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고독전(2)>
“드디어.”
촘촘한 면사로 얼굴을 가린 소녀가 감개가 무량한 듯 중얼거린다. 소녀는 막 여인으로 넘어가는 듯 잘록한 허리와 굴곡진 몸매를 지니고 있었는데, 대강 윤곽만 봐도 몹시 아름답게 자라는 중인 것 같았다.
하지만.
문득 불어온 바람이 면사를 살짝 들추자 그녀의 피부가 살짝 드러났는데, 놀랍게도 우둘투둘한 것이 두꺼비의 그것을 방불케 하는 것이 아닌가?
단순히 여드름이나 곰보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독성이 있는 것에 접촉해 피부가 완전히 망가진 듯했다.
‘그때 보여준 실력이라면 놈도 분명 고독전까지 올라왔겠지.’
경합 1조의 조장이자 통칭 2호라 불리는 소녀가 새로운 진법 세계로 들어서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당연명.”
짓씹듯 내뱉는 목소리가 스산했다. 원한도 보통 원한이 아닌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얼굴을 망가뜨린 게 바로 당연명이었던 까닭이다.
소녀의 정체는 바로 당영령이었다. 가문의 실세인 삼장로를 외조부로 둔 덕택에 그녀는 당연명과의 일이 터진 직후 받을 수 있는 최선의 치료를 받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다른 곳은 어떻게 되돌릴 수 있었지만 망가진 얼굴만은 약왕당의 인물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했다. 여러 독이 복합적으로 얽혀 완전히 새로운 독으로 변모한 까닭이었다. 그나마 독기를 완전히 제거해 목숨에 지장이 없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했다.
외조부의 권세를 빌려 당장에라도 놈을 무릎 꿇리고 사지 근맥을 끊어놓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영악하게도 놈은 일을 저지르고 나서 곧장 암독전을 찾아가 소가주 경합에 참가하겠다고 말했다고. 경합에 참가하여 예비 소가주의 자격을 얻게 되면 가문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면책이 되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허, 어린놈의 심계가 대단하군! 어쩔 수 없겠구나.’
외조부인 삼장로 당석형 역시 그걸 알고 나선 깔끔하게 포기했다. 애지중지하던 외손녀가 호되게 당한 것은 물론 그로서도 열불이 뻗쳤지만 소가주 경합은 단순히 소가주를 정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차기 당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명분과 권력, 무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영민한 자제를 둔 가문의 핵심 인물들은 물론이고, 혈육이나 제자를 앞세워 장로들까지 뛰어든 판인 것이다.
아무리 삼장로 당석형이 가문의 실세라 해도 소가주 경합만큼은 건들 수 없는 이유였다. 얽혀 있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외손녀인 당영령이 경합에 참가하는 판국에 약간이라도 흠 잡힐 만한 일은 만들지 않으려는 것도 있었고.
삼장로 당석형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지금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옳다고. 득보다 실이 많았다.
‘참아라. 영령아. 어차피 그깟 놈은 네가 소가주가 되면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 혹은... 그 안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겠지. 마지막 시험에서 벌어지는 일은 불문에 부치기로 했으니 말이다.’
당시 어렸던 당영령은 나름 자신 있던 얼굴이 망가지고 자존심 역시 무너져 분통이 터질 대로 터졌지만, 외조부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옛말에도 있지 않던가.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한 가지 우려했던 것은 당연명과 같은 조에 배정되는 것이었는데, 외조부가 손을 쓴 것인지 그런 불상사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운 좋게도 한쪽 팔이 병신이 된 당문찬과 같은 조가 되었는데, 당문찬은 스스로에게 가능성이 없음을 빠르게 인정하고, 당영령의 편에 섰다.
병신 주제에 어딜 감히...!
당영령은 내심 그를 멸시했지만, 한손이라도 아쉬운 입장이었다.
‘만약 내가 소가주가 된다면, 네 팔을 고칠 방도를 알아봐줄게.’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설마하니 임시 조장이 되고나서 그런 제약이 있을 줄이야. 천심환을 복용하고 내공이 제법 증진되긴 했지만 조원 셋을 상대로 한 비무에서 승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문찬을 포섭해두었기에 비교적 손쉽게 정식 조장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식 조장이 되자 진법을 관리하던 제갈가의 무인이 비밀스레 접촉해왔다.
‘2호. 그대는 우리 제갈가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슨 저의로 그런 걸 물으시는 거죠?’
‘제갈가는 차기 당가주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싶소.’
‘긴밀한 관계라면...?’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오. 가령, 우리는 그대가 소가주의 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소?’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죠?’
‘마지막 시험인 고독전. 그 무대가 누구의 손에 의해 꾸며지는지 생각해보시오.’
‘진법을 통해 도움을 주겠다?’
‘그렇소. 그대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도록 만들어줄 수 있지. 다른 참가자들이 서로 먼저 부딪치도록 만들 수도 있고, 지치거나 다친 참가자를 그대 쪽으로 움직이게 유도할 수도 있소.’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권력의 중심에 있던 외조부를 보아온 당영령은 알고 있었다. 마냥 달콤하기만 한 제안은 없었다.
‘그럼, 그쪽이 얻는 건 뭐죠?’
‘차기 소가주... 아니, 차기 당가주가 될 사람에게 빚을 지워두는 것이겠지. 솔직히 얘기하리다. 우리 제갈가는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부흥하기 힘들다고 판단을 내린지 오래요. 그래서 차라리 한때 같은 오대세가였던 귀가에 복속되고자 하는 의견이 본가의 중론인 바, 하지만 그냥 귀 가문에 합쳐져서는 우리 역시 설 곳이 좁지 않겠소?’
‘그래서 날 돕는 것이군요.’
