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안법, 신법, 감각도>
안법(眼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회피 수단을 지니고 있더라도 결국 상대의 공격을 인지하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감각도를 통해 강화된 기감으로 사각을 없애고, 안법을 통해 강화된 시각으로 공격을 정확히 직시한다⎯ 극상승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에게는 살수나 자객을 보내는 것이 의미가 없는 이유였다.
그러한 고수를 죽이려면 완전한 방심을 유도해낼 정도로 신뢰를 사든가 혹은 정면으로 맞붙어 무공 그 자체의 위력으로 짓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시류안(視流眼)은 당가의 오래된 가전 안법이었지만 익힌 이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익히는 것이 워낙에 난해했던 데다가, 유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유실된 부분들이 있었다. 특히 진기를 도인하는 경로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지 않았기에, 시류안을 익힌 이들은 제대로 된 안법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도리어 무언가 뿌연 안개 같은 것이 시계를 방해하는 현상을 겪기 일쑤였다.
대부분의 당가 사람들은 계속해서 개변되고 진기 도인 경로가 온전한 투천안(透天眼) 같은 것을 익혔다. 혹시 모를 기대로 시류안을 익히던 이들도 결국 한계에 부딪쳐 다른 안법을 익히는 것이 현 실정이었다.
투천안은 분명히 훌륭한 안법이었다. 성취가 깊어지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아주 느리게 볼 수 있는 효용이 있었다. 암기 무학을 다루는 무가의 그것에 어울리긴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소년이 전생에 익히고 있던 안법만 못했다.
패정안(敗停眼), 소년이 전생에 패력진기를 바탕으로 익혔던 안법은 시각을 강화시켜줄 뿐만 아니라 그저 마음을 먹고 직시하는 것만으로 실제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상승의 무학이었다. 정도 이상의 경력이 실려 있지 않다면 휘둘러지는 검이나 날아오는 암기조차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멈춰 세울 수 있었다.
물론 독요청광심법을 익히고 있는 지금은 당연명이 패정안을 익혀도 제대로 된 효용을 누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바탕이 되는 진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무공의 효율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당연명의 눈에 차는 안법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시류안이었다.
‘상승 무학이 분명해.’
당연명은 읽자마자 알 수 있었다. 가문의 가장 오래된 안법이라더니, 깊이가 남달랐다. 다른 것들은 이 시류안이라는 것의 열화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진기 도인 경로가 조금 떨어져 나간 것 따위는 소년에게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핵심요결에 해당하는, 무공 전체를 아우르는 심상이었다. 심상만 뚜렷하다면 그에 맞춰 진기 도인법을 복원해내는 것쯤은 검신의 경지에 이르렀던 소년에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시류(視流)⎯ 흐름을 본다는 의미였다. 비급에서는 명시하고 있었다. 시류안을 완전무결하게 익혀낸다면, 모든 암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게 될 거라고.
‘과장이 아냐.’
소년은 생각했다. 비급에서 말하는 ‘흐름’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만약 안법을 동원해서 그 ‘흐름’을 항시 볼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다면 비급에서 언급된 대로 암기 무학의 성취가 아득히 깊어질 듯했다. 그것도 단숨에.
기왕 당가의 인물로 살아가기로 한 마당이었다. 소년은 다시 검을 쥐게 되면 평범하게 살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암기와 독으로 강해질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날로 당연명은 시류안을 통찰하기 시작했다.
방에 틀어박힌 채, 잠자는 시간과 끼니를 챙기는 것을 제하면 거의 온종일 명상에만 잠겨 들었다.
보름이 넘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봉위대 무사들 중 몇이 우려를 표명했지만, 당원진은 28호 소년을 그냥 내버려뒀다. 이미 범상치 않은 자질을 확인한 뒤였던 까닭이다. 간섭하지 않겠다 약조한 것도 있었고. 무언가 생각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 후로 또 며칠이 더 흐르고.
마침내 당연명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나왔구나. 28호.”
