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고독전(3)>
“헙!”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뒷걸음질 치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항시 놓지 않던 섭선 마저 떨어뜨리고는, 더듬거리며 두 눈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했다. 순간적으로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진법 세계와의 연결을 끊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곧 시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사내는 안도했다.
그는 바로 당연명을 고독전이 펼쳐질 진법 세계로 인도한 제갈창신이었다.
제갈창신은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각 조의 조장들이 새로운 진법 세계로 모두 들어서고, 고독전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칠쇄환궁진 위에 덧씌워진 진법 세계는 너무도 복잡해 제갈가 역시 일체의 개입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갈가 무량전주인 제갈창신만큼은 진법 내부의 상황을 살피고, 또 진법 자체를 조작할 수 있었다.
제갈가는 이미 2호와 비밀스러운 거래를 마친 뒤였고, 제갈창신은 거래를 거절한 10호와 차후 영입하기로 한 28호만 주의하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일단 제갈가의 비전 안법인 진명안(眞明眼)을 통해 둘을 살피고자 했다. 진명안을 이용하면 진법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볼 수 있었기에.
10호보다는 일단 요주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28호부터 눈여겨보고자 했다.
하지만.
7조 조장으로 뽑힌 28호 소년은 진법 세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심상찮은 낌새를 풍기더니 제갈창신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부터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진명안을 통해 관조하는 진법 세계에는 사각이 없는 법이었는데...!
그리고 소년이 다시 허공에서 나타났을 때.
‘...!’
제갈창신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소년의 눈길이 정확히 그의 존재를 응시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소년과 제갈창신 사이에는 몇 겹으로 중첩된 진법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연히 어지간한 감각으로는 절대 진법 세계 외부에 있는 제갈창신을 인식할 수 없다.
‘터무니없는 기감...!’
상정하지 못한 일이 버젓이 벌어졌지만, 제갈창신은 현실을 부정하는 대신 빠르게 판단했다. 곧장 28호 소년이 있는 진법 세계와 진명안의 연결을 끊었다.
제갈가의 진법은 마냥 환상이 아니었다. 실체와 허상이 뒤섞여, 그 모든 것들이 진법 안의 존재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건 칠쇄환궁진 안에 있는 제갈창신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만약 제갈창신이 진명안을 거두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분명 시력을 잃었을 터였다. 직후에 잠시 암전되었던 시야가 그 증거였다.
“...대체 그건 뭐였지.”
시야를 회복한 제갈창신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연결이 끊어지기 직전, 그는 분명히 느꼈다.
소년이 가볍게 휘두른 수리검이, 중첩된 진법을 아예 공간 채로 찢어발기는 것을...!
제법 견식이 뛰어나다 자부하는 제갈창신이었지만, 그조차도 그런 검격은 듣도 보도 못했다. 공간을 뛰어넘어 본질을 베는 검초였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아니, 그전에 그걸 검격, 검초라 칭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소년이 휘두른 건 고작 수리검⎯ 한낱 암기에 불과했을진대.
‘오판이었나.’
제갈창신은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애초 당가의 소가주와 이번 경합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는 인재, 그렇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던 대계가 시작부터 어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만약 제갈가와 손을 잡은 2호 소녀를 누르고, 28호 소년이 경합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또 방금 28호 소년이 행여나 제갈가의 개입을 눈치 챈 거라면...?
차기 당가를 이끌어갈 사람에게 미운털이 박힐 지도 모른다.
‘최악이다. 만약 그랬다간 본가는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들어질 터.’
안 그래도 당가의 지원으로 겨우 숨통이 트인 마당인데. 제갈창신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어떻게든 2호 소녀가 이번 고독전에서 승리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살길이었다.
그러나 제갈창신은 다시 28호 소년을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번 그의 기감에 걸렸으니, 다음엔 정말로 눈을 잃을지도 몰랐다.
****
한편.
감시의 눈길을 도려낸 당연명은 쉴 곳을 찾았다. 휴식이 필요해서는 아니었다.
마지막 시험인 고독전에 대한 것을 들었을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게 있었다.
‘여기서 화경에 오른다.’
그간 덜 자란 육신 때문에 화경에 오르는 것을 미뤄왔던 당연명이었다. 제대로 화경에 오르게 되면 환골탈태 역시 겪게 되니까. 이제는 웬만큼 팔다리도 길어졌으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는 이 진법 세계에서 화경에 오를 생각이었다.
실체와 허상이 공존하는 진법 세계 내부는 꽤나 넓었다. 경공 추월광행(追月光行)으로 한동안 질주하던 당연명은 곧 마땅한 장소를 찾았다. 맹수가 살기라도 했던 것 같은 굴이었다. 주변에 작은 짐승의 뼈 무덤이 보였다.
주사망역까지 운용한 기감에 딱히 걸리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명은 안에 들어가 털썩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옷을 벗을 필요는 없겠지.’
원래라면 환골탈태를 겪을 때 몸속에서 그간 쌓인 노폐물이 잔뜩 배출된다. 아무리 어릴 적부터 호흡법을 익히고 부단히 수련을 했다 해도 탁기가 쌓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부터 대성한 심법으로 혈맥을 닦아낸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당연명은 이미 가문에 있을 적 깨달은 세맥 자극법으로 온갖 경맥에 쌓인 불순물들을 뽑아낸 뒤였다. 직후에는 대성에 이른 독요청광심법을 쉼 없이 운용해왔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몸속의 상태는 이보다 더 청정할 수가 없었다. 아마 환골탈태를 하게 되더라도 노폐물 따위가 나오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됐다.
