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암기 무학>
“이게 본가에서 쓰이는 암기들이다.”
암기를 배우고 싶다는 소년의 요청에, 당원진은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동안은 교관이라기보다는 식모나 심부름꾼 노릇을 해온 느낌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가르침을 내릴 수 있겠거니 싶었다.
당원진과 소년의 앞에는 온갖 형태의 암기들이 수북하게 놓여 있었다. 어림잡아도 수백 가지는 되어 보였다.
과연 독과 암기의 조종이라 불렸던 가문인 것일까. 당가에서 사용하는 암기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표창 하나만 해도 여러 형태가 존재했다. 단순하게 칼날 네 개를 균형 있게 붙인 것부터, 휘어진 날을 붙인 것, 아예 원반처럼 생긴 날에 손가락을 넣을 수 있도록 구멍만 몇 개 뚫어 놓은 것도 있었고 칼날을 다섯 개, 여섯 개, 여덟 개, 심지어 열두 개로 늘린 것도 있었다.
비도나 수리검 역시 그 형태가 다양했다. 칼날에 이런저런 구멍을 뚫거나 미세하게 음각이나 양각을 한 것들이 많았다. 소년이 비도류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자 당원진이 말했다.
“구멍을 뚫어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당원진은 서로 다른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비도를 두 개 집어 들더니 하나씩 던졌다.
삐이이이이⎯
귀를 찢을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첫 번째 비도가 날아갔다. 단순히 파공음이라기엔 무리가 있었다. 기이한 모양으로 뚫어둔 구멍으로 바람이 통과하면서 나는 소리이리라.
그리고 두 번째 비도.
스윽, 팍.
꽤나 빠른 속도였지만 던져질 때 잠깐 미약한 소리가 난 게 다였다. 그다음엔 목각인형에 명중하는 소리만 들렸다. 이것 역시도 비도에 뚫어둔 구멍의 효과일 터였다. 다만 두 비도의 특징이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
“난명비도(亂鳴飛刀)라는 것이다. 두 자루가 한 몸이나 다름없는데, 익숙해지면 동시에 던져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시끄러운 녀석이 먼저지.”
“방심을 유도하는 거군요.”
“...바로 알아차리는구나. 그래. 먼저 날아간 놈이 요란스러운 소리로 시선을 끄는 거지. 그걸 쳐내거나 막는다 해도, 직후에 조용히 들이닥치는 놈은 의외로 잘 막지 못한다.”
당연한 얘기였다. 이미 소음으로 인해 신경이 첫 번째 비도에 쏠려 있는 상태인 데다가 뒤이어 날아오는 비도는 소리조차 죽인 은밀함으로 무장했으니.
기감이 웬만큼 발달한 이가 아니면 대처하기 어려울 법했다.
하지만 소년은 이내 흥미를 잃었다.
음각과 양각을 한 비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은 날아가는 와중에 갑자기 빨라지거나, 갑자기 느려지기도 했고, 아예 겨냥해서 던진 곳과는 완전히 딴판인 곳에 적중하기도 했다. 의외성을 부각시킨 암기였다.
‘얕은 수작이야.’
감각도를 제대로 익힌 이들에게는 절대 통하지 않는다. 시각이나 청각을 교란하는 정도로는 고수들에게 유효한 공격을 할 수 없다. 차라리 경력을 제대로 실은 평범한 비도 한 자루가 낫지 않을까.
당원진은 몰랐지만 소년의 기준은 아득히 높은 곳에 있었다. 제대로 기감을 벼릴 줄도 모르는 이들은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의미가 없었다. 구태여 복잡하게 만들어진 암기를 쓸 필요도 없었다. 그냥 시류안으로 보이는 투로대로 던지기만 해도 피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이것들은 그저 평범한 수리검이지만....”
그렇게 말하며 당원진은 수리검을 손바닥으로 슥 훑었는데, 어느새 그의 오른손 손가락들에는 다섯 개의 비도가 하나씩 끼워져 있었다. 수리검의 손잡이 끝부분에는 둥근 고리 같은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손가락 마디 하나씩을 끼워 넣은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당원진이 손가락을 살짝 오므렸다 펴자, 수리검들이 동시에 전방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멈춘 채 찌르르 떨더니 거짓말처럼 다시 당원진의 손아귀로 돌아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이라도 달린 것처럼.
