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정립>
"원진.”
“아. 왔나. 고생했네. 녀석들은 어떻지? 분명 25호가 오성이 뛰어나고 26호가 비도술에 재능을 보인다고 했던 것 같은데. 27호는 용독술뿐만 아니라 독의 제조에도 일가견이 있다면서.”
“맞네. 정확해.”
당원진의 말에 그를 부른 봉위대 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원진은 주로 28호 소년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다른 7조 인원들에 대해서는 당원진을 제외한 봉위대 무사들이 돌아가면서 담당하고 있었다.
봉위대 무사들은 10일에 한 번씩 25, 26, 27호가 있는 절벽 동혈에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그들의 생존여부를 확인하고, 수준에 맞는 무공 비급을 건네거나 짧은 가르침을 주었다. 맹수를 동원한 시련은 사실 초반에나 위협적이지, 어떻게든 버텨내기만 한다면 참가자들은 빠르게 강해질 것이기에 강제로 밀어붙이는 방향으로 결정된 부분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맹수들로 인해 위협을 겪은 소년소녀들은 생존을 위해 보다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을 다른 어떤 때보다 갈망했고, 그렇게 던져진 비급과 가르침을 아주 빠르게 제 것으로 소화해냈다.
특히나 7조는 다른 조보다 더 여건이 열악했다고 볼 수 있었다. 원래 네 명이서 감당했어야 할 시련을 당연명이 당일 바로 빠지는 바람에 고작 셋이서 헤쳐 나와야 했으니까. 솔직히 교두 역할을 맡은 봉위대 무사들은 첫 10일이 되기도 전에 그들이 모두 죽을 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실제로 시간이 흘러 제갈창신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다른 조에서는 네 명이 온전한 상태에서도 한둘씩 죽어나가기도 했다고 하니까.
때문에 교두인 봉위대 무사들은 25, 26, 27호를 높게 평가했다. 28호 소년에 비해 빛이 바랬을 뿐이지, 그들 역시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강해지는 속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28호의 영향력이라 봐야겠지.’
직접 가르쳐 본 봉위대 무사는 알 수 있었다. 7조의 소년소녀들은 은연중에 28호 소년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동년배라서 그런 것일까. 이미 까마득하게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소년을, 따라잡을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서 비롯된 향상심이 7조 인원들의 실력을 빠르게 향상시키고 있었다.
상념을 떨쳐낸 봉위대 무사가 말했다.
“이번에 녀석들이 시험을 치르겠다고 말하더군.”
“오. 드디어?”
“그동안 사이가 끈끈해진 녀석들일세. 한날한시에 시험을 치르겠다고 한 것을 보면 이제 모두가 통과할 자신이 선 것이겠지.”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군.”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나. 녀석들은 시험의 수준이 28호가 치른 정도일 거라 생각할 테니.”
봉위대 무사가 실소를 흘렸다. 시험의 통과를 위해서는 기감의 발달이 필수적이긴 했지만, 애초에 맹수를 동원한 절벽의 시련은 여러 목표가 있었다. 이번 경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과,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고 자극받는 계기가 되게 하고, 대인전은 아니지만 실전경험을 쌓도록 하는 것이다.
참가자들끼리는 소가주의 위를 두고 다투는 경쟁자가 맞긴 했지만 어쨌거나 길게 보면 가문의 동량들이기에 어느 정도 유대감을 형성케 하기 위함도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절벽 높이 위치한 동혈에서의 생활을 통해 완력과 같은 신체 능력이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것을 노렸다. 신법의 성취가 깊어질 수도 있었고.
어쨌거나 7조는 빠르게 실력을 향상시켜왔고.
고작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때, 봉위대 무사들이 보기에 이미 시험을 통과할 만한 수준의 기감을 지니게 되었다. 7조 전원이 말이다.
하지만 7조는 아무도 시험을 치를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무려 반년이 지날 때까지.
여기에는 ‘사소한’ 오해가 있었다.
처음 28호, 당연명이 바로 장원에 돌아가겠다며 시험을 치렀을 때. 봉위대 무사들은 소년을 괘씸하게 여겨 시험의 난도를 대폭 높게 한 바가 있었다. 원래 시험의 수준은 그 정도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쨌건 당연명은 큰 어려움 없이 시험을 통과했고, 나머지 7조 소년소녀들은 시험의 수준을 완전히 착각하게 된 것이다.
물론 봉위대 무사들은 그러한 사실을 눈치 챘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착각 때문이긴 했지만 7조의 향상심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그들 자신, 그리고 당가에 있어서 득이 되면 됐지 나쁠 것은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머지 7조 인원들이 시험을 치겠다고 얘기한 것이다.
아마 전원이 쉽게 통과할 것이고, 또 허탈해하겠지.
억울해할 녀석들을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나는 봉위대 무사였다.
“그럼, 길게 끌 것 없이 내일 바로 시험을 보도록 하지. 제갈 무인에게는 내가 말해놓겠네.”
“알겠네. 원진.”
“녀석들의 얼굴이 자못 기대되는군.”
당원진 역시 마주한 사내와 비슷한 웃음을 흘렸다. 28호에게서는 맛볼 수 없는 교두로서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겠다는 직감이 든 때문이었다.
****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고작 그게 시험이었어...? 그럼 우린 왜 그 고생을 해 가면서 동굴 생활을 했던 거지...?”
제갈창신을 따라 걷는 행렬의 맨 뒤에서 궁시렁대는 창백한 안색의 소녀가 있었다. 당미려, 이곳에서는 26호로 불리는 소녀였다.
