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낭중지추>
당연명은 제갈창신 및 봉위대 무사들과 함께 장원으로 돌아왔다. 안락하고 쾌적한 잠자리와 매 끼니 풍족한 식사가 제공되는 곳.
‘귀찮아질 뻔했어.’
당연명은 보았다. 봉위대 무사들은 장원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남은 칠 조에게 그저 비수 몇 자루를 던져주었을 뿐이었다. 다른 건 없었다. 무공에 대한 것은 보름이 지난 후에나 요청할 수 있다고 했다. 그동안은 오로지 자력으로 생존하라고.
절벽과 동혈.
남은 칠 조가 어떤 생활을 하게 될 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알아서 식량을 구해야 할 거고, 또 적당한 시련이 주어지겠지.
그러한 고난은 분명 칠 조를 비롯한 경합 참가자들을 빠르게 강해지도록 만들겠지만, 당연명에게는 하등 필요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지금 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양질의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 넉넉한 시간뿐이었으니.
“그럼, 저는 ‘식사’를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번거로우실 텐데, 매번 고맙소. 제갈 무인.”
“아닙니다. 이미 다 잡아놓은 놈들을 이동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을요.”
제갈창신과 당원진은 얼핏 알 수 없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식사? 숙수가 할 일 아닌가. 제갈가에서 진법 운용을 위해 파견해준 일곱은 귀한 몸이었다.
“언제든 인력이 필요하다면 말씀하시오. 어차피 이제... 28호 이 녀석 때문에라도 종종 사냥을 나가야 할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부탁드리지요.”
제갈창신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섭선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28호라 불리는 소년은 그제야 상황을 짐작했다.
‘진법 안에 맹수라도 풀어둘 모양이군.’
뻔한 수련법이었다. 척박한 곳에 던져두고 이런저런 짐승을 풀어두어 생존을 강요하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경합 참가자들은 맹수와 부딪칠 수밖에 없으리라.
역시 일이 이렇게 풀려 다행이라 여기면서, 소년이 입을 열었다.
“그럼, 바로 착(着)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바로?”
“외인이라 할 만한 이도 없으니까요.”
제갈창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소년의 입장에서는 제갈창신이 착(着)의 묘리에 대해 들어도 큰 상관이 없었지만, 당원진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학에 대한 가르침은 원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갈창신이 나중에 알게 되어도 아쉬워할 뿐 탓하지는 않으리라.
“또, 제가 질질 끄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터라.”
당연명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해치워야 할 일이라면 미뤄둘 이유가 없지 않나.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성격 한 번 시원하구나. 알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당원진은 장원에 도착하고서 잠시 흩어졌던 봉위대 무사들을 모조리 다시 불러 모았다. 28호 소년이 보여준 한 수는 분명 예사롭지 않았다. 봉위대의 모두가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됐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조를 담당하는 봉위대원들도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일이 너무 커진다. 칠 조 선에서 끝내는 게 나았다.
잠시 후.
자연스레 연무장으로 이동한 봉위대 무사들은 당연명을 마주보고서 주르륵 늘어섰는데, 마치 소년이 교관이 된 것처럼 느껴져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완전히 입장이 역전된 꼴이었다.
당연명은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설명을 시작했다.
“착(着)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혹시 비도나 수리검을 가지고 계신 분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봉위대 무인들이 비도나 단검 따위를 척척 꺼내 들었다. 당연명은 그중 하나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천천히 저를 공격해보시죠. 던지지는 마시고. 검을 휘두르듯이 말입니다.”
“알겠다.”
당연명의 말에 눈짓을 받은 봉위대 무사가 곧장 걸어 나와 정말 검을 휘두르듯이 비도를 그어 왔다.
‘처참하군.’
소년은 그가 검술에 그다지 조예가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다가오는 비도에 자신의 수리검을 가져다댔다. 어차피 착(着)만 가르쳐줄 생각이었으니 검술 수준은 아무래도 좋았다.
“계속하세요. 멈추지 말고.”
비도와 수리검이 닿자, 봉위대 무사가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알았다.”
봉위대 무사는 나직이 답하고는 다시 비도를 쥔 손에 힘을 줘서 당연명을 노렸다. 비도는 소년의 수리검을 밀어내면서 전진했다.
그러다 봉위대 무사는 어느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원래 의도한 투로에서 비도가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미세한 차이였지만 끝까지 휘두르면 원래 목표했던 부위에서 크게 벗어나게 될 터였다.
‘무언가 수를 썼군.’
그렇게 생각하며 봉위대 무사는 다시 비도를 원래 의도했던 방향으로 돌려놓기 위해 조금 더 힘을 썼다.
그 순간이었다.
“?!”
봉위대 무사는 순식간에 균형을 잃었고, 그가 휘두르던 비도는 완전히 소년을 빗나가 있었으며, 소년의 수리검이 그의 턱밑을 겨냥하고 있었다. 얼빠진 표정의 봉위대 무사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닫지 못한 듯했다.
당원진과 다른 봉위대 무사들은 살짝 놀란 눈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방금 나선 이는 봉위대 내에서도 그리 실력이 떨어지는 이가 아니었다. 아무리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다 해도 고작 열 살 조금 넘은 아이에게 제압당하다시피 하다니?
당연명은 수리검을 회수하고는 우쭐한 기색 하나 없이 말했다.
“이게 착(着)의 기본입니다. 상대의 힘을 정면으로 막거나 쳐내지 않고,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면서 기회를 노리는 거죠.”
“단순히 흘려내는 것과 다른가?”