“연기륜(連氣綸)이라는 것이다. 본가의 암기가 작고 가벼운 것은 물론 은밀함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암기의 특성상 제작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함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노력은 본가의 암기가 더욱 귀해지게 만들었다. 더욱 작고 가볍게 만들고자 하면서 적잖은 공이 들어갔으니 말이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어떻게든 암기를 회수하는 것. 연기륜은 그래서 만들어진 무공이다.”
당원진의 말대로였다. 검이나 도 한 자루만 있으면 되는 여타 문파와는 달리, 암기 무학을 다루는 곳은 철과 금전의 소모가 엄청났다. 평범해 보이는 수리검 역시 가문의 장인이 만든 것으로, 외부에 내다 팔면 은자 한두 냥은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것을 전투가 있을 때마다 쏟아내고 분실하는 마당이었으니, 가세가 기울어 가는 마당에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였다.
특히나 난명비도와 같은 암기들은 재료로 쓰인 비용보다는 만드는 것 자체가 워낙 까다롭기에 꼭 회수해야 하는 물건이었다.
설명을 들은 당연명은 눈을 빛냈다. 발출한 암기를 다시 회수한다는 발상이 그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연기륜을 잘 다듬으면 상승의 무학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여겨졌다.
‘발출만이 공격이 아냐. 회수할 때를 잘 이용하면....’
바로 떠오르는 상념을 뇌리 한편에 정리해뒀다. 소년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번뜩이는 심상 같은 것들이 모이면 새로운 무공이나 깨달음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연기륜에는 몇 가지 단점이 있다. 일단 내공 소모가 너무 크다.”
소년이 보기에는 당연한 이치였다. 몸에서 떨어진, 신외지물을 진기로 어찌해보려는 시도는 원래 그랬다. 연기륜은 단지 진기로 실을 만들어 암기와 손을 연결하는 정도일 뿐이긴 했지만 어찌 보면 어검술과도 맥락이 닿아 있었다. 내공 소모가 클 수밖에.
당원진이 계속 말했다.
“그리고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암기와의 연결이 끊어지고 만다. 내 경우에는 일 장(3m) 정도가 한계다.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지. 또한 이렇게 고리가 달린 암기가 아니면 적용이 어렵다. 지금에 와서는 결국 익히는 자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한데 제게 알려주시는 이유는...?”
“28호 너라면 무언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당원진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그는 소년이 시류안을 제대로 익혀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핵심요결은 물론이고, 진기를 어떻게 도인해야 하는 지도 제대로 적히지 않은 비급을 보고서 말이다.
그렇다면 연기륜도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군요. 도움이 됐습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연기륜을 배우고 싶다고. 소년이 판단하기에는 익혀볼 가치가 있었다.
당원진은 알겠다 말하고는 수리검을 내려놓고 조금 옆으로 이동했다.
거기에는 긴바늘 같은 침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는데, 길이나 굵기가 미세하게 달랐다.
“세침(細針), 혹은 우모침(牛毛針)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보통은 바늘 같은 것들을 세침, 조금 굵은 것들을 우모침이라 칭하긴 한다만...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어쨌건 정밀한 투척술을 발휘할 수 있다면 이것만한 게 없지. 특히 사혈에 단번에 적중시킬 수 있다면 상대를 곧장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하수들을 상대로는 쓸 만하겠군요. 만드는 게 까다롭지도 않아 보이고.”
“...그렇지. 기감이 발달한 적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겠지만, 합공이나 기습을 한다면 아주 효과적이다.”
당원진은 자연스럽게 합공과 기습을 입에 담았다. 다른 정도 문파나 무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기질이었다. 무림에서도 경원시하는 수단⎯ 독과 암기를 쓰는 까닭일까.
소년은 어차피 그런 허울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듣고 보니 우모침은 매력적인 암기였다. 당원진이 말한 장점뿐만 아니라, 부피가 작고 무게가 가벼워 가지고 다니기도 아주 좋아 보였다.
‘괜찮은데.’
