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14화 (14/134)

14화<소가주 경합(8)>

난데없이 스스로를 죄인이라 칭하는 흑의인들.

생각지 못한 말에 다들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당연명이 말했다.

“무슨 죄를 지었죠?”

“...지키지 못했다.”

무엇을, 이라고 더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흑의 사내가 천천히 얘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소가주의 직속 무력대, 봉위대(鳳衛隊)였다.”

“봉위대...!”

당미려가 깜짝 놀라며 당연명을 곁눈질했다. 그러나 당연명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모친이 그 독봉인데도 모르는 건가.’

모를 수밖에 없었다. 소년의 기억에 봉위대에 대한 것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당시의 이야기는 알게 모르게 가솔들 사이에서도 자세히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 되어 있었다. 당가가 결정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한 때의 일이었으므로. 그저 소가주였던 독봉이 원인이 되어 마광천과의 일전이 벌어졌다고만 회자될 뿐이었다.

아직 어린 소년소녀들이 봉위대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니 봉위대의 존재조차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당미려 역시 우연찮은 기회에 그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을 뿐.

봉위대는 원래 암왕대, 독왕대와 함께 가주전인 암독전 소속의 무력대였다. 특히 봉위대는 소수정예로 사내의 말마따나 소가주의 직속 무력대였는데, 그 말인즉슨 이전 소가주였던 독봉 당지혜의 개인 무력대였다는 뜻이다.

가주가 죽고, 장로원에서 나서서 권력을 잡으면서 당지혜는 소가주의 자리에서 폐해졌는데 이때 책임을 통감한 봉위대 역시 가문 내에서 사라졌었다. 그런데 사라졌던 봉위대가 소가주 경합에서 모습을 드러내다니...?

“소가주셨던 독봉께서는 그렇지 않아도 약화되어 가는 가문에 분란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소가주 직위를 내려놓으신 뒤, 순순히 우리 봉위대 역시 해산토록 하셨지. 다음 대를 부탁한다면서.”

그 후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독봉의 명에 따라 해산한 봉위대 무사들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채 각자의 실력을 닦는 데 주력했다. 마광천과의 일전을 목도했고, 또 지켜야 할 소가주로부터 해산을 명받았다. 힘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그들의 뇌리를 온통 지배했다.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으로 절차탁마한 그들은 금세 가문 내에서도 수준급에 이르는 실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장로원에서는 여러 차례 그들을 포섭하려 했지만 누구도 응하지 않았다.

전 봉위대 무사들이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은 채 그렇듯 무력이 높아지자 약간의 위기감을 느낀 장로원에서는 그들에게 한 가지 제의를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소가주 경합에서의 교관 역할을 맡는 것이었다.

예비 소가주인 경합 참가자들을 그들이 직접 가르친다⎯ 그 성장과 성취를 곁에서 직접 지켜보며 자연스레 최종적으로 소가주가 되는 이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유도하고, 또한 탈락한 경합 참가자들 또한 질적인 성장을 이룰 테니 가문에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덤으로 경합 기간 동안 장로원의 권력은 흔들리지 않을 테고 말이다.

봉위대 무사들 역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음 대를 부탁한다는 독봉의 말에 부응하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게다가 장로원에서 따로 얘기를 꺼낸 것도 아닌데 그들은 새로이 선출되는 소가주의 직속 무력대가 되겠다는 약조도 했다. 뛰어난 인재들이 경합에 지원하길 바란 까닭이다. 설령 장로들의 직계 혈족이라 해도 가능성만 보인다면 충성을 바칠 셈으로.

그렇게 봉위대 무사들은 이곳 공동산에서 수년을 지내며 경합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간 수련을 하며 더더욱 강해진 그들은 칠십여 명에 이르는 인원들 하나하나가 거의 독왕대주 당지혁에 필적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다시 그들을 한데 뭉치는 무력대가 만들어진다면 명실상부 당가 최강의 전력이 될 공산이 컸다.

경합에 승리하여 소가주가 되기만 한다면 그런 무력대를 직속으로 아래에 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장로들뿐 아니라 가문의 요직에 자리한 이들이 어떻게든 제 직계 혈족이나 제자를 이번 경합에 참가시키려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허울뿐인 소가주가 아니었다. 단번에 가문의 핵심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어쩌면....’

당미려는 생각했다. 소가주 경합에서 신분이 드러나면 가장 유리한 것은 당연명일 지도 모르겠다고. 봉위대 무사들에게는 전 주군의 아들이니만큼 당연명의 정체를 알게 되면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당연명은 처음과 표정이 똑같았다. 봉위대의 사연을 알았지만 굳이 모친이 독봉 당지혜라는 것을 밝힌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정당하게 승부를 겨룬다거나 하는 것보다는 애초에 봉위대를 직속 무력대로 부린다거나 하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생각보다 일이 귀찮아질 것 같은데.’

그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다. 당연명이 원했던 것은 가문 내에서 더 이상 무시 받지 않을, 확실한 신분뿐이었다. 그걸 얻을 가장 좋은 방법이 소가주 경합이라 판단했던 것이고, 또 면책 특권을 이용해 겸사겸사 강해질 시간을 벌고자 했던 것인데 어째 일이 점점 커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검신의 영역에 닿았던 소년은 권력욕이나 명예욕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평범한 삶을 바랄 뿐.

하지만 소가주가 되면 바로 명분과 권력, 무력을 한손에 틀어쥐게 될 터였다.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장로원과의 마찰도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나 그렇다고 해서 소가주 경합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소가주가 되어야만 했다. 아직 얼굴은 본 적 없지만 장로원의 실세라는 삼장로 당석형과도 당영령의 일로 이미 악연을 맺고 말았으니.

