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싹트는 모략>
칠쇄환궁진.
제갈가의 비전 진법으로, 일곱 명이 진법의 중심축이 되어 각자 하나의 진법 세계를 관장한다. 형성된 일곱 개의 진법 세계는 서로 톱니처럼 맞물려 있었는데, 정해진 시기가 되거나 아예 힘으로 진법 자체를 쳐부수지 않는 한 진법을 관장하는 일곱이 아니면 결코 다른 진법 세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칠쇄환궁진이 당가의 소가주 경합에 쓰이게 됐다. 더 이상 세가라고 불리지는 않지만 당가 역시 오랜 세월 존속해온 거대 무가였다. 차기 가주의 자리를 두고 온갖 인물들이 얽혀 있을 만했다. 더군다나 사천에는 사파 세력이 즐비했으니, 제갈가의 손을 빌려 경합의 공정함과 참가자들의 안전을 도모하려 한 것이다.
물론 제갈가는 그동안 물질적으로 신세진 것을 갚는다면서 칠쇄환궁진과 함께 진법의 축이 될 일곱을 파견했지만,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마냥 선의만 있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파견된 일곱은 제갈가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진법에 조예가 깊은 자들이었다. 가세가 기울어가는 마당에, 단순히 은혜를 갚고자 상당한 무력의 공백을 감수한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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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섭선을 부치며 걷고 있었다. 신비하게도 그가 걸을 때마다 주변의 광경이 조금씩 뒤틀렸는데, 이는 그가 시시각각 변화하는 진법의 생문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움직이고 있음을 의미했다. 사실, 그가 바로 진법 칠쇄환궁진의 주축이 되는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풍경이 몇 차례나 바뀜에도 동요하지 않고 걸음을 계속 옮겼는데, 여덟 번째로 풍경이 변화할 때에서야 걸음을 멈췄다.
"다들 모였군요."
섭선 사내, 제갈창신이 말했다.
어느새 그는 커다란 원탁이 자리하고 있는 방안에 당도해 있었다. 원탁 앞에는 여섯 명의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당가의 소가주 경합에 파견된 제갈가의 인물이었는데, 제갈창신을 본 그들은 일어나 그를 맞았다.
"오셨습니까. 전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모두가 웃어른을 대하듯 말을 높인다. 연배는 다들 비슷했지만, 그들 중 제갈창신이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까닭이었다. 제갈창신은 제갈가 무량전(無量殿)의 전주였다. 무량전은 제갈가에서도 진법에 통달한 이들만 모아둔 전이었는데, 그곳의 전주인 제갈창신이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제갈창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반년만이군요. 다들. 임무는 순탄하게 수행중인 것 같고."
"그렇습니다. 전주."
칠쇄환궁진은 정교한 진법이었다. 제갈가의 인물끼리도 한날 한시에 일곱 전원이 접선하려면, 반년에 한 번만 가능할 정도로. 그게 오늘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제갈창신의 말에 예사롭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는 '임무'를 입에 담았다.
그렇다는 것은 설마 제갈가의 인물들이 당가의 소가주 경합에 파견을 나온 게 순전히 호의만은 아니었다는 뜻일까...?
제갈창신이 한 사내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그럼, 일 조부터 보고를 들어볼까요. 과연 우리가 포섭할 만한 인재가 있는지."
"예.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2호입니다. 그녀는 무슨 끔찍한 독에 당하기라도 한 것인지 처참한 상태의 피부를 지니고 있는데 항상 누군가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그러한 감정을 장작 삼아 엄청난 속도로 실력이 늘고 있는데...."
사내들은 하나씩 나서서 자신이 맡은 조의 경합 참가자들에 대해서 읊기 시작했다. 누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지를 주로 얘기했다. 그들은 칠쇄환궁진의 관리자인만큼 진법 속에 숨어서 경합 참가자들을 평가할 수 있었다.
'2호와 10호가 두각을 보이는군. 18호와 22호도 가능성을 열어둬야겠고.'
