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고독전(4)>
번쩍!
사내가 눈을 뜨자 진녹색 광망이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다 점차 옅어졌다. 넘치는 기세를 갈무리하는 과정으로 보였다.
당연명이 천천히 일어나면서 중얼거린다. 이제야 좀 쓸 만해졌군.
임독양맥이 타통되면서 독요청광기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기세를 지니게 됐다. 세찬 급류 같은 기운이 끊임없이 전신을 휘돈다. 살짝 주먹을 말아 쥐자 충만한 힘이 느껴졌다.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바라마지 않는 경지⎯ 화경에 도달했건만, 당연명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만족감이나 희열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명은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무인들에게는 종점이나 다름없는 경지인 화경이, 사실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겨우 강기(罡氣)를 쓸 수 있겠어.’
화경에 이르러 기에 의념을 실을 수 있게 된 무인은 검기나 도기 따위와는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 극강의 기예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게 바로 검강(劍罡)이나 도강(刀罡)으로 불리는 강기였다.
기에 의념을 실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성질을 원하는 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무엇이든 베고 말겠다는, 절세 검객의 의념이 서린 검을 과연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그러한 의념이 배였다면 비단 검이 아니라 풀잎이라 해도 쇠를 자를 수 있었다.
그래서 강기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와 동등한 수준의 의념이 서린 강기뿐이었다.
화경에 이른 절세 고수들 간의 싸움은 결국 압도적인 무학의 우위가 아니면, 직접 강기를 맞부딪쳐 한쪽의 의념을 완전히 깨뜨려야 판가름이 나는 법이었다.
그리고 당연명은 그 사실을 전생의 사부였던 검귀로 인해 알고 있었고.
동굴을 나서면서, 문득 당연명이 검지와 중지를 세우고 엄지까지 딱 붙였다.
검결지(劍訣指)라 불리는 자세였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순간 뿌연 빛 무리가 모여들며 진녹색 광채가 손가락에서 뻗어 나왔다. 자색 기류가 신비하게 감도는 듯하기도 했다. 독요청광기로 펼친 검강이었다.
당연명이 동굴의 입구를 향해 검결지를 취한 오른손을 슥슥 휘둘렀다. 아무런 저항 없는 움직임⎯ 그러나 한두 호흡이나 지났을까. 놀랍게도 동굴이 안쪽부터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진기의 효율이 좋아진 덕을 보는군.’
당연명은 검강에 들어가는 독요청광기가 그리 많지 않음을 깨닫고 흐뭇함을 느꼈다. 오랜 시간을 공들인 세맥 자극법이 제대로 효용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전생에서 검결지로 검강을 형성하는데 드는 내공량이 10이었다면, 지금은 7정도라 할 수 있었다.
얼핏 별 것 아닌 차이인 것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이건 화경에 이른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엄청나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무학 수준은 큰 차이 없이 엇비슷하기에, 강기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에서 승패가 갈리는 편이었던 까닭이다.
물론 검신의 영역에 다다랐던 당연명으로서는 굳이 내공량에 의지하지 않아도 됐지만....
‘그럼 움직여볼까.’
당연명은 감각도 주사망역을 최대한으로 펼쳤다.
화악⎯
엄청난 빠르기로 확장되는 기감이 주변 모든 생명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감지했다. 마치 하늘을 덮는 거대한 그물이 현현한 듯했다.
그 상태로 경공 추월광행을 펼쳐 이동하자 금세 어떤 기척이 기감의 그물에 잡혔다.
‘저쪽이군.’
눈을 빛낸 당연명이 곧 연기처럼 사라졌다.
****
“아⎯ 지루하네. 고작 이게 다야? 고독전이라 해서 조금 기대했는데. 대체 삼 년 동안 뭘 한 거야? 소가주가 될 생각으로 온 거 아녔어?”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하는 청년이 있었다. 열일곱, 혹은 열여덟쯤으로 보이는 청년은 비도 한 자루를 던졌다 받았다 하며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방금 한 말처럼 정말 지루해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청년이 내려다보고 있는 곳에는 웬 덩치 큰 소년이 피칠갑을 한 채로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운이 좋은 게 아니었어.’
덩치 소년, 당정일은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임시 조장에서는 탈락하고, 남은 조원들과 합공해서 결국 정식 조장의 자리를 따내고 나서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때는 정말 소가주의 자리가 손만 뻗으면 닿을 것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마지막 시험인 고독전에 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의 청년을 마주치게 된 것이다. 청년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비도를 들고 있었다. 아직 그에게서 감도는 비릿한 혈향이 말해주고 있었다. 방금 전에 청년이 누군가를 ‘처리’하고 왔다고.
당정일은 세월이 흘러 소년이 청년이 되었지만,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당극린.
대장로 당석중의 제자.
당연명이 소가주 경합에 참가하기 전, 원래 참가자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암기술이나 용독술에서 이미 독보적인 성취를 이뤘다고. 대장로가 아주 흐뭇해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자기 친손주처럼 여긴다던가.
당극린은 방계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부모를 모두 여의고 우연찮게 당석중의 눈에 띄었는데, 그 자질에 반한 당석중이 바로 제자로 삼았다고 했다. 나이가 차면 그의 손녀와 성혼시킬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방계끼리의 혼인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당극린을 마주한 당정일은 재빨리 공격을 가했더랬다. 선수필승!
그러나 한 순간 쏟아낸 암기들을 당극린은 너무도 쉽게 피해냈다. 신법 성취가 보통이 아니었다. 당정일의 안법 수준으로는 당극린의 움직임을 뒤쫓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러한 상황이니 독을 쓰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당정일이 선택한 것은 근접박투였다.