‘그렇소. 차기 당가주를 뒷배로 둔다면 그만큼 든든한 것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제가 그때 가서 당신네... 제갈가를 배척할 수도 있지 않나요? 어떻게 보면 당신들의 존재 자체가 제 약점이 될 수 있을진대.’
‘후후. 그래서 우린 그대에게 확실한 힘이 되어주고자 하오. 우릴 버리지 않도록, 아니 버릴 수 없도록 말이오.’
‘.......’
‘일단 우리가 그대의 뒷배가 되어주겠소. 이 자리에서 본가와의 혼약을 약조한다면!’
‘혼약...? 지금 제 얼굴이 어떤 꼬락서니인 줄 알고 감히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물론 그대의 용모가 모종의 일로 퇴색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소. 그러나 외모는 어차피 한때의 것일 뿐. 본가의 영명한 후기지수 중에 고작 겉모습에 현혹되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소. 어떻소? 그들 중에 가장 출중한 용모를 지닌 이를 그대의 반려로 주리다.’
당영령으로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솔직히 여인으로서, 얼굴이 망가지고서 얼마나 속앓이를 했던가. 언젠가 사랑하는 사내가 생겨도 그가 자신을 사랑할 것 같지 않았다. 이처럼 흉측한 외모를 지닌 여자를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그래, 어차피 그럴 거라면 혼사마저 자신의 앞날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당영령은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제갈가의 후기지수 중 가장 반반하게 생긴 사내라면 남편으로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고.
외조부 또한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서라도 그녀가 소가주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바랄 터였다.
‘하나만 확실히 해두죠.’
‘무엇을...?’
‘당가는 데릴사위의 전통이 있죠.’
‘그야 물론 알고 있소. 그대와 혼인하는 이는 당씨 성을 쓰게 될 거요.’
‘그럼, 마땅히 제 몸에서 난 소생(所生) 역시 당씨가 되겠죠.’
‘...당연한 말씀이오.’
그렇게 제갈가와의 은밀한 교섭이 성립됐다.
“얼른 보고 싶네.”
지난 3년간, 놈을 찢어죽일 날만을 생각하며 수련해왔다. 이제 제갈가의 지원마저 등에 업은 것이니, 소가주 경합에서 승리하는 것은 당연지사로 다가왔다.
부우욱!
고독전이 펼쳐지는 새로운 진법 세계라서일까. 아니면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
당영령은 갑자기 그간 얼굴을 가려왔던 면사를 잡아 뜯었다.
그러자 그녀의 흉측한 얼굴이 햇살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울퉁불퉁한 피부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짓누른 듯 진물마저 흐르고 있어 보는 이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법한 끔찍한 몰골이었다.
“네가 날 못 알아보면 안 되니까.”
그렇게 말하며 섬뜩하게 웃는 그녀의 눈에는 기대와 희열, 증오와 묘한 광기까지 어지러이 뒤섞여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대해. 이 세상 다시없을 끔찍한 독으로 죽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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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당연명은 제갈창신의 안내에 따라 고독전을 위해 마련된 새로운 진법 세계로 발을 디딘 뒤였다.
‘제법이군.’
원래 칠쇄환궁진은 각각 별개의 진법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 진법이었다. 행여나 침입자가 발생하더라도 그 침입자는 어느 하나의 진법 세계로 들어서게 될 뿐이었으니, 나머지 여섯 개의 진법 세계는 안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차하면 침입자가 속한 진법 세계를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뒤바꾸어 역공을 가할 수도 있었으니, 가히 절진이라고 부를 만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진법 세계들을 겹쳐 하나로 통하는 새로운 진법 세계를 구축하기까지 했으니 과연 진법에 있어 대가들이 모인 제갈가라 할 만 했다.
웬만한 이들은 그 원리가 어떻게 되는지 감히 짐작할 엄두도 못 낼 만큼 고도로 술법화된 진법⎯ 그러나 당연명에게는 감각도 주사망역이 있었다.
대성에 이른 주사망역을 통해 강화된 기감으로, 당연명은 대강 칠쇄환궁진이 어떤 식으로 짜여 있는지를 통찰했다. 정확히는 고독전을 위해 마련된 이 새로운 진법 세계의 구조를 파악하고자 했다.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진법 세계가 어떠한 원리로 돌아가는지 그 구조를 파악하고 나면 다른 참가자들의 위치 또한 쉽사리 알 수 있을 터.
빠르게 경합을 마무리 할 심산이었다.
‘음?’
문득 당연명은 어떤 불온한 시선을 느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훑어보는 듯한 불쾌한 감각.
‘...고독전은 분명 누구도 그 추이를 모를 거라 했는데.’
어떤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제갈창신의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어쩌면 그 웃음 뒤에 어떤 모략이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버릇처럼 경합의 공정함을 얘기하던 제갈창신이었는데, 마지막에 와서 경합에 개입하기라도 할 작정인 걸까.
순식간에 떠오르는 의문들을 뒤로 하고.
당연명은 수리검을 하나 꺼내 들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마당에, 제갈가가 어떤 수작을 부리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경합에서 승리하는 것은 그가 될 것이기에.
탁.
가볍게 바닥을 차는 듯 보였지만, 금세 당연명의 신형이 희끄무레해지더니 증발한 듯 사라졌다. 당가의 가전 신법, 은밀하기로는 살수 문파의 그것과 비견될 정도의 몸놀림⎯ 암영(暗影)이 펼쳐진 것이다.
사라진 당연명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호흡 뒤, 허공에서였다.
‘거추장스러운 시선이야, 제거하면 그만이지.’
생각과 함께 수리검을 가볍게 스윽 휘두른다.
언뜻 헛손질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검신(劍神)이 휘두르는 검격은, 보이지 않는 것마저 가를 수 있었음에.
촤아아악⎯!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길게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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