때마침 마주친 당원진이 소년을 반겼다. 눈빛에는 일말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소득은 있었느냐? 비급을 들고 가서는 면벽 수련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얼굴 한 번 보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예. 가전 안법 중 하나에 입문했습니다.”
“그래. 안법과 신법의 비급을 들고 갔었지. 무슨 안법을 택했느냐? 투천안이 가장 무난하긴 한데, 다른 것들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다. 각자 장단이 있으니까. 불완전한 시류안만 아니라면....”
“시류안을 익혔습니다.”
“...뭐?”
소년의 말에 당원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시류안? 그 진기 도인 경로마저 하자가 있는 안법을 연성했다고 말하는 건가? 그걸 굳이 왜?
“암기를 몇 개 빌릴 수 있을까요.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여기 있다.”
당원진은 연유를 묻지 않고 품에서 작은 표창 네 개를 꺼내 소년에게 건넸다. 그가 무언가 확인하려 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소년은 인사와 함께 받아들고는 표창의 날 끝을 잡고 어딘가를 바라봤다. 연무장 쪽. 그곳에는 목각인형이 몇 개 세워져 있었다. 목각인형은 여러 용도로 쓰이곤 했는데 주로 투척술을 연마하는 용으로 쓰였다.
당원진이 보기에 소년은 지금 목각인형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는 듯했다. 거리는 대강 삼십 장(대략 100m). 표창을 던져 맞추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안법 성취를 곧바로 투척술에 적용하려는 건가.’
당원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소년을 지켜봤다. 보통의 무인들에게 안법이란 그저 조금 더 공격을 잘 피하고, 상대의 허점을 잘 찾아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지만, 암기 무학을 익힌 자들에게는 조금 의미가 남달랐다.
안법 성취가 깊어지면 암기를 다루는 실력도 좋아지는 까닭이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어떤 방향으로 날렸을 때 어떤 식으로 암기가 날아가는지를 정확히 볼 수 있게 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멀쩡한 안법을 놔두고 시류안에 입문했다는 것은 조금 의아했으나, 어쨌건 안법에 입문하자마자 암기를 찾는 것을 보니 소년 역시 당가의 사람이란 생각을 하는 당원진이었다.
‘하지만 적중하긴 힘들겠지. 보아하니 제대로 암기를 다뤄본 적도 없어 보이고.’
당원진은 소년이 표창을 처음 다뤄본다는 사실을 바로 간파했다. 애초에 날을 잡는 모양새부터가 엉성했다. 저래서는 일직선으로 던져 맞추는 것도 어려웠다. 삼십 장은 짧은 거리가 아니다. 제대로 겨냥해서 날리더라도 온갖 변수가 개입되기 마련이었다. 바람이라던가, 표창의 날이 회전하면서 궤도가 제멋대로 틀어지는 것도 비일비재했다.
그런 당원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28호 소년은 표창을 대강 집어던졌다. 손놀림 하나만큼은 눈으로 쫓기 힘들만큼 몹시 재빨라서, 거의 동시라 해도 좋을 순간에 표창 네 개가 허공을 날았다.
슈슈슈슉⎯
일직선이 아니라, 제각각 아무 방향으로 날아가는 표창들.
“아니...!”
당원진은 깜짝 놀라 탄성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던 표창들이 갑자기 휘리릭 급선회하더니 그대로 목각 인형의 머리통에 파바바박 명중하는 게 아닌가?
아주 고명한 투척술을 배우고, 또 몸에 익은 암기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서는 쉽사리 흉내낼 수 없는 기예였다.
“대체 어떻게...?”
“그냥, 될 것 같았습니다.”
대충 대답하는 소년의 눈에서 녹색 광채가 일렁이다 사라졌다. 당원진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이는 대성에 이른 시류안을 끌어올렸던 흔적이었다.
‘되는군.’
소년, 당연명은 조금 전의 광경을 떠올리고는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시류안은 익히는 이가 세상의 ‘흐름’을 볼 수 있게 했다. 여기서 말하는 ‘흐름’이란 그야말로 수련자가 상정하기 나름이었다. 그저 바람과도 같은 공기의 움직임을 뜻할 수도 있었고, 천지 만물에 존재하는 기(氣)를 의미할 수도 있었다.
