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천심환>
“조장이 되었다고는 하나 말 그대로 임시다.”
당원진이 새롭게 조장을 맡은 28호를 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참가자들이야 장원에 모인 후 임시라도 조장이 되기 위해 애를 썼겠지만, 사실 이번 경합에서 임시 조장이 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았다.
“경합이 시작된 지 3년째가 되면, 그러니까 지금부터 2년 뒤겠지. 그때 정식으로 조장을 선출하게 된다. 이때 조장으로 선출된 참가자들은 각 조를 대표하여 경합의 마지막 시험인 고독전(蠱毒戰)을 치르게 된다.”
어차피 소가주 경합의 참가자 중 소가주가 될 수 있는 자는 단 하나였다. 당가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를 뽑는 것이었으므로. 결국 7개 조 각각에서 가장 뛰어난 이들을 조장으로 뽑아 그 7명을 경쟁시켜 최종 한 명을 뽑겠다는 발상이었다.
“정식 조장을 뽑는 것은 임시 조장과 나머지 조원들의 비무를 통해 이루어진다. 즉, 임시 조장인 28호는 25, 26, 27호의 합공을 이겨내고 승리를 거머쥐어야 비로소 조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28호 말고 저희 쪽이 승리하면 어떻게 되나요?”
“좋은 질문이다. 25호. 그렇게 되면 28호는 정식 조장이 될 자격을 잃어버리고 너희 셋 중에 가장 뛰어난 이가 조장이 된다.”
“...임시 조장한테 너무 불리한 조건 아닌가요? 납득이 가지 않는 처사인데요.”
“그러니까.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28호는 가만히 있는데 왜 너희들이 그러는지 모르겠다만....”
당원진은 말끝을 흐리며 7조의 소년소녀들을 훑어봤다. 다른 조 참가자들의 성취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7조 인원들은 이만하면 명문 무가의 후계라 칭해도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실력이 늘어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짧은 시간 동안 각자 뼈를 깎는 고련이 있었음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28호 소년을 임시 조장으로 정하는 데 두말없이 찬성했다. 이건 마음 속 깊이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서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임시 조장을 맡는 것이 득이 될 지, 실이 될 지 참가자들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임시 조장이 그대로 정식 조장이 되어 경합의 최종 시험⎯ 고독전에 임하게 될 수도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조는 피바람이 불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당원진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지나면 경합 참가자들 간에 서로 실력의 우위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각자가 원래 지니고 있던 실력이나 타고난 재능, 그리고 이곳에 와서 쏟은 노력 등이 다르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 차이가 벌어지면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노력을 포기하게 되겠지. 각 조에서 가장 뛰어난 참가자에게도 안일한 마음이 조금쯤은 생길 테고. 그건 가문 전체의 입장에서 봤을 때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임시 조장을 뽑은 것은 그래서다.”
“그래서라뇨?”
26호 당미려가 이해하지 못한 듯 삐딱하게 되물었지만, 25호 당유리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참가자 전원이 마지막까지 노력하게 할 셈이야.”
“그게 무슨 말인데?”
“생각해 봐. 임시 조장... 그러니까 우리 조의 경우에는 28호가 되겠지. 아무튼 28호가 정식 조장이 되려면 우리 모두를 비무로 꺾어야 하잖아?”
“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지금도 지지 않나?”
“.......”
당미려의 반문에 잠시 말문이 막힌 당유리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당이전이 말했다.
“우리 조는 예외로 봐야겠지. 연명이... 아니, 28호 같은 녀석이 또 있지는 않을 거 아니야. 대부분은 뛰어나다 해도 나머지 셋을 동시에 감당하기는 힘들 거야. 조에 따라서는 셋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임시 조장을 제외한 조원들에게 기회가 돌아갈 수도 있다는 거지. 합공을 할 수 있으니 유리하기도 하고.”
“정식 조장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미끼로 던져줘서 노력을 유발한다?”
“그렇지. 이번에 임시 조장으로 뽑힌 애들은 더더욱 경각심을 느끼고 조장 자릴 지키려고 할 테고. 다른 조원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해야겠지.”
이제야 이해한 당미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린다. 머리를 엄청 썼구만.
“다들 이해한 것 같으니 계속 말하겠다.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 만큼, 임시 조장이 된 28호에게는 작은 혜택이 주어진다.”
“혜택? 영약이라도 주어지는 건가.”
“그럴 지도. 여럿을 상대해야 하니 내공량이라도 증진시켜주려는 거 아닐까.”
당원진의 말에 당미려와 당이전이 속닥였다.
“자. 28호는 나와서 받아라.”
당원진은 당연명을 불러 앞에 세우고는 작은 목함을 내밀었다.
“뭡니까.”
“본가 약왕당에서 여러 약재를 조합해 만든 영약이다. 천심환(千審丸)이라는 것으로, 복용 시 적지 않은 내력의 증진을 이룰 수 있을 거다.”
“...천심환이라니.”
놀란 표정으로 당유리가 중얼거렸다. 천심환은 백년설삼(百年雪蔘)을 몇 뿌리나 집어넣어 만드는 당가 약왕당 비전의 영약이었다. 단순히 들어가는 재료의 가치도 가치지만, 이름처럼 무려 천일을 세심하게 신경 써야 비로소 제대로 된 천심환이 만들어진다. 그런 천심환의 가치는 돈으로 헤아리기 힘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은자 일만 냥에 내놔도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지 않을까.
