다. 진즉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워낙 삼엄한 분위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당연명이야 그들의 기질로 같은 당가의 사람임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다른 칠 조 인원들은 흑의 사내들을 그런 식으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가문의 사람들이라기엔 맹세코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만 있기도 했고.
잠깐의 정적이 멎은 후에, 흑의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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