성취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수련자 본인이었다.
상승 무학이란 원래 이다지도 성취의 폭이 넓었다. 달리 깨달음의 무학인 것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렇담 검신이었던 소년이 떠올린 ‘흐름’은 무엇이었을까.
보름이 넘는 명상 속에서, 당연명이 '흐름'으로 구체화한 것은 바로 스스로 깨달은 검로(劍路)들이었다. 검이라는 쇠붙이, 그 수단에 얽매이지 않고, 또한 거리의 제약을 받지 않고 시야가 닿는 범위까지 뻗어 나갈 수 있는 수천수만 가지의 투로(鬪路).
그것들을 앞으로 그 자신이 시류안을 통해 보게 될 ‘흐름’으로 상정했다.
이미 검신의 영역에 닿았던 소년이기에, 이미 그러한 흐름들은 너무도 선명했다. 운기 경로를 새로이 짜고, 입문과 동시에 대성에 이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또한 마찬가지로 가전 무공인 까닭일까. 이미 대성에 이른 독요청광심법, 독요청광기를 바탕으로 펼치자 시류안에 새로운 공능이 더해졌다.
흐름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흐름에 기를 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연명이 시험해본 것은, 시류안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투로대로 암기를 움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 같았지만, 독요청광기가 실린 표창은 검신의 투로대로 움직였고, 기어이 목표한 지점에 적중했다.
이건 안법으로 강화된 시야가 닿는 범위 내에서라면, 투척술 따위에 의존할 필요 없이 암기를 목표물에 필중시킬 수 있다는 의미였다.
관건은 암기에 실릴 경력과 빠르기였는데, 이건 어차피 내공의 화후가 깊어지면 해결될 문제였다.
‘다음은 신법인가.’
심법과 안법을 완성했지만, 당연명은 아직 갈증을 느꼈다. 스스로 책정한 최소한의 무력에 아직 이르지 못한 까닭이다. 쉴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럼.”
소년은 당원진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또 한동안 두문불출할 셈으로 보였다.
“하하....”
홀로 남은 당원진의 허탈한 웃음소리만이 장원에 낮게 깔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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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보름이 지났다.
당연명은 그동안 당가의 가전 신법인 암영(暗影)과 경공인 추월광행(追月光行)을 익혔다. 신법 암영의 경우에는 몹시 은밀한 움직임을 추구했는데, 웬만한 살수 문파의 그것보다 훨씬 기척이 없었다. 어쩌면 당가의 조상은 천하에서 손꼽히는 살수였거나 그 후예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추월광행은 이름 그대로 달빛을 쫓는 쾌속한 경공이었는데, 신법이나 경공 같은 류의 무공은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그 특징이 잘 드러나기에 당가의 것을 그대로 익히기로 했다. 물론 필요한 순간이 닥치면 전생의 무학을 꺼내들겠지만.
마지막으로는 감각도(感覺道)를 익혔는데, 주사망역(蛛絲網域)이라는 것이 독요청광기와 궁합이 좋았기에 그걸 택했다.
물론 감각도를 따로 익히지 않아도 단순히 기감을 끌어올리면 주변을 남김없이 감각할 수 있었지만, 효율이 좋지 않았다.
더 적은 내공 소모량으로, 더 넓은 권역을 감각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감각도인 것이다.
주사망역의 경우에는 마치 여러 겹으로 겹친 거미줄처럼 기감의 권역을 확장할 수 있었는데, 거미줄의 역할을 하는 독요청광기의 실을 한없이 가늘게 뽑음으로써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상시로 감각도를 일으켜도 될 정도로 내공 소모가 줄어들었다.
당연명은 금세 익힌 모든 것들을 대성의 영역까지 끌어올렸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이미 검신의 영역에 이르렀던 경험이 있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일신의 무공을 어느 정도 완성하고서, 소년은 독과 암기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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