당미려와 당이전도 놀란 표정으로 목함을 바라봤다. 영약이 주어질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천심환을 내어주다니. 가문에서 경합 참가자들에게 거는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새삼 느껴졌다. 특히 당미려는 천심환이 든 목함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러나 정작 천심환을 받게 될 소년은 감흥없이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잠시 목함을 바라보던 당연명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혹시....”
“음? 왜 그러느냐.”
“영약은 굳이 필요치 않아서 그런데. 다른 것으로 대체해서 받아도 됩니까.”
“뭐?”
당원진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동안 28호 소년이 예측불허의 모습을 자주 보여 왔지만, 오늘만큼은 순순히 기쁨을 표현하리라 생각했었다. 무인에게 있어 내공이란 것은 오랜 세월을 공들여 호흡해야 쌓을 수 있는 힘이었다. 영약이란 것은 그 세월을 단축시켜줄 수 있는 것이고. 특히 약왕당에서 만든 천심환은 몇 년의 세월을 아껴줄 수 있는 보물이나 진배없었다. 그런데 그걸 거절하고 다른 보상을 요구한다...?
“너 미친 거 아니니? 저게 어떤 영약인 줄 알고...!”
“진정해. 26호. 생각이 있겠지. 다름 아닌 그 28호잖아.”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있어? 더 이상 영약을 먹어도 내공이 늘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닌 다음에야....”
소리치는 당미려를 당유리가 잡아 말렸다.
“...일단 말해봐라. 무얼 받고 싶은 건지부터 들어봐야겠다.”
당원진이 살짝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28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려는 시도는 진즉에 포기한 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연명은 덤덤하게 할 말을 뱉었다.
“극독을 원합니다. 당가십독이면 좋겠는데.”
“...극독을 원한다? 왜지? 그간 27호가 네게 만들어 준 독도 충분히 강력한 독들이었다. 극독이라 할 만 했지. 혹시 정말로 만독불침지체를 이루려는 거냐? 만약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사람의 몸이란 어떤 환경에건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적응하기 마련이라, 중독과 해독을 반복하다 보면 독에 대한 내성 또한 얻을 수 있다. 오래 일한 약초꾼들은 가끔 독초를 씹는 경우가 있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죽음에 이를 독에 중독되고도 멀쩡하게 살아나는 것이 그러한 예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사람이 일단 중독되게 되면, 몸에서 독을 인지하고 해독을 시작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극독이라 불리는 종류의 지독한 독들은 그러한 시간조차 주지 않고 온몸에 퍼져 사람을 죽게 만든다.
애초에 중독과 해독을 반복해서 내성을 형성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독요청광심법을 비롯한 당가의 가전 심법을 익힌 이들은 극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내성이 있는 편이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설마하니 당연명이 독요청광심법을 대성하여 어떤 독이건 먹어치우는 기운을 연성해 놓았다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런 우려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행여나 만독불침지체와 같은 허망한 경지를 이루려다 잘못되기라도 할까봐. 안 그래도 27호가 만든 독으로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것 같아 불안했던 때가 있었지 않나.
“복용할 생각은 아닙니다. 일단은.”
당연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기서 독요청광기를 더 성장시키면 화경에 이르러 환골탈태를 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먹어치우려고 극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영약도 필요 없었고.
“...극독에 ‘복용’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너뿐일 거다.”
당원진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극독이 무슨 영약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담 극독을 원하는 이유는 직접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것인데.... 경합에서 사용하려는 용도면 절대 안 된다. 애초에 당가십독도 무리고.”
당연한 얘기였다. 마지막 시험인 고독전은 그 이름답게 생존을 걸고 경쟁하는 것이었고, 죽고 죽이는 처절한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거기에 스스로의 능력으로 만든 독이 아닌 외부의 극독을 사용한다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다분했다. 그래서 당원진이 거부한 것이다.
특히 당가십독은,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들조차 조심해야 할 정도로 강력하기 짝이 없는 극독이었다. 한때 당가는 이 당가십독 때문에 멸문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걸 두려워한 무림 세력들에 의해서.
그러한 독을 소가주 경합에서 소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애초에 천심환 수십 개보다 당가십독이 귀하기도 했고.
“...그렇군요.”
당원진의 설명에 당연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당가십독을 받아둔 뒤에, 나중에 화경으로 올라설 때 사용하거나 살상수단으로 남겨두려고 했는데 천심환 대용으로 받아내기에는 무리인 듯했다.
‘당분간은 이전이의 독으로 무장해둬야겠군.’
소년은 더 이상 독이 필요치 않은 무위를 지니고 있었지만, 굳이 살상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독을 외면할 생각도 없었다.
또 진법 안이긴 했지만, 언제든 전투태세를 갖출 수 있게 암기와 독을 구비해두고자 했다. 이건 그냥 무인으로서의 습관이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래. 차라리 암기를 달라고 할까.’
소년의 암기술은 이미 경지에 다다랐지만 아직 자신만의 암기는 당문찬으로부터 빼앗은 수리검 하나뿐이었다.
“그럼, 제가 원하는 종류의 암기들을 받을 수 있을까요? 천심환 대신.”
“...진심이냐?”
“예.”
그렇게 말했는데도 천심환을 포기하겠다는 소년의 말에 결국 당원진이 한숨을 쉬었다.
‘약왕당에서는 좋아하겠군. 천심환 하나를 아꼈으니.’
“휴... 그래. 무슨 암기가 필요한 지 말해봐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