“안 그래, 유리야? 우리가 밤이슬 맞아가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짐승 가죽이나 벗겼던 이유가 뭔데? 장원에 돌아가기 위한 시험. 당연명, 걔가 치렀던 그 시험에 통과할 자신이 없어서였잖아.”
“.......”
“근데 이게 뭐야. 이게 무슨 시험이냐구. 이전이 봤지? 한 손으로 비도 다 잡아버리는 거. 고작 그 정도 수준의 기감을 요구하는 거였던 거야...? 당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이야?”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겠지. 우리가 착각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25호, 당유리가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답했다. 당유리는 지난 몇 달을 떠올렸다. 처음 늑대의 습격에서 힘겹게 살아남고, 그 후에 하나씩 던져지는 비급과 가르침을 몇 번이고 읽고 되새기면서 강해지고자 했다. 나름대로 귀하게 큰 자신이 손에 피를 묻혀 가며 짐승의 가죽을 손질하고, 차디찬 돌바닥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잡일을 해왔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 당미려, 당이전과 고락을 함께하며 친해졌고 또 스스로 생각해도 믿기지 않을 만큼 무공 성취가 깊어졌지만 당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몇 달이나 더 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유리는 당미려처럼 대놓고 불만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사실 시험을 치르는 것이 늦어진 데에는 당유리 자신의 탓도 있었던 까닭이었다.
셋 중에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것이 당유리였다.
당미려와 당이전은 이미 한 달도 전에 시험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기감이 발달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동안의 의리 때문에 당유리가 실력을 갖추게 될 때까지 기다려준 것이었다. 만약 절벽 동혈에 당유리 혼자 남게 되면 셋이 있을 때보다 더 혹독한 조건이 될 것이 뻔했으니까.
“당이전. 넌 왜 조용해? 화가 나지도 않아?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몇 달이나 더 했다니까?”
“...난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 미려 너한테 비도술을 제대로 배운 것도 큰 소득이었고. 완전히 새로운 독들을 직접 만들고 써보기도 했잖아? 용독술도 많이 늘었고.... 무엇보다 너희처럼 예쁜 애들이랑 같이, 또 가까이 지낼 수 있었으니 나름 호사였다고 여기는 중이야.”
“흠. 그래...?”
당이전의 말에 왠지 조금 누그러진 기색을 보이는 당미려였다.
그렇게 떠드는 사이, 제갈창신의 손짓에 따라 풍경이 또 한 번 바뀌었고 아담한 크기의 장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로소 그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안락한 잠자리와 제대로 된 식사가 제공되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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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년만인가.’
당연명은 장원 외부를 둘러싸고 있는 진법이 변화하는 것을 기감으로 느끼며 생각했다. 감각도 주사망역 덕분에 이제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장원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속속들이 뇌리에 새겨졌다. 항시 기감을 칼날처럼 가다듬고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누가 봐도 고수라 부를 만한 영역에 들어서 있었다. 물론 당연명이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제갈창신을 비롯한 봉위대 무사들에 더해 새로운 기척이 셋 더 있었다. 그들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험을 통과한 7조겠지.
‘다들 살아 있다니 다행...이군.’
몇몇 조에서는 죽은 참가자들도 있다는 얘기를 당원진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소년은 곧 살짝 놀랐다. 지금, 자신이 타인의 안부를 염려한 것일까? 스스로가 낯설었다. 당이전, 당유리, 당미려와는 그저 이곳까지의 여정을 함께한 또래일 뿐 아니었던가.
당연명은 자신이 빠짐으로써 남은 7조가 조금 더 힘든 시련을 겪게 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니 죄책감 따위에서 비롯된 안도감은 아니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결정을 내릴 터였다.
다시 얻게 된 삶의 기회.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 ‘최소한의 힘’을 갖추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고 있었으니까.
‘...이 역시 평범한 감정일까.’
당연명은 결국 이 낯선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문이 생겼고, 어머니라 부를 사람이 생겼다. 봉위대나 7조 역시 작은 인연으로 엮인 이들이라 할 수 있었다.
아는 이라고는 사부 하나뿐이던 전생과는 여러 모로 달라진 상황이다. 새삼 타인과의 관계가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로 다가왔다. 그들을 어찌 대해야 할까.
‘어렵군.’
소년은 평범한 삶의 범주를 재정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저 어머니인 독봉 당지혜와 자신만을 지키며 평탄히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경합에 승리하여 소가주가 된다면, 그래서 봉위대를 수하로 거두게 된다면, 또 7조의 소년소녀들과 우정을 나누게 된다면....
그때는 지켜야 할 것들이 몇 곱절로 늘어나지 않을까.
짧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벌써 어떻게든 얽힌 이들이 많았다. 앞으로도 이런저런 일들이 많을 테고, 그들 중 몇몇은 당지혜처럼 소중한 이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굳이 지금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겠지.’
소년은 이내 상념을 접었다. 얽히면 얽히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평범한 삶일 테니까. 그 얽힘을 피하거나 외면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얽힘 속에서 남들처럼 소중한 것들을 만들고, 또 소중한 것들을 지켜나가는 삶⎯ 그게 소년이 생각하는 평범한 삶이었으므로.
그렇게 마음을 다진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을 마중하러 나갔다.
때마침 내린 햇살이 소년의 얼굴을 따스하게 보듬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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