워낙에 가늘어 큰 경력을 싣는 건 어렵겠지만, 극독을 발라 살상력을 높일 수도 있어 보였다. 보통의 암기와는 달리 침의 형태인지라, 피부 위에 적중시키면 바로 중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게 우모침의 다양한 활용법을 구상하면서, 소년은 점차 암기 무학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검신의 무위를 숨기기 위해 택한 암기였지만,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어쨌거나 소년의 몸에도 당가의 피가 흐른다는 방증일 지도 몰랐다.
그 외에도 가루독을 천천히 흩뿌리는 호접표(胡蝶鏢)나 기관(機關)에 가까운 설치용 암기 여럿을 보았는데, 어딘가 암기 그 자체로서의 성능보다는 부족한 하독술이나 암기술을 보완하는 종류였기에 큰 흥미를 가지지는 않았다.
온종일 소년은 당가의 거의 모든 암기를 섭렵했고, 곧장 수련을 시작했다.
****
새벽, 연무장.
이 장원에서 28호라 불리는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눈썰미가 좋은 이라면 소년의 눈에서 녹색 광채가 희미하게 번뜩인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명은 시류안을 발현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는 세상이 수많은 투로의 집합으로 보일 터였다.
목표물은 뻔했다. 투척술 연마용 목각인형.
목각인형은 일정 간격을 두고 모두 열 개가 있었는데, 소년이 무엇을 노리는지는 아직 불명확했다.
불현듯.
촤르르륵⎯
미세한 금속음과 함께 허공에 여덟 개의 표창이 나타났다. 소년이 놀랄 만큼 빠른 손동작으로 흩뿌린 것이다. 각 표창의 가운데에는 둥근 고리가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표창이 아니라 그냥 고리에 작은 칼날 여러 개를 달아둔 느낌이었다.
표창이 잠시 허공에 머물러 있는 사이, 소년은 양손의 엄지를 제외한 모든 손가락에 표창의 고리를 끼웠다. 역시나 쾌속한 손놀림.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회(回: 돎).’
내공, 독요청광기에 회(回)의 묘리를 싣는다. 그걸 그대로 손가락에. 그러나 발출하지는 않는다. 그냥 머물도록 잡아둔다.
그러자 표창이 소년의 손가락을 벗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고속으로 휘돌기 시작했다. 슈아아아 하는 소리가 제법 위협적이었다.
소년은 망설이지 않고 손가락을 살짝 구부렸다가 폈다. 그러자 회전력이 가미된 표창들이 소년의 손가락을 벗어나 휘리릭 날아갔다.
평범한 이가 보았다면, 아니 웬만큼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도 눈으로 쫓기는 힘들 만큼 엄청난 빠르기였다.
하지만 감각도⎯ 주사망역으로 강화된 소년의 기감은 표창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소년이 의도한 대로 검신만이 볼 수 있는 투로를 따라 날아다니고 있었다.
소년이 품속에서 표창을 꺼내 흩뿌리고 여기까지 불과 반 호흡.
그야말로 찰나라 할 만한 순간에 이루어진 출수였다.
그리고 직후.
촤라라라락⎯!!
무언가 난도질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 연습용 목각인형 ‘아홉’이 여기저기 절단되어 후두둑 쓰러졌다. 실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목각인형은 오죽(烏竹)을 여러 겹 덧대어 만든 것으로, 수년간 사용하고도 끄떡없을 정도의 강도를 자랑했는데, 이렇게 쉽게 토막 나다니...?
암기의 발출부터, 정밀한 운용과 경력을 싣는 것까지.
암기 무학에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는 자가 봤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광경이었다. 심지어 이러한 광경을 자아낸 자가 기껏해야 열둘, 혹은 열셋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음에야.
다만 아직은 완성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목각인형 하나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에는 실망이나 아쉬움의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처럼. 그저 무심하게 손가락들을 뒤쪽으로 살짝 잡아당기는 동작을 했을 뿐이다.
그러자.
촤라라라락⎯!!
다시 한 번 예의 난도질하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남은 목각인형이 잘게 다져졌다.
그리고 소년의 손가락에는 언제 날아갔었냐는 듯이 표창들이 돌아와 끼워져 있었다.
마침내.
검신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든 암기 무학이 완성된 것이다.
후⎯
가느다란 날숨과 함께.
소년의 눈에서 녹색 광채가 신비롭게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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