제갈창신은 사내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주목할 만한 인재들을 추려냈다. 경합에 참가한 일곱 개 조는 모두 같은 시련을 겪고 있었다. 절벽과 동혈로 내던져지고, 맹수를 잡아 식량을 충당해야 했다. 편안한 잠자리가 보장되는 장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시험에 통과해야 했고.
고작해야 열둘에서 열여섯 정도의 나이대인 소년소녀들에게는 가혹한 환경임이 분명했다. 실제로 맹수들에게 물려 죽은 참가자도 몇 있었다. 제대로 재능을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죽었지만,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죽은 참가자가 있는 조의 인원들은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아주 빠르게 실력이 늘었으니까.
2호와 10호는 불과 한 달만에 시험을 통과하고 장원으로 귀환한 인재들이었다. 18호와 22호도 그보다는 조금 더 걸렸지만 다른 참가자들에 비하면 월등히 빠르게 시험을 통과했고.
그런데 제갈가에서 이렇듯 세세하게 경합 참가자들을 파악하는 이유가 뭘까.
'2호가 작업하기엔 좋겠어. 흉측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 했으니. 백선이와 이어주면 되겠군. 여아이기도 하고.'
제갈창신은 인물 하나는 훤칠한 조카를 떠올렸다. 제갈백선은 송옥의 환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을 타고났는데 무학이나 진법에 대한 재능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를 이용한다면 아직 어린 소녀의 방심쯤은 쉽사리 뒤흔들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제갈가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쇠락한 상태였다. 당가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밑빠진 독에 물붓기,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같이 쇠락해 가는 처지인 당가가 지금 이상의 도움을 줄 수도 없는 처지였고.
이렇듯 당장 가문의 존속마저 위태로운 시기에, 제갈가에서 무력 공백마저 감수해가며 제갈창신을 비롯한 일곱을 당가의 소가주 경합에 파견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당가를 통째로 먹어치우는 것...!
제갈가에는 다른 건 몰라도 머리 하나만큼은 비상한 이들이 많았다. 이번 소가주 경합이 당가에서 지니는 의미 따위는 진즉 파악한 지 오래였다. 장로원을 비롯한 기득권층과 젊은 무인들간의 소리없는 알력, 장로들끼리의 권력 싸움, 정통성....
소가주 경합의 우승자가 바로 당가의 차기 주인이 된다는 것까지.
제갈가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 소가주 경합의 우승자가 될 인재였다. 정확히는 우승자가 될 '가능성'을 보이는 소년 혹은 소녀라 해야겠지.
경합이 칠쇄환궁진의 영역 내에서 펼쳐지는 만큼, 제갈가는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줄 수 있었으니까. 서로 득이 되는 거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적합한 인물을 선정해 경합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손을 써 도와주고, 그 대신 제갈가의 인물과 혼약을 맺게 한다. 그렇게 혼인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는 누가 뭐래도 당가의 적법한 계승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제갈가는 아이의 외척으로 행세할 셈이었다. 당가에서의 발언권을 높이고, 여러 이권을 가져와 야금야금 당가를 집어삼킬 계획이었다.
'종래에는 당가와 본가를 합치게 되겠지.'
진법과 기관진식의 대가인 제갈가와 독과 암기의 종주였던 당가가 완전히 합쳐지게 되면 새로운 세가로 발돋움할 수도 있다- 그게 제갈가 수뇌부의 중론이었다. 가문끼리의 궁합이 좋다고.
물론 그러한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초기단계인 지금, 가능성을 보이는 당가의 인재들을 선별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작업이었다.
'28호만큼 비범한 참가자는 없는 것 같긴 한데....'
제갈창신은 그가 담당하는 칠 조에서 두각을 보이는 소년을 떠올렸다. 지금 다른 조를 담당하는 이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설마하니 하루만에 시험을 통과하고 장원으로 되돌아온 참가자가 있을 거라고는 말이다. 착(着)이라는 기예를 선보였을 때는 제갈창신도 꽤나 놀랐었다. 그건 고명한 검객들에게서나 볼 법한 기예였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착(着)에 대한 28호 소년의 강론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꽤나 아쉬웠던 기억이 있었다.