‘달라질 건 없어. 계획대로 간다.’

조금 귀찮아질지언정 그게 상책이다. 당연명은 상념을 떨쳐냈다. 경합에 얽힌 의미가 자꾸 커져가는 듯했지만 사실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평범한 삶을 지켜낼 수 있는, 그런 힘을 확보하는 것. 목표한 만큼 강해지고 나면 소가주라는 자리는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그러니 굳이 어쭙잖은 수를 쓸 생각 따윈 조금도 없는 당연명이었다.

“...알다시피 경합 기간의 첫 일 년간은 뭘 하건 신경 쓰지 않는다. 각자 익히고 있는 무공을 가다듬어도 좋고, 가르침을 청해도 좋다. 새로운 무공을 익히고 싶을 경우에는 우리 봉위대의 무공을 알려주마. 근본적으로 소가주가 익히는 무공과 봉위대의 무공 간에는 큰 차이가 없다.”

흑의 사내의 말에 당연명을 제외한 소년소녀들이 눈을 반짝였다. 원하기만 하면 봉위대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니! 심지어 그 무공이 소가주가 익히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이건 예상외였다. 몹시 파격적인 혜택으로 다가올 수밖에.

“소가주가 되면 가주로부터 봉위대 무공의 핵심요결과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을 몇 가지 구전으로 전수받게 된다. 이를테면....”

“...만천화우(滿天花雨).”

“그래. 만천화우 역시 그중 하나지.”

당유리가 중얼거리는 말에 흑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만천화우는 당가 암기술의 정점으로 알려진 상승무학이었다. 사천당가⎯라고 하면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만천화우를 떠올리던 때도 있었으니까. 그만큼 인상적이고 강력한 무공이었다. 제각각의 궤도로 휘몰아치는 암기의 폭풍우를 막아낼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만천화우를 익히는 것은 아주 난해해서, 당가의 가주들도 구전으로만 요결의 전수를 거듭할 뿐 실제로 익혀내는 경우는 몇 대에 걸쳐 한둘뿐이었다. 마광천과의 일전에서 귀천한 전대 가주 역시 만천화우를 익히지는 못했는데, 만약 그가 만천화우를 구사할 수 있었다면 가문의 피해가 현격히 줄어들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 담긴 얘기가 가솔들 사이에서 오가기도 했더랬다.

‘어검술(馭劍術)의 응용인가?’

당연명은 만천화우가 어떠한 묘리로 발동되는 것인지 잠시 유추해보았다. 그저 비산하는 기파에 암기를 싣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당가 암기 무학의 최정점인데 그런 단순한 기예로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짐작 가는 것은 역시 어검술을 응용하는 것이었는데, 아직은 어검술을 펼칠 만한 내공이 바탕이 되지 않아 시험해 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겠는데.’

산(散)과 파(破)의 묘리를 잘 섞어 기파에 실으면, 가벼운 암기 정도는 뜻대로 다룰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경우에는 제대로 경력을 실을 수 없었다. 겉보기만 그럴듯하지, 실제 위력은 별 볼일 없을 듯했다.

‘그래도 잘하면 써먹을 수 있긴 하겠어.’

암기 자체의 위력보다는 막지 못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다양한 방위에서 일순간에 쏟아지는 암기를 모조리 쳐내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극독을 바른 암기를 이용하면 대량 살상에 적합한 기예가 될 수도 있지 않나?

보통의 검객이라면 사파나 하류 잡배가 아닌 다음에야 독에 의존하려는 발상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기겠지만, 당연명은 이미 소년의 기억을 받아들인 뒤 스스로를 당가의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독이나 암기에 대한 거부감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 있었지.

아무튼 당연명이 그렇게 만천화우에 대한 상념을 적당히 뇌리 한편에 넣어 둘 때, 당이전이 흑의 사내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만천화우를 포함한 가주만의 무공은 전부 실전된 게 아닌가요? 이미 전대 가주께서는....”

“좋은 질문이다. 27호. 하지만 다행히도 완전히 실전된 것은 아니다. 본래 가주에게 어떤 불상사가 생길 때를 대비해서 각 장로들이 가주로부터 불완전하게나마 요결을 전수받는 까닭이다. 장로들이 각자 알고 있는 것을 합친다면 완성된 요결을 얻을 수 있을 거다. 이번 경합의 승자에게 온전한 요결을 전수하기로 장로들 간에 이미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독봉께서도 알고 계실 거고. 그렇게 중얼거린 흑의 사내가 박수를 치듯 두 손을 짝 하고 부딪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잡설은 여기까지다! 이제 너희들은 각자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면 된다. 다만 수련할 곳은 이 장원이 아니다.”

“?”

분명히 장원에 연무장이 딸려 있는 것을 보았기에, 소년소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어디서 수련을 한단 말인가?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음성과 함께 홀연히 나타난 것은 제갈창신이었다.

“그럼, 부탁하오. 제갈 무인.”

“매번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땅히 제가 할일인 것을요.”

흑의인들, 봉위대 무인들과 칠 조 소년소녀들은 제갈창신의 뒤를 따랐다. 제갈창신은 한가롭게 섭선을 부치면서 걸음을 옮겼는데, 놀랍게도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주변 풍경이 변하는 것이 아닌가?

백여 보를 이동한 제갈창신이 걸음을 멈추자 거짓말처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벽의 윗부분에는 동혈(洞穴)이 네 개 있었는데 거의 삼 장(대략 10m) 정도의 높이였다.

“뭐야...?”

문득 뒤를 돌아다본 당이전이 말했다.

“장원이 사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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