‘그럼, 시작하자.’
화경에 이르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기에 의념을 실을 정도의 깨달음과, 임독양맥(任督兩脈)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고강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으면 된다.
임독양맥이란, 인중에서 시작해 배꼽을 통과해 회음혈까지 이어지는 임맥과, 반대로 회음혈에서 시작하여 척추와 정수리를 통과해 인중까지 이르는 독맥을 이르는 것이었다.
이 두 개의 경맥을 완전히 타통하여 순환을 이루게 하면, 비로소 기의 수발이 완전히 자유로워지며 진정한 상승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생사현관(生死玄關)을 뚫는다고 하기도 했다.
물론 말만 쉽지, 임독양맥은 어지간한 내공으로는 타통하기 힘든 대맥(大脈)이었다. 게다가 민감하기 그지없어, 잘못 뚫으려고 시도했다가 폐인이나 광인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심하면 앉은 채로 즉사였고. 이건 한때 순정한 기운을 지닌 정도 쪽에 화경의 고수가 더 많은 요인이기도 했다. 섬세함이 요구되는 부분이 있었던 까닭이다.
결국 기에 의념을 실을 수 있는 고수들이 이러한 생사현관 타통을 시도해볼 만했는데, 사실 그 정도의 깨달음을 얻은 이들은 이미 무지막지한 내공량으로 자연스레 임독양맥을 뚫고서 화경에 올라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쨌거나.
지금 당연명은 상당히 묘한 상태였다. 수백 년 무림사에 과연 이러한 경우가 또 있었을까.
일단 전생의 깨달음을 간직하고 있기에 정신적인 부분은 이미 화경을 넘어서 있었다. 따라서 내공만 충족되면 그대로 임독양맥을 타통하고 화경에 올라설 터였다. 하지만 아직 덜 자란 육신 때문에 환골탈태를 우려한 당연명은 아예 임맥과 독맥을 스스로 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쪽으로 진기가 조금도 흘러가지 않게 막아왔던 것이다.
덕분에 극독을 먹고 몸집을 키워온 독요청광기는 당연명의 전신 경맥과 세맥에 꽉꽉 들어차 있었다. 비유하자면 넘쳐흐르기 일보직전인 술잔과도 같은 상태.
그 상태에서 당연명은 임맥과 독맥으로 향하는 것을 막고 있던 둑을 무너뜨렸다.
툭.
그러자 뻗어나갈 곳을 찾은 독요청광기가 벌판을 질주하는 준마마냥 내달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기세였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는 당연명의 몸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그동안 억눌려온 탓일까. 날뛰는 기세가 강해도 너무 강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황해서 통제를 잃어버릴 정도였지만, 당연명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전생에 그가 익혔던 심법이 무엇이던가. 패력심법⎯ 용력지체가 아니면 익히기 힘들 정도로 강맹한 기운을 쌓는 호흡법이었다. 패력진기를 일상적으로 다뤄왔던 당연명에게 이 정도 진기의 난동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워.’
야생마에게 고삐를 채우는 감각으로, 당연명은 능숙하게 독요청광기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막아 세우지 않는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않고 일정한 흐름으로 내달리도록 유도한다.
강맹한 흐름이 순식간에 거대한 물결이 되어 임맥과 독맥을 흘렀고, 당연명은 어느 순간 인중과 회음부가 뻥 시원하게 뚫리는 해방감을 느꼈다.
마침내 생사현관이 타통된 것이다.
배꼽 아래 단전에서 시작된 기운이 당연명의 육신 사지백해로 뻗어나갔다. 앞뒤로는 크게 원형으로 독요청광기가 대차게 흘렀다.
당연명은 이제 더욱 큰 기운을, 더욱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음을 자연스레 깨달았다.
비로소 조화경(造化境)이라 불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한 자각이 드는 동시에.
우두두두두두둑⎯!
가부좌를 틀고 있던 당연명의 몸에서 엄청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온몸의 뼈가 부러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예견했듯이 환골탈태가 시작된 것이다. 화경에 이른 성취에는 그에 걸맞은 육신이 주어진다. 타고난 틀을 완전히 바꿀 순 없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무학을 펼치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의 육신으로 재구성된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 순간, 당연명의 전신 뼈마디는 아주 잘게 조각났다 붙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약간이나마 팔다리가 더 길어지고 더욱 튼튼한 뼈마디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는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환골탈태를 겪을 때 지극한 고통으로 정신을 잃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당연명은 그저 덤덤하게 육신이 변화하는 것을 관조하고 있었다. 이미 한 번 겪어보고 각오했던 터라 고통은 참을 만했다.
‘근육이 질겨졌어. 이제 강검을 휘두를 수 있겠군. 피부는 탄력이 더해졌고... 쾌검 또한 문제없겠어.’
습관적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된 검격을 확인하던 당연명은 문득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곤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웬만하면 암기술과 용독술만 드러내자.
더 이상 살벌한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 뒤로도 한동안 환골탈태는 계속됐다. 손톱과 발톱이 후두둑 빠지고 다시 자라고, 머리칼 역시 우수수 빠지더니 훨씬 길고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이 새로 자라났다.
어느새 가부좌를 틀고 있던 당연명은 곧게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놀라운 건 바닥에서 세 치(대략 10cm)쯤 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한 시진 가량을 체공하던 당연명은 어느 순간 화악! 터져 나오는 빛과 함께 바닥에 내려졌다.
마침내 환골탈태가 끝이 났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