원래라면 가장 뛰어난 참가자는 오히려 그들의 계획에서 배제해야 했다. 굳이 제갈가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제갈가가 고려해야 할 대상은 경합 참가자들 중 두 번째나 세 번째로 뛰어난 이였다. 경합에서 승리하기 위해 제갈가의 조력이 절실한 이들 말이다.
하지만 28호 소년의 빛나는 자질이 제갈창신을 고민케 했다. 2호나 10호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지금에 와서는 봉위대 무사 당원진도 28호에게 마음을 쏟고 있다는 게 보였다. 반쯤 차기 소가주로 여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말로 그렇게 뛰어난 자질을 지녔다면 차라리 28호 소년을 가주로 미는 것이 옳지 않을까. 크게 빚을 지울 수는 없겠지만.
한참을 고심하던 제갈창신은 결정을 내렸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로.
'일단 28호는 대상에서 배제한다. 2호나 10호, 혹은 둘 모두를 도와 경합에서 우승시키는 거다. 아무리 뛰어나봤자 아직 아이에 불과하니 우리 뜻대로 되겠지.'
제갈창신에게는 2호나 10호를 도와줄 몇 가지 수단이 있었다. 경합의 마지막 관문, 생존경쟁에서 진법을 사사로이 운용해 도움을 줄 수도 있었고 제갈가 비전의 영약으로 내공을 늘려줄 수도 있었다. 그러한 도움이 더해진다면 28호에 비해 '약간' 떨어지는 2호나 10호가 경합에서 승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반드시 승리하겠지.'
그런 뒤에 경합에서 승리하지 못한 28호를 제갈가로 영입하는 거다. 정확한 혈연 관계를 모르겠지만 별 것 없는 방계 출신이거나 하면 아예 양자로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경합에 참가한 것을 보면 나름의 야망이 있을 텐데, 제갈가의 소가주 자리를 미끼로 내어주면 덥석 물지 않을까.
'...괜찮은 계획이로군.'
당가의 소가주 자리에는 제갈가와 인척 관계를 맺을 인물을 넣어 두고, 원래 경합에서 우승했어야 할 당가의 최고 인재는 제갈가로 빼돌린다...!
차후 28호 소년을 이용해 당가 내 차기 가주 자리를 놓고 다시 한 번 논란을 만드는 것도 가능할 듯했다. 이게 소가주를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여러 모로 훌륭한 계획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갈창신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곧 촤르륵 섭선이 펼쳐지며 호선을 그린 그의 입매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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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욱-
소년이 세침류 암기, 우모침을 한 움큼 허공에 뿌린다.
경력이 실린 까닭일까. 원래라면 바람 따위에 의해 올라가지 못할 높이까지 치솟는 우모침들.
원래도 가늘기 그지없어 웬만큼 시력이 좋은 이라 해도 우모침을 식별하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허공에 던져 놓으니 한층 더 찾기가 힘들었다. 물론 소년은 압도적인 기감으로 그 하나하나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낙(落).'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당연명이 허공에 흩뿌렸던 오른손을 빠르게 감아쥐자. 공중에서 우모침들이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산하며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우모침의 비.
우모침우(牛毛針雨)라고 이름지은 당연명의 새로운 암기무학이었다. 당원진으로부터 배운 연기륜은 소년이 암기 무학을 창안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암기를 기의 실로 이어 뜻한 바대로 다룰 수 있으니 여러 움직임이 가능했다.
처음 만들었던 암기 무학은 회선난무표(回旋亂舞鏢)라는 것이었는데, 아직 일천한 내공으로는 여러 번 펼치기 부담스러워 우모침우를 만들었다. 단일 상대를 대상으로는 회선난무표가 훨씬 위력적이겠지만,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것은 우모침우가 나았다.
소나기를 피할 수 있는 경공을 지닌 상대가 아니라면 우모침우를 완전히 피해낼 수는 없을 터였다. 문제는 살상력인데....
당연명은 독에 대해 배울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암기 무학의 살상력을 한층 더 끌어올리는 것뿐만 아니라, 내공의 증진을 위해서도.
그가 지닌 독요청광기는 독을 먹고 자라는 기운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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