“접촉한 것을 유지해야 합니다. 상대가 다가온다면 이쪽은 물러나고, 상대가 물러난다면 이쪽은 다가가는 식으로 말이죠. 요컨대 일합(一合)이 끝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 상대는 더 큰 힘을 쓰게 될 텐데, 그때 허점이 드러나게 됩니다.”
“.......”
소년의 설명을 들은 당원진은 무언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상대의 검력을 이용한다는 무리가 어째 상승 검도의 그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검술에 재능이 있는 것일지도. 아니면 사 장로와 관련이 있는 걸까.’
물론 독과 암기로 유명한 가문이긴 했지만, 당가에도 검객은 존재했다.
사 장로 당지룡.
사천의 유명한 검파의 후예였던 그는, 당가의 여인과 혼인하여 당씨 성을 쓰게 되었는데 검술 하나만으로 장로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대단한 실력의 검객이었다.
하나 경합 참가자의 신분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는 것이 원칙이었기에, 당원진은 짐작을 짐작으로만 남겨두었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일이었다.
28호 소년이 계속 말했다.
“기본은 그렇고. 진기를 이용하면 조금 더 쉽게 착(着)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닿는 것들을 옭아맨다는 느낌으로요. 그게 극에 달하면 아까 제가 보인 것처럼 암기들을 한데 모으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뭐...?”
당원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눈앞의 소년은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그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일까?
‘닿는 것들을 옭아맨다는 느낌이라고?’
그건 일종의 의념이었다.
내공, 진기에 의념을 싣는 것은 그야말로 극상승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일 아니던가?
극상승의 경지, 달리 화경(化境)이라 불리는 경지의 초입에 들어서면, 비로소 기(氣)에 의념을 실을 수 있다고 했다. 의념을 실은 기는 강기(罡氣)라 칭해지며 같은 강기가 아니면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그야말로 인세를 벗어난 초인들의 전유물인 셈이다.
그런데 소년이 진기에 의념을 싣는 것을 아주 간단한 요령인 듯 말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봉위대 무사들 중 몇몇도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인지 경악한 표정이었다. 아마 그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이 녀석, 천재인가?’
당원진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착(着)에 대해서는 여전히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머리 한편에 밀어 두었다. 그보다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현 무림에서, 화경에 올랐다 말해지는 인물은 열을 넘지 않았다. 그 중의 둘이 흑사련주 유길준과 마광천주 연중혁이었다.
‘이대로 이십 년만 지나면, 아니 어쩌면 십오 년만 지나도.’
당원진은 그 누구보다 가문의 부흥을 바라는 입장이었다. 28호 소년이 지닌 엄청난 가능성이 사천당가의 홍복처럼 다가왔다.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당원진은 소년이 이미 화경에 이르렀을 거라는 가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어미의 뱃속에 있을 적부터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그가 알기로 화경이라는 것은 엄청난 깨달음들이 수반되어야 닿을 수 있는 지고한 경지였다. 천고의 기재라 해도 십 년 남짓한 세월로는 턱도 없었다. 그리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설령 소년이 정말 진기에 의념을 실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저 가능성에 불과하다 여겼다.
당원진은 얼른 표정을 담담하게 고치고자 했다. 소년의 재능은 분명 놀라웠지만, 마냥 추켜세울 생각은 없었다. 행여나 자만심에 빠질 수도 있었으니.
‘오늘부터 이 녀석은 본가의 보물이다. 암기건 독이건 검이건 중요치 않아. 분명 크게 될 녀석이다.’
당원진은 소년이 수련하는 동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최상의 편의를 봐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엄청나게 빛을 발하는 재능을 목도한 뒤였다. 공정하게 경합 참가자를 대해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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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군. 나쁘지 않아.’
당연명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배정된 방으로 돌아와 생각했다. 착(着)에 대한 짧은 강론을 마치자마자 당원진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말만 하대지 자신을 대하는 것이 아주 조심스러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짐작이 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전생에서도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자각하지 못했는데, 경악하는 봉위대 무사들의 얼굴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의념을 다루는 것⎯ 그건 상승 무학에 이르는 단초였다. 그걸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얘기했으니 아마 그들의 눈엔 당연명 자신이 천하에 다시없을 기재로 보이지 않았을까.
지나치게 무위를 드러내는 일은 삼가는 게 옳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썩 나쁘지 않았다. 일신의 무력을 어느 정도 쌓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었지만 팔다리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했다. 지금밖에 시기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일로 식사나 잠자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게 됐고, 또한 무공 선택이나 수련에 있어서도 제한을 받지 않게 됐다.
시간을 엄청나게 아낀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강해질 자신이 있었다.
‘일단은 안법과 신법부터 익히자. 그 다음엔 감각도다.’
당연명은 우선순위를 그렇게 정했다.
암기와 독, 그리고 다른 공격을 위한 무공은 미뤄뒀다. 만약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장 유용하게 쓰일 것이 바로 안법과 신법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제대로 보고, 접근만 할 수 있다면 상대가 누구건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공격수단은 수리검뿐이었지만, 웬만해서는 검신의 영역에 닿았던 소년의 검로를 피해내지 못할 터였다.
계획을 세운 소년은 곧장 당원진에게 말해 당가의 가전 안법과 신법의 비급을 여러 가지 받았다. 원본은 아니었다. 이번 경합을 위해 필사된 것들. 당연하게도 핵심 요결 따위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소년은 몇 차례에 걸쳐 비급들을 탐독했다. 익힐 만한 것들을 선별하는 과정이었다. 만약 성에 차는 것들이 없다면 전생에 익혔던 무공들로 대체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당연명이 고른 첫 번째 무공서는.....
시류안(視流眼)⎯ 당가의 오래된 가전 안법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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