원래 또래보다 우월한 체격과 힘을 타고난 당정일은 권각술을 주로 익혔었다. 당가라 해서 꼭 암기와 독만 쓰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당연명에게 당해 주먹 뼈가 으스러지고 난 뒤로는 장법 위주로 연마를 하게 됐다. 주먹은 그럭저럭 회복이 됐지만 한 번 무너진 권법을 다시 익히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적당히 완력의 우월함을 앞세우면서도 기운을 잔뜩 실을 수 있는 장법은 당정일의 취향에 꼭 맞았다. 당정일이 익힌 것은 비응독장(飛鷹毒掌)이라는 것이었는데, 쾌속하면서도 일단 적중시키면 상대를 무력화할 수 있는 강력한 독기를 품은 장법이었다. 그는 같은 조에서 임시 조장을 맡았던 소년을 이 장법으로 쓰러뜨린 바가 있었다.
당정일은 생각했다. 아무리 당극린이 기재 소릴 들을 정도로 뛰어났다지만, 그건 어릴 적의 일일 뿐이었다고. 자신도 삼 년간 놀고 먹은 것은 아니지 않나. 한 번만, 딱 한 번만 장법을 격중시키면 단번에 승세를 휘어잡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흐음. 근접박투면 네가 유리할 줄 알았나보지?
당극린은 그리 말하고는 당정일의 코앞에서 휘둘러지는 모든 장법을 피해냈다. 당정일이 미친 듯이 손을 휘둘렀지만, 장심에 닿는 모든 것이 당극린의 잔영이었다. 안법과 신법에서 모두 크게 뒤처진다는 의미였다.
한동안 당정일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당극린은 이내 당정일이 지친 기색을 내보이자 흥미가 떨어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루하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당극린이 비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악, 사악.
처음엔 당정일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다. 그저 당극린의 비도를 피하기 위해서 정신없이 움직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곧 깨달았다. 당극린은 비도를 이용해 놀랄 만큼 얇게 당정일의 피부를 저미고 있었다. 어느 순간 양 볼과 손등에서 가는 핏줄기가 피핏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미친!’
‘이제야 눈치 챘나 보네? 넌 조금씩 피부가 벗겨져서 죽을 거야. 살고 싶으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날뛰어봐.’
‘...자라새끼가!’
‘저열한 도발 따위는 안 통해.’
당극린은 한가로운 표정으로 계속 비도를 슥슥 그어댔다. 당정일의 옷자락은 진즉에 잘려나갔고, 팔과 옆구리, 허벅지와 이마 같은 부위에서 계속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당정일은 이마에서 흐른 피 때문에 시야가 살짝 붉어지자 직감했다. 승부를 봐야 할 때가 됐다고. 놈은 어차피 자신을 죽일 생각으로 보였다. 이대로 죽는 것보단...!
‘죽엇!’
당정일은 일부러 소리치며 크게 손바닥을 휘둘렀다. 뒤를 생각지 않는 한 수. 잠깐의 틈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잠시 당극린이 멈칫했을 때 당정일의 손이 기민하게 품속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직후에 당정일의 주변으로 분홍빛 가루들이 후욱 흩날렸다.
홍사분(紅蛇粉이라는 극독이었다. 홍사라는 뱀의 독주머니와 여러 독초를 배합해 만든 독으로, 한줌이라도 호흡으로 들이켜게 되면 즉시 사지가 마비되는 효과가 있었다. 게다가 마비된 사지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굳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당부윤. 가문의 부총관인 당정일의 부친이 거금을 들여 해독약과 함께 챙겨 준 당정일의 생명줄이었다. 지난 삼 년간은 쓰지 않았지만 지금이야말로 목숨이 위험한 때였으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홍사분을 쓸 때를 대비해서 가루독을 하독하는 방법만큼은 제대로 연마해온 당정일이었다.
중독됐겠지. 제발.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당정일은 곧장 해독약을 꺼내 마셨다.
이윽고 분홍빛으로 날리던 가루들이 가라앉았지만, 당정일이 기대하던 풍경은 없었다.
어느새 당극린은 나무 위로 훌쩍 뛰어 올라 있었던 것이다. 태평하게 비도를 던졌다 받으면서.
“같잖은 수를 쓰네. 이쯤에서 독을 쓸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홍사분이지, 그거?”
“.......”
“귀한 것을 그따위로 허망하게 날렸으니 꽤나 뼈아프겠어. 응?”
당극린은 조롱하듯이 말했지만, 당정일은 뭐라 대꾸하지도 못했다. 최후의 수단이 통하지 않았다. 연신 전력으로 장법을 펼쳐낸 탓에 내공량도 그리 온전치 않았고. 서서히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몸을 잠식해오고 있었다.
문득, 당정일은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삼 년 전, 그때도 죽을 지도 모른다는 감각을 느낀 적이 있지 않았던가.
‘...당연명.’
그때를 떠올리자, 어이없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눈앞의 당극린은 분명 두려울 정도의 강자였지만, 그때 그 깡마른 소년의 눈빛만큼은 아니었다.
“오.”
당극린은 살짝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전히 당정일을 내려다보면서다. 분명 겁에 질려 가는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어느 샌가 득도한 고승마냥 초연해진 낯빛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태 사냥했던 셋과는 다른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당극린이 훌쩍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
소리조차 나지 않는 깔끔한 착지.
“너. 날 알아보는 것 같던데.”
“...네놈을 모르는 사람이 더 적을 거다. 당극린.”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널 죽이려고 하는지.”
궁금하긴 했다. 먼저 목숨을 노린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죽이려고 드는지.
당정일의 얼굴에 살짝 의문이 떠오르자, 당극린은 빙글거리며 들릴 듯 말 듯하게 말했다.
“사실 난 말야. 간자거든. 태을묵검파의.”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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